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묘미, 역전 (빌립보 1:12-18)
믿음의 묘미, 역전 (빌립보 1:12-18)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2)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서론)
1. 사람들이 운동경기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역전의 묘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맛이 없는 경기는 별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사람들은 한국은 아마 본선에서 3전 전패를 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게 랭킹 2위의 독일을 2대 0으로 격파하면서 세계의 놀라움과 큰 흥미를 이끌어 내기도 했습니다.
2.
70년대 초, 한국의 동대문 운동장에서 이스라엘과 한국 간 국가대표 축구경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후반전 5분을 남기고 있을 때, 한국이 1:0으로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은 5분만에 차범근 선수가 연속 두 골을 넣어 이스라엘을 이긴 적이 있습니다. 차범근
선수는 국가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3. 70년대 후반엔 저도 흑백 티븨를 통해 보았지만, 홍수환 선수란 사람이 네 번을 상대편의
주먹에 맞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났는데, 잠시 후 카라스키야란 참으로 강한 챔피언을 K.O 시켜, 4전 5기의
신화를 만들었던 적도 있습니다.
4. 큰 홍수가 나면 거대한 아름드리 통나무라 할 지라도 뿌리째 쓰러져 강물에 휩쓸려 흘러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쬐그마한 피라미는 물결을 거슬러서 올라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죽어있는 성도들은 세상물결 속에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믿음이 살아있는 성도들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 나갑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는 기쁨을 주제로 한 바울 서신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가? 그리고 어떻게 기쁨을
되찾아 오는가?"라는 문제를 오늘 본문에서 배우도록 합니다.)
본론)
가)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들
1.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까? 사도 바울은 그 세가지가...
첫째는, 변덕스러운 힘든 우리의 환경들이라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나의
당한 일"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17절에서 "저들"이라고 표현된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고 하는 실존의 문제로서, 본문은 "죽는 것"
,즉 죽음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환경의 위기와 잘못된 인간관계, 그리고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 기쁨을 빼앗기기는 커녕, "도리어" 풍성한 삶과 넘치는 기쁨을 누렸다고 간증합니다. 때문에
본문에서 중요한 단어는 "도리어" 라는
단어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빌립보서를 가리켜
‘기쁨의 서신’이라고 했습니다. 4장으로
구성된 짧은 성경이지만, 그 가운데 기쁨이란 단어가 무려 19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 기쁨이란 주변환경이 평탄하고 편안하기 때문에 오는 기쁨이 아니었으며, 모든 사람이 그를 도와주고 인정해주기 때문에 오는 기쁨도 아니었습니다. 질병도 없고 고난도 없고 건강하기만 해서 오는 행복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즉 감옥에서 쓴 글입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우리에게 “너희도 이런 환경
가운데 기뻐할 수 있다”고 하며,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참된 기쁨의 근원을 발견해야 합니다.
나)환경을 뒤집었다
1.
첫째, 사도 바울은 환경 뒤집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12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나의 당한 일"이란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된 사건을 먼저 말합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자포 자기, 절망, 불평, 원망의 넋두리를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좌절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했습니다. "감옥이 나의 비전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풍랑도 온갖 장애물도 나의 믿음을 흔들어 놓지 못할 것이다. 환경이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사도 바울의 생의 목적이 복음전파였기 때문이요 또한 그의 삶의 주인이 여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2.
모든 환경과 사건을 평가하는
그의 삶의 기준은 ‘복음전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름진 음식을 먹느냐 못 먹느냐? 돈을 버느냐 못 버느냐? 내가
고생을 하느냐 대접을 받느냐? 소위 출세를 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따위는 도무지 안중에도 없었어요.
