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스트레스 극복하기(시61:1-8)

호걸영웅 2017. 8. 10. 22:56

스트레스 극복하기(61:1-8)

1.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2.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3.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4.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5.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6.

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7.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8.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서론)

여러분!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운데 ‘스트레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트레스라는 뜻은 눌리고 압박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가정 문제, 건강 문제, 경제 문제, 사업 문제, 교회문제, 정치문제 등등, 기타 여러 가지 일로 인해 눌리고 압박을 당할 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을 합니다. 이 스트레스는 남녀노유 빈부귀천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공통의 문제거리입니다.

어찌 보면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스트레스의 도전 속에 이 스트레스를 극복하려는 응전의 역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 말 못할 고민과 고통 속에 사로 잡혀 자신의 인생이 어쩔 수 없이 하나 둘 파괴되고, 더욱 큰 스트레스가 여기저기서 터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스트레스에 대한 보다 완전하고 적극적인 대처방안을 찾지 못한다면 결코 저와 여러분은 행복한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없습니다. 고로 우리는 오늘 이 스트레스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어떻게 스트레스를 극복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본론)
) 스트레스는 어디에서부터 왔나?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 심히 좋았더라.(1:31)

그리고 인류의 조상인 아담은 창조된 모든 세계를 하나님의 지혜로 다스리고,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실과를 언제든지 먹을 있었습니다. 일단 의식주의 문제가 완벽히 해결이 되었으므로 그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인류가 당하는 질병과 죽음과 각종 저주가 없었으므로 이에 대하여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같은 아담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동물들은 서로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짝이 있어 서로 사랑을 나누는데 아담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짝이 없었습니다. 이런 아담의 외로움에 대한 스트레스 받는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2:18)고 하셨고 하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해결 받은 아담은 하와와 더불어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부러워할 것이 없이 서로 아껴주며 서로 사랑하며 서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교한 사단이 뱀의 모양을 하고 아담의 짝인 하와를 유혹하므로 인류는 최초로 사단에게 죽음이란 스트레스의 일격을 얻어맞고 맙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죄악을 범하고 난 후 수치심-이라는 스트레스를 먼저 받아 자기들의 몸을 무화과나무로 가리고 맙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은 가시와 엉겅퀴가 여기저기에서 돋아 나와 자신의 삶을 찌르고 할퀴는 스트레스 동산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가 점점 쌓이고 나면 인간은 그 스트레스에 눌려 죽음으로 가는 사망의 판결을 받아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영원한 심판이라는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죄악을 범하고 난 후에도 제 아무리 문명과 과학의 꽃을 피우고 발버둥을 쳐보았자, 결국 스트레스의 늪을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고로 스트레스의 근본 원인은 바로 죄악이라 하겠습니다.  죄악은 하나님과 분리됨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가?
성경은 기록하기를 말세에는 스트레스를 심히 받는 때, 곧 고통 하는 때가 이른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딤후3:1). 분명히 옛날보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 더 풍족하고 각종 문화 시설로 인해 더 나은 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옛날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에? 누가 스트레스를 줍니까?
“저 남자, 저 여자, 저 사람 때문이에요.” 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 옛날 하나님 앞에 서로 핑계되는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면 오히려 스트레스는 더욱 쌓이고 맙니다.

 

현대인의 스트레스의 근본 원인은 바로 대개는 바로‘나‘에게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잘살기 위해서는 사정없이 남에게 힘을 휘두르고,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각종 공격을 하고, 내가 남들보다 높아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물어뜯는 권모술수를 행하고, 내 차보다 남의 차가 먼저 끼어들면 사정없이 욕을 하면서 스스로 스트레스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이같이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적 심리상태는 서로를 물어뜯는 미움과 분노, 질투를 낳아 더 큰 스트레스를 발생시키고 맙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에서 극한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여러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의 한 여인은 자신이 당하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자 남자 친구를 6명이나 갈아치워 보았지만 여전히 스트레스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남자도 자신의 스트레스를 온전히 해결해주지 못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다윗 왕도 자기의 욕망의 스트레스를 풀어보고자 남의 부인을 가로채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살인교사의 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더더욱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뼈가 녹아내리는 듯한 번민 속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때로는 죄와 허물로 인해 스트레스의 압박감을 느끼며 이렇게 자기의 심정을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7:24)라고 고백하였을 만큼 스트레스에 억눌려야 했습니다.

