설교모음(Korean sermons)

네 가지 ‘보다’의 의미( 요 20 : 1 – 8 )

호걸영웅 2015. 6. 16. 02:35

네 가지 ‘보다’의 의미( 20 : 1 8 )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서론)
1.
‘백문이불여일견’(Seeing is Believing)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번 보는 것이 백번 듣는 것보다 낫다-란 말입니다. 그런데 본다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저마다 다른 관점과 위치에서 바라보게 되면, 같은 것도 달리 표현되기도 하고 새로운 가치가 내려지기도 합니다.

2. 서울 어느 교회 성전에 감나무를 사용하여 아름다운 꽃꽂이로 임씨 성을 가진 자매님이 작품을 만들었답니다. 그 감나무로 만들어진 꽃꽂이는 임자매란 분의 눈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도로서 최선을 다하여 사랑을 표현하는 은혜롭고도 아름다운 작품임이 분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배가 매우 고픈 분이 그 작품을 보았다면…… 그분의 눈에는 달고 맛있는 그야말로 먹음직스러운 과일, 혹은 먹거리로 보였을 것입니다.

 또 경제적 관념이 뛰어난 분의 눈에는, ! 저 꽃꽂이 작품의 원재료비는 3만원 정도일 것 같다 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고로 어떤 눈으로 보느냐, 어떤 관점으로 살피는가에 따라 사건이나 사물이 달라 보인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5,6,8절엔 에 ‘보다’라는 단어가 세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글 성경에서의 해석에는 ‘보다’라고 단순히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어 성경를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저마다 다른 단어의 동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표현이 되어 있었을까요? 오늘은 이 세가지 ‘보다’와 또 다른 보다라는 헬라어 단어를 통하여 그 의미들을 깊이 살펴봄으로써, 과연 나는 어떤 관점으로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 첫 번째. ‘보다’-블레페이 (5)
한 제자가 예수의 무덤 밖에서 허리를 구푸려 들여다 보았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헬라어로 ‘블레페이’( βλέπει =he sees)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의 시신을 감쌋던 세마포를 몸을 구부려 봤다고 했는데, 여기 기록되어 있는 보다의 의미는  얼핏 혹은 잠시 보았다, 또는 슬쩍 지나가듯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동굴 안은 어둡기도 했고 다소 긴장하고 두렵기도 하여 대충 희긋 희긋한 세마포가 있다는 것만 확인을 했던 것입니다. 또한 요한은 아마포를 무덤 안에 들어가서 확인하지 않았고 다소 먼 거리에서 외관만 본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도 이런 ‘블레페이’의 시선으로, 슬쩍 예수를 쳐다 보기만 하는 신앙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가길 꺼려하고, 세마포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알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교회에 관여하거나 들은 말씀을 자기와 적용시키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 19:8의 말씀에 성도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벗어 놓으신 세마포를 대신하여 입고, 그 옷의 주인에 대해 증거하고, 가르침을 전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대신하여 이 땅에 선한 행위, 즉 자신을 내어 놓는 삶,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14, 3:27)

그러나 블레페이의 의미는 멀찌감치 서서 예수님을 좀 더 가까이 하려는 마음이 아직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9:8은 성도들의 선한 행실을 흰 세마포로 상징했는데, 이 블레포의 믿음을 가진 자는 아직 그 옷을 입을 용기와 믿음이 부족한 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적당히하려는 믿음의 소유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고난 받고 은혜 받고 사랑을 나누는 삶이 아니라, 그저 예수와 그 교회의 겉만 맴도는 믿음의 차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두 번째, ‘보다’-데오레이 (6)
6
절에 베드로가 본 행위의 ‘보다’는 ‘데오레이’( θεωρεῖ=sees=쎄오레이?)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사물의 표면적인 바라봄이 아니라 본질과 목적에 대한 바라봄을 가지고 뚫어지게 보다, 매우 자세히 살펴 보다의 의미를 가진 단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요한처럼 세마포를 바라보았지만 슬쩍 본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의 수의가 저렇게 가지런히 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일까? 그 시신은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단 말인가? 누군가 수의를 풀고 시체를 가져 간 것이라면 그 긴박한 상황에 수의와 수건을 저렇게 가지런히 원래 있던 자리에 개켜서 올려놓고 가지는 않았을 텐데……’라는 등의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무덤 안에 들어갔을 때의  
들어가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어디에 속해있다는 소속감의 개념에서의 ‘들어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제사장이 성전에 들어갔다는 말에서 제사장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의미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제자라는 소속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베드로에겐 예수님 무덤 언저리에서 그저 통곡하고, 안타까워하는 주변인, 혹은 무관한 사람들의 자세가 아니라, 사실 자기도 붙잡혀 예수와 같이 죽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깊은 동지의식 내지는 제자로서의 책임의식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데오레오의 눈으로 바라보는 성도들은 예수를 믿고 활동적으로 헌신하고 믿음생활도 열심히 하긴 하지만 말씀대로 사는데는 아직 미숙한 성도이거나 고난에 동참하기 까지는 아직 이른 성도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고난이 오면 언제든 예수로부터 도망칠 수도 있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세 번째, ‘보다-에이덴 (8)