때문에 바울은 감옥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도 전도할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는 출세와 성공과 안일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 말했듯이, 그는 어떤 환경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3. 일본의 소설가 ‘오이겐자부로’라고 하는 사람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그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일찍이 문학계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문학 평론가로 혹은 작가로서 명성을 떨치던 어느 날, 내 삶에 큰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내 아이가 정박아로 태어난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에게 이런 아이가 태어났을까?'...... 이것 때문에 우리 부부는 괴로워하고,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고뇌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아이가
나의 문학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었습니다. 나는 이 아이를 통하여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고, 그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나는 이 아이를
통해서 새로운 소설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내 아들인 정박아 히로키는 나의 문학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내 글 속에 생명이 살아 꿈틀거리는 그 힘은 바로 내 아이 히로키로부터 온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남들이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그 환경 속에서도, 실패라고 생각하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도리어" 하나님의 새로운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사람을
뒤집었다
1. 우리의 행복을 위협하는
두 번째 요인은 사람이라 했습니다. 사실 환경의 위기보다 더 한층 어렵고 복잡한 것이 인간관계의 위기입니다. 꼬여버린 인간관계의 위기는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우리를
고독하고 우울하게 만듭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이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17절에 "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저들”은 한때는 바울을 따르고 돕는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바울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며 괴롭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전에는 복음을 전하는 동지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기하고 괴롭혔습니다. "저들"은 그래서 바울이 없는 사이에 자기들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한편으론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을 괴롭힐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18절에 바울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고 합니다.
"너희들은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고, 내게 괴로움을 더하는 길이라도 그 일을
했지만 ,나는 도리어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어떤
방법이나 어떤 동기로든 복음이 전파된다면 난 기쁘다." 라고 했어요.
바울은 모든 하나님의 일이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도 기뻐했습니다. 내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옹졸하고 왜소한 내 관점에서가 아닌, 예수의 시선을 가지고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성숙입니다.
3. 사람들에게 크게 두 가지 가치관 즉, 부정적인 가치관과 긍정적인 가치관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분은 어떤 일을 당해도 긍정적으로 보면서 행복을 찾습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분은 꼭 상황을 어둡게 보고 스스로 불행하게 됩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지기 위해 몇 가지 삶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가치관이 건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할 때, 그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또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이 많이 보여 칭찬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수도 칭찬을
많이 하면 친구로 변합니다.
4. 한번은 두 남녀가 펜팔로
사귄 후, 결국 만나서 결혼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나고 보니 남자가 애꾸눈 이예요. 여자가 화가 났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애꾸눈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화가 나는 게 아니다. 당신은
멀리서 나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한번도 당신은 당신이 애꾸눈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 없었단
말이냐?"고 ㅆ아 붙입니다. 그때 남자가 펄쩍 뛰면서 말합니다.
"무슨 얘기냐? 내가 첫 번째 편지에서 분명히 당신에게 고백했다." "아니 뭔 말이냐? 내가 그 편지를 안 읽었다는
얘기냐? 언제 고백했었냐?"며 막 화를 냈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느냐? 당신을 보는 순간 나는 한 눈에 반했다고 분명히 얘기했다."고
말했답니다. 결국 여성은 남자가 솔직했다?고 긍정적으로 믿고? 결혼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성공적인 자녀 교육의 비밀도 긍정적인 칭찬 속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소개할 때도
항상 좋게 소개하는 훈련을 하라!고 말합니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건강도 좋아집니다. 이런 삶은 긍적적이기도 하지만 신앙적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인간관계를 건강하게 세워갈 줄 아는 사람입니다. 비판자를 품어 친구로 만들고, 원수로 인하여 내 행복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라)죽음을 뒤집었다
1.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세 번째 요인은 인간 생명의 한계, 곧 죽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뒤집어 영생으로 바꾸어 살 수 있는 역전의 명수들입니다.
우리들에겐 돈을 가졌으나 그것은 영원하지 못하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높은 권세의 자리에
올랐으나 내려올 때가 반드시 있다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지금은 건강하나 병들 수 있다는 불안감, 지금은 젊었으나 반드시 늙는다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모두 죽음의 위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 그런데 바울에게는 이 죽음의 위기가 없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 죽음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고 살았습니다. 오늘 마지막 본문입니다. 20, 21절에서 "이제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합니다. 나는
살아도 유익하지만 죽음도 환영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담력입니까?