 

) 어떻게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나?
마귀는 말합니다. “야- 술이 있잖아. 술로 풀어. 시원한 맥주 한 잔 어때? 기분이 좋아질 거야? 그래도 안되면 독한 술을 마셔봐.

 그리고 고스톱은 어때? 고돌이를 바라보고 힘껏 때려 보는 거야? 고스톱 칠 사람이 없으면 여기 가까운데 카지노라도 가봐. 그래도 스트레스가 안 풀리면 노래방에 가서 한번 신나게 놀아보란 말이야? 그리고 옛날에 부른 노래 있잖아. 니가 잘 부르는 18번 있지? 그것 무드 잡고 한 곡조 뽑아봐! 라고요.

어찌 보면 스트레스가 풀릴 것 같은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유혹으로써 마귀는 스트레스를 풀라고 합니다. 물론 가벼운 스트레스는 그런 것도 약간의 효과가 있겠지요. 그러나 사람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 스트레스를 풀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 “아니 진리가 나를 자유케하고 진리가 나의 스트레스를 풀어준다고요? 도대체 진리가 무엇입니까?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14:6) “아니 뭐라고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시고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던 예수님이 진리라고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53:2)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14:11)
“그래요? 그렇다면 한번 믿어보지요. 그런데 진짜 진리 되신 예수님을 믿으면 나의 스트레스가 풀어집니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아니 주님, 나는 지금 당신께 왔어요. 그리고 당신을 믿어요. 그런데 왜 나의 스트레스가 안 풀어지는 겁니까?

이때 또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처럼 (스트레스를 받아) 밖에 버리어 말라지나니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15:3, 15:9)라구요.


그러면 사람들은 주님, 어떻게 하면 당신 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10) ”고 하십니다.

 

아니 계명을 지키면 당신 안에 거하게 되고, 당신의 사랑을 받아 이 스트레스가 감쪽같이 사라진다고요? 도대체 그 계명이 무엇입니까? 내가 지키겠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아니, 그 사람을 사랑하라고요? 내가 지금 당하는 이 고통과 이 스트레스가 누구 때문에 다가왔는데요? 바로 그 사람 때문이에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그 사람을 용서해 주어라.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해 주신다. 그러므로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6:14, 3:13-14)고 하십니다.


“아니 하나님,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용서합니까? 눈곱만한 내 잘못을 주먹만큼 크게 확장해서 들춰내고 몰아붙인 그 사람을 어떻게 용서합니까? 나는 악을 선으로 갚았건만 그 사람은 계속해서 악으로 나를 못살게 구는데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용서합니까? 하나님, 세 번은 용서해 주었어요. 그러나 더 이상 나는 용서 못해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나는 그 사람을 용서 못해요.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자여, 그곳 골고다 언덕길을 말없이 십자가 지고 걸어가시는 주님을 바라보아라.

마지막 바람직한 대답은?“네, 주님, 알겠습니다. 저도 올라가겠습니다. 저도 걸어가겠습니다. 가 되겠지요?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도대체 어떤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 스트레스를 감출 필요는 조금도 없겠지요.  우리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허물을 들춰내는 분이 아니라 모든 나의 허물을 용서해주고 쌓여진 나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특히 기도는 우리의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릴 만한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자신이 죽어야만 했던 형용할 수 없는 스트레스 가운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목 놓아 부르짖어 하나님께 기도 드리시므로 담대히, 그리고 능히 그 죽음을 감당키 위한 힘을 얻으셨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시 61편에서도 다윗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우리가 지고 있는 수고하고 무거운 세상의 짐들을 오늘도 우리 주 예수께 내려 놓으시는 복된 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080317 안익선 목사/참고:김원효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