8절에 ‘보았다’는 과거형 동사‘에이덴’으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이 동사 보았다의 원형은  보다, 에이도~ (εἰδ =saw)입니다.  

 

9:1에 보면,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소경이 먼저 주님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소경을 보셨습니다. 여기에서 ‘보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에이덴’은 ‘알았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종종 ‘보다알다’라고 번역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요9:1에서, 우연하게 지나가다가 불쌍한 소경을 발견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계셨으며 그의 필요가 무엇인지 깨닫고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에이덴이해심을 가지고 보아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에이덴은 전반적인 사건이나 사람의 생각들을 알긴 하지만 그 폭이나 범위가 좁고 피상적인 면이 있습니다. 다소 완벽하게 안다고 할 수 는 없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결국 에이덴의 믿음이란 , 십자가 사건 까지는 믿지만, 부활 이후의 다시 살아나신 것 까지는 믿지 못하는, 나아가 아직도 성령의 출현이나 부활 승천의 불멸의 믿음을 갖지 못한 자의 모습, 혹은 신앙 상태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쉽지요?

 

) 네 번째, 보다-호라오 (ρω)  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없지만,  호라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에서 호라오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호라오’(ρω)깨달아 분명히 안다는 의미에서 ‘눈으로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경험하고 거의 99% 이상을 확실히 알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일한 의미의 단어는 마5:8에서 마음이 청결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에서옵손타이 (ὄψονται = will see)라는 단어입니다.

.
성경은 원래부터 항상 하나님을 본(호라오 : ρω) 사람이 없다(1:18)고 기록하고 있지만 예수 만은 예외라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하고 흠없는(카싸로스 : καθαρς) 자는 하나님을 뵐 것이라 했습니다.

 

결국 이 호라오는 보는 것인 동시에 제대로 아는 것이 됩니다.

영어도 I know=I see 지요?  고로 Seeing is believing이 된 것이지요?

 

여기서 성도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호라오의 믿음은 훗날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와 그의 승천을 뵙고 성령의 강림하신 오순절을 체험한 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믿음, 완전한 변화, 완전한 헌신의 상태입니다. 순교조차 불사하는 믿음입니다.

우리 주변의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단계에 오르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고로 변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헌신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멀찍이 서서 보고만 있습니다.

영적으로 깊은 체험을 하지 못하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있습니다.

2:20절은 호라오보다 또는 알다의 변화된 삶을 살게 된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결론)

1. 예수께서는 하나님 품 안에 계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천지창도와 운행하심을,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아셨고 천국의 소망을 알고 계셨습니다.

2. 예수께서는 고로 이 땅에 사시면서도 하늘나라를 보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셨지만 이 땅에서의 풍요로움과 쾌락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받게 될 면류관과 하나님의 칭찬을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십자가가 기쁨이었습니다. 십자가가 영광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호라오의 영적인 안목이 필요합니다.

3. 우리가 이 세상의 작은 예수가 되어 예수님을 대신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아는 눈, 예수님의 눈으로 영혼들을 바라보는 연민의 눈, 긍휼의 눈, 나의 삶의 목적, 나 자신과 교회의 사명을 살펴볼 줄 아는 호라오의 눈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부단히 기도하십시오. 부단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저는 진심으로,  여러분 모두가 호라오의 믿음을 갖는, 호라오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뵙는 그런 분들이 모두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 드립니다.

 

 

*참고: 참고: 차상욱,정지홍, 김준남 & 원어대조성경(로고스)/편집:익선06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