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의 치유를 위해 (딤후4:9~18 )
심령의 치유를 위해 (딤후4:9~18 )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14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15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서론)
어느 목사님이 고층 아파트 26층으로 이사를 하셨답니다. 그 목사님은 높은 층을 좋아해서 26층에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큰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층 아파트의 혜택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훌륭한 전망과 시원한 바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댁은 한 여름에도 창문을 열어놓지 못한답니다. 그 이유는 사모님 때문입니다. 그 사모님은 모든 창문을 다 닫고 자물쇠를 걸어야만 주무십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도둑이 든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아니! 26층에 어떻게 창문으로 도둑이 들어옵니까?”라고 하면, 사모님은 “옥상에서 로프를 타고 들어옵니다.”라고 하며 창문을 닫으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사모님에게 있었던 아픈 상처들 때문입니다. 사모님은 결혼하기 전까지, 도둑을 세 번이나 맞았다고 합니다. 특히 고 3때는 여름에 새벽까지 공부를 하는데, 책상 앞에 열어놓은 창문에 도둑이 들어오는 것을 직접 보고 놀란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26층 아파트에서도 창문을 열어놓지 못하는 병적인 반응을 보이게 한 것입니다. (트라우마?)
반면에 그 목사님은 달랐습니다. 목사님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도둑을 맞은 적이 없었답니다. 그 목사님의 가정은 항상 대 식구였습니다. 식구가 많을 때는 16명이 한 집에서 살았답니다. 도둑이 들어오다가도 많은 신발을 보면 도망갔을 것입니다. 그 덕분엔지 목사님은 도둑 한번 맞은 일도 없고, 단독주택에 살아도 창문을 다 열어놓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육체의 상처가 있듯이 마음의 상처도 있습니다. 그 상처 때문에 아픔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상처가 쉽게 치유되면 다행인데, 쉽게 치유가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완전치 못하고 세상은 험하기 때문에 상처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상처를 어떻게 처리해야만 하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우리 성도가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으려면 어찌해야 할까를 잠시 생각해 보려 합니다.
가)상처를 치유 받으려면 세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1. 사람은 누구든지 마음의 상처를 받기 마련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도 많은 마음의 상처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엄청난 상처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애굽에서 자기만 살자고 아내를 여동생이라 했었습니다. 졸지에 딴 남자에게 시집을 갈 뻔 했죠. 아마도 사라는 일평생 그 아픈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살해 당할 뻔 한 후, 노예로 팔려버린 충격적인 상처가 있었습니다.
야곱의 부인 레아는 시력이 좋지 못하고 못 생긴 얼굴 때문에 야곱에게 사랑 받지 못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식을 많이 낳는 것으로 보상받으려는 상처가 있었고 , 그 동생 라헬도 남편의 사랑은 받았으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열등의식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대머리라고 놀림 받아 상처가 있었지요?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던 작던 상처를 갖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상처를 평생 갖고 산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서 해결을 받고 치유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심신에 수없이 많은 상처를 받았었습니다.
고후11:23 이하를 보면, 그는 복음 때문에 옥에 여러 번 갇히기도 했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서른아홉 번씩 다섯 차례 매를 맞았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았고, 한번 돌로 맞았고, 세 번 파선을 당했습니다. 온갖 위험을 다 겪었고 헐벗고 굶주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4:10에 보면 바울은 사역을 하다가 동역 자들의 배신을 당하는 상처를 받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자기를 떠나는 배신을 겪을 때, 바울은 엄청난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마음의 상처는 주로 믿었던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다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들은 어려서 같이 자란 형들이었습니다.
야곱에게 가장 상처를 준 사람은 형 에서와 외삼촌 라반이었습니다. 바울은 늘 함께 하던 동역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아픕니다.
교회에서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잘 아는 사람, 믿었던 사람,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허물없이 대하다가 상처를 입히거나 입습니다.
어느 조사 기관에서 자녀들이 상처를 누구를 통하여 받는가를 조사했습니다. 결과를 보니 아버지에게서 40.7%, 어머니에게서 32.1% 라고 합니다. 상처 받는 내용은 ‘함부로 하는 말’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은근히 자식을 무시하는 말을 할 때 상처를 입게 됩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자존심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내 말 한마디가 칼보다 무섭고 총보다 무섭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마음의 상처에는 예상보다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히12:15 =
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상처로 인하여 생긴 쓴 뿌리가 나서 사람들을 괴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쓰디쓴 상처는 무서운 고통을 동반하는데 7 가지만 살펴봅니다.
1)상처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2)마음에 괴로움이 생깁니다. 3)마음이 증오와 분노, 복수와 원한으로 가득합니다.
4)세속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16절에 보면 ‘망령’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속된 더러운, 세속적’이라는 뜻입니다.
5)영적인 것을 소홀히 합니다. 6)에서처럼 진정한 축복을 놓치게 됩니다. 7)하나님께 버림받아 회개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내 안에 처리되지 못한 상처는 나 자신에게 더 큰 아픔과 또 다른 상처를 가져다 줍니다.
