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메시야의 통곡하심(눅19:41~44 )

호걸영웅 2017. 4. 13. 23:56

메시야의 통곡하심(19:41~44 )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서론)

 한국 문화뿐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 나약한 이미지로 비쳐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남자는 함부로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성경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그분이, 메시야인 그분이 눈물을 흘리다니!  물론 남자들이 눈물을 잘 보이지 않지만, 때로는 그 슬픔이 매우 클 때엔 눈물을 흘려야 정상이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눈물은 예수님의 ‘강렬한 슬픔’을 표현해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이 눈물에 관하여 몇 가지를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본론)
) 예수님의 공생애와 눈물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우셨음이 본문을 포함해서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i) 먼저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11:35)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자 사람들이 애통해 하며 울었습니다. 그 슬픈 광경을 보고 예수님도 비통한 눈물을 흘리셨다 했습니다

 ii)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5:7)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 인간적으로 너무나도 크나큰 심적 고통으로 인해 아버지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다 했어요.

 iii)세 번째는 본문 41절에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라고 많은 사람들이 기뻐 외치며 환영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는 감람산 기슭에서 성에 가까이 당도하자 예수님이 갑자기 우셨다 했습니다.

그 중에 본문 사건이 가장 비통한 눈물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본문 41절의 ‘울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클라이오’(κλαιω)인데, ‘흐느껴 울다’ ‘울부짖다’ ‘ 통곡하다’ 등 강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NIV)에서는 ‘weep’로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메시야가 ‘통곡’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고로 예수님의 우심은 매우 강렬한 슬픔의 표현이라 해야 맞겠습니다.


  )그 눈물의 의미 :

그 눈물의 의미는 곧 죄인에 대한 연민과 비통, 십자가 대속의 각오입니다.
  감람산 기슭을 내려오면서 눈앞에 펼쳐진 예루살렘 성의 모습은 너무도 평화로운 모습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은 햇살에 눈부시게 그리고 온화하게 그 위용을 나타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 게다가 마침 유월절 명절을 지키러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도 예루살렘은 온통 축제 분위기로 북적거렸을 겁니다.

그런데 정작 예루살렘 성 안에 사는 백성들의 영적인 상황은 어두웠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죄가 가득하고, 그러면서도 마치 자기들이 의로운 척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지 아니하는 강퍅함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게도 많은 선자를 보내고 예언의 말씀으로 그들을 교훈하고 책망하였으되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죠. 예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깝고 한심스러웠겠습니까?  
  

13:34~35 =예수님의 책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이었지만 백성들의 죄로 인해 로마에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그마저 십자가에 매달 것이며 더욱 무서운 재앙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본문 4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의 탄식이 나옵니다.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평화를 얻을 수 있는데, 그걸 모르고 무지한 가운데 예수님을 오해하고 거부하게 될 것이니 너무도 안타깝다는 말씀입니다.

43~44.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라고 햇습니다.

 

예수님의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고 말았습니다. A.D. 70년 티투스(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였어요. 그때가 마침 유월절이라 많은 인파가 예루살렘 성에 몰려들었었는데, 110만 명이 전염병으로 혹은 굶어 죽거나 학살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먹을 게 없어서 어미가 어린 자식을 잡아먹는 일까지 있었다 했습니다. 한 마디로 지옥 같은 상황이었던 것이죠.

10만 명이 로마 제국 각지로 노예로 끌려가 경기장에서 맹수 밥이 되거나, 칼로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랑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기초만 빼고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완파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 기슭을 내려오실 때 장차 있을 이 비극을 훤히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그래서 통곡한 겁니다.
 고로 예수님의 눈물은 어떤 의미입니까? 죄인들과 이스라엘에 대한 연민과 비통의 눈물입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의 마음은 백성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통분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비록 죄로 인한 고통이지만 벌 주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는 마음입니다.


) 우리가 흘려야 할 눈물 :
  그럼 오늘날 우리가 흘려야 할 눈물은 어떤 눈물일까요? 세가지가 있습니다.

  ① 회개의 눈물 :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믿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때 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어요. 천국은 죄인입장불가입니다. 인간 중에 의인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직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문이 보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 죄 씻음 받은 자만이 의인되어 천국 문을 통과하여 들어갑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된 후에도 나의 연얀함과 나의 고집과 나의 정욕적인 삶으로 인하여 우리는 자주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죄를 통회 자복하며 겸손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12~13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② 감사의 눈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육신의 생명 주신 것도, 영혼을 구원해서 영생을 주신 것도, 넉넉하든 빠듯하든 의식주를 공급해주시는 것도, 험한 세상에서 보호해 주시는 것도, ... 그 하나하나가 다 은혜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할 뿐입니다. 그 감사가 깊어지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기자처럼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요.

 

아이작 와츠(Isaac Watts)가 작사한 찬송가 141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  (1)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4)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감사의 눈물이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심을 기억하십시오.  

 

③헌신의 눈물 : 끝으로 우리는 영혼을 사랑하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눈물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눈물이요, 더 나아가 민족과 세계 만민을 위한 눈물이요 헌신의 눈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이스라엘 백성과 세계 인류의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제는 나 자신만을 위한 눈물이 아니라, 남을 위한 눈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눈물, 형제자매들의 죄를 인하여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의 증거입니다.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이런 헌신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거룩한 울보’였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백성들의 죄 때문에 울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죄악으로 인해 멸망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말씀 전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1:2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 ” 애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 ” 애3:48 ...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아주 강퍅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인간이었지만 예수 믿고 은혜를 체험한 후에 그는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넘어 헌신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 ”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죄악에 빠진 자들을 바라보며 자주 그들의 죄악을 안타까워하며 눈물로 기도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주기철 목사님(朱基徹 1897~1944)도 아시죠. 일제 말기 총독부는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합니다. 버티다가 하나 둘 굴복합니다. 당시 조선교회들도 차례로 신사참배를 결의합니다. 그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런 와중에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부하다 5 차례에 걸쳐 5 4개월간 옥고를 치릅니다. 결국 해방 1년 전 감옥에서 순교합니다. 그는 당시 범죄한 이 민족과 교회를 안타까운 모습으로 바라보며 통곡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나와 함께 울자!

 여러분, 이런 눈물이 이 땅의 역사를 이끌어왔고, 이 민족을 구원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론)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을 위해, 어지러운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 세계 선교를 위해, 또 나의 믿음의 연약함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죄에 빠져 방황하며 멸망 길로 달려가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의 눈물을 흘리십시다.

041317 안익선 목사/참고: 홍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