사람들은 종종 임종 시에 "나는 지금 죽을 수 없어. 살려줘. 무엇이든 내가 가진 것은 다 줄 테니....”라고 합니다. 사실
죽음처럼 무섭고 독한 고통도 없습니다.
그러나 참 성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잠시 후...하늘나라에서
우리 기쁘게 다시 만납시다. 전 바빠서 먼저 갑니다.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저 때문에 슬퍼하지 마세요. 저는 기쁘게 살다
갑니다."라며, 오히려 살아있는 사람을 위로합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모습입니까?
여러분은 이런 죽음의 멋진 역전의 명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좇아가며 살면 됩니다. 제자답게 살면 됩니다. 믿음으로 살면 되는 거예요. 우리 예수님은 죽음을 뒤집어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유한한 우리의 인생의 한계를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이 힘이 옵니다. 예수 안에 부활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면 아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3. "즁꼬 고맙다"라는 ‘야마모또 야에꼬’의 작은 책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20여 년 전에 죽은 즁꼬라는 여인의
이야기 이지요. 저자는 즁꼬의 어머니입니다. 즁꼬는 난산으로
제왕절개 수술을 하여 이 땅에 태어났고, 그 때 상처로 어머니는 죽은 아이를 계속 낳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즁꼬의 동생을 보지 못하게 되자 어머니는 즁꼬에게 무서운 애착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즁꼬는 대학시절 멋진 남자 노부유끼를 만나 결혼을 합니다만, 첫
아이를 가진 7개월 만에 남편은 방광암, 즁꼬는 위장암으로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가족들은 절망감에 목을 놓아 울었고 즁꼬의 어머니는 몽유병 환자처럼 거리를 방황하기도
했습니다.
병상에서 즁꼬는 예수를 영접했고 남편은 물론 양가족이 모두 에수를 영접합니다. 이때부터
이들의 기도는 처절하기까지 했고 금식, 철야, 절규, 통곡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즁꼬와 남편은 서로 번갈아 가며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자기 몸을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서로를 간호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병상에 누워
애절한 사랑을 주고 받습니다. 처절하기까지 한 기도를 나눕니다. 읽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뭉클하게 만드는 편지를 주고 받습니다. 통증으로 새우등처럼 꼬부라져 몸부림하면서도 "착한 아내를 살려주세요" 기도합니다. 아내도 핏덩이를 쏟아가면서 "하나님 남편 좀 살려 주세요" 애원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6개월 간격을 두고, 친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남겨놓은 채 천국으로
함께 떠나갑니다.
정말 순수하게 살다간 그들의 기도 중에 이러한 마지막 내용이 나옵니다. "내겐
예수님이 전부입니다. 이 땅에 머무는 것이나 천국에 가는 것이나 그건 전적으로 하나님 당신의 뜻입니다. 주 예수여, 지금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신뢰합니다. 하나님 나는 세상의 모든 의료를 기대할
수 없어 당신 앞에 돌아갑니다.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두
사람은 가족과 성도들의 찬송 소리를 들으며 마지막 구절을 부를 때에... 그 찬송을 입에 머금은 채
가족을 위로하고 하나님 앞으로 갔습니다.
결론)
환경이 여러분들의 기쁨을 빼앗아 갔습니까? 어떤 사람이 여러분의 행복을 빼앗아가고 있습니까? 죽음이 여러분의 기쁨을 위협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는 그 모든 것들을 뒤집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의 묘미입니다.
주의 능력과 힘으로 역전의 승리를 이루십시오. 기도를 회복하고, 믿음을 회복하십시오.내가 연약할 때 그를 의지하면 하나님은 도리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강하게 역사해 주시며, 기적을 보게 하십니다. 믿음 안에서 역전의 묘미를 체험하며 살아 가십시다.
할렐루야!
070318 안익선 목사/ 참고:류영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