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소원 네 가지 (요17:9-13)
예수님의 소원 네 가지 (요17:9-13)
9. |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
10. |
11. |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12. |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
13. |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
서론)
1. 프랑스의 화가 에밀 리노프(Emile Renouf)라는 사람이 1881년에 발표한 "The Helping Hand", "돕는 손"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그림이 있다고 합니다.
이 작품에는 망망대해에 작은 배 한 척이 떠있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어부인 할아버지 와 손녀가 함께 타고 노를 젓고 있는데, 소녀가 노 위에 손을 올려 놓고 있지만 실제로 노를 젖는 것은 할아버지라고 합니다. 비록 손녀가 노 위에 손만 올려 놓고 있지만 힘들게 노를 젖는 할아버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때로 우리가 힘차게 인생의 노를 젖는 것 같지만 실은 우리 인생의 노를 가장 힘있게 젖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2.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제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로마군병들과 성전 경비병들에 의해 체포를 당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이 땅에서 하신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고 하면서,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마지막 순간까지 여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체포되기 직전의 기도에도 예수님의 소원이 담겨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기도 속에 있는 소원 네 가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
본론)
가)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을 지켜 보호해 주십사 기도하였습니다.
1. 요 17:11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셨어요.
예수님은 더 이 세상에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없음을 이미 아시고 아버지 하나님께 제자들을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 후에 극심한 십자가의 고통을 앞두고 계셨고, 감당하기 어려운 배신과 수치스러운 치욕과 잔인한 모멸이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부모님들을 통해서 종종 경험합니다.
2.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 32:10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야곱을 찾으셨고, 짐승의 울음소리만 들려 오는 황야에서 그를 만나, 감싸 주고, 보호하고, 당신의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나이다』라고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광야에서 지키셨던 하나님을 모세는 찬양하였던 것이지요. 한편 시편 기자는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 121:4도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도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지켜 주십사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2. 두 번째 예수님의 소원은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
1. 요 17:11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나이다. 나는 아버지께로 가오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면, 남은 제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가 된 것처럼 하나 되기를 소망하셨습니다.
하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몸과 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함께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는 곳에 예수님이 가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시키시는 일을 예수님이 그대로 순종하셨다는 것이지요. 비록 그것이 수치스러운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도 그대로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생활에서의 행복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나와 성격이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행복하려면 다른 비결이 있을까요? 하나가 되고 함께 수고하는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됨의 중요성을 권면했습니다.
엡 4:3=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라』했고,
엡 4:4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이니,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다.』고 했어요.
구역에서 먼저 서로 하나가 되시길 바랍니다. 구역식구가 많든지 적든지 하나가 되어서 함께 모이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섬기고, 함께 나누고, 함께 영혼 구원하는 일에 힘쓰면 행복한 교회생활이 될 것입니다. 사단은 성도가 하나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서로 이간질 시키고, 불신하게 만들고, 미워하고 불평하게 만듭니다.
하나가 되는 비결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겸손한 것이며 서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다)또 예수님의 3번째 소원은 하나도 잃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1. 요 17:12 = “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라고 했어요.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제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단지 스스로 멸망의 길, 사망의 길로 간 ‘가룟 유다’만을 잃었는데, 이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여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가끔 근심과 걱정 그리고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두려움의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지요.
내가 사랑하는 자녀, 내가 수고해서 모아놓은 재물, 나의 건강 따위를 잃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것보다 제자들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잃어서는 안될까요? 하나님만 잃지 않으면 됩니다. 하나님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온갖 축복이 다 있어요. 온갖 은혜가 다 있습니다. 고로 염려할 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어요. 롬 8:36~3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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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서 절대 우리를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 손보다 더 강한 손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라)예수님의 마지막 소원은 우리가 기쁨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13. |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
제자들은 예수님을 잃은 슬픔으로 고통스러울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너무도 충격적인 사건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스승을 십자가의 사형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할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당하실 치욕스러운 십자가형을 미리 다 아신 예수의 마음은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마음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기꺼이 목숨을 내 놓는 일에 만족함을 가지셨습니다.
비록 무지한 로마군사와 권세자의 종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비웃고, 조롱하고, 채찍으로 살을 찢고,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지만 ……예수님의 가슴에는 원망이나 공포심보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온 인류의 구원의 사역을 감당해 내신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이지요. 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순종입니까?
그래서 그의 사도된 바울도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가 때로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스러워도 웃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임박한 순교의 죽음을 기다리는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기뻐했고, 또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도 핍박과 환난 가운데 있지만 그들도 여전히 기뻐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기뻐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어떤 이유를 대서든 슬퍼하고 근심하고 계십니까?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고로 예수님은 요 16:33 에서『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나 그러나 담대할지어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비록 우리가 원치 않는 고난이 있고, 슬픔이 있고, 실패가 있지만 예수님 안에서 결국은 승리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오늘의 궁핍이 사라질 것입니다. 언젠가는 오늘의 고통이 사라질 것입니다.
언젠가는 오늘의 서러움이 없어질 것이며 언젠가는 오늘의 걱정이 기쁨으로 변할 것입니다.
결론)
본문을 살펴보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직전의 간절한 기도와 소원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제자들을 위한 것이요, 오늘날의 우리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은혜가 되고 위로가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거룩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악한 영들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우리가 하나가 되도록, 하나도 잃지 않게 하려고 그리고 기쁨이 넘치도록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기도하시고 기쁨과 소망 가운데 살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끝날까지 지키시며 사랑하시는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참조: 김기섭 /편집:익선 082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