정태기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정 목사님이 젊을 때 두 가지 별명이 있었답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와 ‘재봉틀’이었답 니다. 너무 자신감이 없어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말도 못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이분이 미국에 유학 가서 공부하다가, 37세 되던 해에 영적 치유그룹에 들어가 자신의 상처에 대한 원인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상처를 받고 자랐습니다. 아버지보다 세 살 더 많은 친어머니가 계셨지만, 제법 돈이 있었던 아버지는 열여섯 살이나 어린 젊은 여자를 작은 부인으로 맞았답니다. 그래서 본 부인에게서 4남매를 낳고, 작은 부인에게서 5남매를 낳았습니다. 문제는 이런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다정할 리가 없습니다. 언제나 자식들에게 폭군처럼 군림합니다.
그래서 정 목사님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캄캄할 때까지 집밖에서 빙빙 돌았다고 합니다. 어머니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니까 일에만 파묻혀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어두운 문제 가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고 자라나다 보니까,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성격이 삐뚤어지게 되었답니다. 결국 그 상처의 분출구는 자기가 기르던 소와 자기 집 식모의 아들이었답니다. 우리 속담에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분풀이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상처로 인한 아픔이 해결되지 않으면 애꿎은 사람들이 상처의 희생물이 됩니다.
야곱도 엄청난 고통을 겪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인 죄로 평생 속임을 당하며 삽니다. 삼촌에게 속습니다. 자식들에게 속임을 당합니다. 요셉이 17살에게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릴 때 형들이 아버지를 감쪽같이 22년을 속입니다. 그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이 컸습니다.
3. 그러나 모든 상처는 치유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소식은 어떤 상처도 치유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처와 상처로 인한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면 치유자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해주십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치유를 받기 보다는 회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도시에서 목회를 하다가 늘 힘들게 하는 한 성도를 두들겨 패고는 시골교회로 목회지를 옮겼답니다. 그랬더니 그 시골에는 더 센 성도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또 상대를 두들겨 패려고 했는데, 상대가 태권도 5단이어서 두들겨 팰 수가 없었답니다. 결국 또 다른 교회로 그 사역지로 옮겼다 했습니다. 상처는 치유 받아야지 막 나가거나 회피해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나)그러면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치료자이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누가 나의 상처를 치료합니까? 출애굽기 15:26 을 보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 니라”고 하셨고, 말라기 4:2를 보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4:23을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만남으로 치유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좋은 사람을 만나도 치유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상담자, 좋은 목사를 만나는 것은 축복이겠지만, 우리 하나님께선 언제나 나를 치유하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그분을 찾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시편기자는 그것을 알았기에, 시편121편에서“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상처를 완벽하게 치료해주실 분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유를 잃고 상처를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나무라지 않으시고 사랑과 긍휼로 치유하셨습니다.
수가성의 여인을 치유하셨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치유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께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나가면, 자유와 쉼을 주시고 용서를 통해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상처를 주님께 넘겨드릴 줄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딤후 4장에 보면 자기를 괴롭히고 상처를 주었던 알렉산더에 대해 “주께서 갚으시리라”고 하며, 주님께 문제의 처리를 의뢰하였습니다. 그리고는 17절을 보면 ‘주님이 자기 곁에서 자신을 강건케 하셨다’고 말합니다. 또 18절에 보면 주님께서 자신을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속상한 것, 억울한 것, 아프고 괴로운 것 다 토해 버리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치유가 임할 것입니다.
2)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내가 상처를 받으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복수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해결책일까요? 용서입니다.
용서는 치유에 가장 기본입니다. 만약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 속에 있는 복수심이 자신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게 될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방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 내가 나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용서하는 것은 나를 상처 준 사람을 통해서 내게 들어오는 고통을 끊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심판과 정죄와 책망이 문제 해결책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세요. 수가성의 여인에게 한마디도 책망치 않습니다.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에게도 책망과 심판을 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그 엄청난 죄를 범함에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회개할 때 용서를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3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 베드로를 한마디도 책망치 않으셨습니다. 그냥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사랑을 기억해 내라, 사랑이 소망이요, 사랑이 미래이며, 사랑이 회복이며, 사랑이 능력이며, 사랑이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용서이며 문제해결의 지름길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참된 사도 베드로 되었습니다. 그 치유가 여러분에게도 이 시간 임하심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에게 고통과 상처를 준 사람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용서를 입술로 선포하고 그 아픔이 주님의 손으로 치유될 것을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했어요. 진리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3) 끝으로 상처를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든지 영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다면 큰 축복입니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종살이에 옥살이까지 말로다 할 수 없는 고통과 마음에 상처를 받았지만, 그 상처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라고 선언합니다.
내게 임한 고통과 상처도 하나님의 은혜의 일부였음을 발견해 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이 밤도 우리 성령 하나님의 치유하심의 역사가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102017 안익선 목사/참조: 최일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