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직가에서 생긴 일 (행 9:10~19)

호걸영웅 2018. 9. 24. 15:54

Straight street of Damascus, Syria

 

 

 

 

 

 

 

 

 

 

 

 

 

 

 

 

 

 

 

직가에서 생긴 일 ( 9:10~19)

 

Extra Form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어떤 사본에, 환상 중에 보았느니라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 또는 침례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서론)

1. 미래의 세상의 모습은? 우리가 다시 우리의 다음 세대의 지도자(리더십) 어떻게 길러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 선교의 개척자인  ‘허드슨 테일러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결국은 열두 제자,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고 세우는 일로 시작하셨습니다. 

한국 말에도 “인사는 만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없이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민주주의를 잘 유지해 나가는 이유도 결국 리더십에 있었습니다. 물론 군사정권의 리더십, 이기적인 리더십들도 있었지만, 결국은 기독교적 이며 민주적인 리더십이 승리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들을 위해 참으로 희생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극성맞기 조차한 치맛바람(미국에선 soccer mom보다 더 적극적인...?)이란 말도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경우는 기독교적 리더십이 세계적 강대국을 만드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음을 누구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을 보면, 다메섹의 직가라는 동네에서 매우 흥미롭고 놀라운 사건이 하나 일어났었는데... 곧 갑자기 앞을 못 보게 된 사울이란 청년이 눈을 뜬 이야기입니다. 여기엔 하나님의 놀라운 리더십에 대한 섭리가 숨어 있습니다.
좀더 설명하자면,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로  회개하고 있었던 한 젊은이 사울을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축복하고 기도하여,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왜 누군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거나 세워져야 하는가에 대해 좀더 생각을 해 보도록 합니다.)

 
본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세워지는 것은 우선 하나님의 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앞부분에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울이 이미 다메섹(다마스커스)으로 가는 길목에서 엄청나게 환한 빛을 보며 예수의 음성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spot light?)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예수쟁이들을 핍박하려고 기세가 등등하여 오늘날의 시리아의 다메섹으로 도망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려고 동료들과 함께 가던 그 중간에 하필...오직 사울에게만이 그 큰 빛을 보였을까요? 그것이 하나님만의 초자연적이고 놀라운 역사하심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너무나 놀라 외쳤습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그때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고 했어요.

오늘 본문 10~ 11절에 보면, 눈이  사울 (훗날 바울:겸손한 자)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이끌려 가서 기도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회개하며 하나님의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시고자, 하나님은 ‘선지자 아나니아를 보내십니다. 10절입니다.“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고 하십니다. 다소는 터키의 한 도시 이름으로 사울이 태어난 곳입니다.

'직가’란 ‘곧은 길’이란 뜻인데,  길은 본래 바울이 있던 당시 다메섹엔 동서를 가로지르는 1,600m 곧은 길이었고, 너비만도 15m였는데, 지금은 복잡한 시장이 되어있습니다.  지금도  시장 내에 남아있는  개의 돌기둥과 성문의 잔해로 미루어 과거의 아름다운 길을 상상할  있다고 합니다.  길의 끝머리 골목길에는 유다의 집터를 개조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아나니아 기념교회(1973년에 세운 교회)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인도로 아나니아와 바울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예로부터 사람과의 만남을 ‘신적 만남’(Divine encounter)으로 간주하곤 했습니다. 우린 우연이란 말을 많이 쓰지만 나중에 알고 나면 필연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내가 만나는  사람이 하나님의 주선으로 만난 것이라면 얼마나 의미 있는 만남이겠습니까?  이런 우리의 만남은 시대를 바꾸는 리더십의 출현을 예고하는 만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만남을 늘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
 아나니아는 인간적 편견을 기도로 극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 편에서 보자면, 애초에  만남은 기뻐할만한 그런 만남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교회 기록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70제자 중의  사람으로, 후일 다메섹 교회의  감독이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 교회의 지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복음전파의 적이고 교회를 핍박하는 원수였기 때문에, 그와 바울의 만남은 원수와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예수님께 “ 주여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편견을 버리도록 하십니다.
*15
절을
 보면“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사람은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니라”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는 결국 원수 바울이 거하는 집으로 갑니다.  아나니아가 이런 편견을   있었던 것은 또한 그가 기도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고로 시리아 성지 순례 여정 중, 다메섹의 아나니아 기념교회를 방문할 때, 가장 감동적인 것은, 마당에 세워진 바울이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는 모습의 동상이라고 합니다.
, 이제 본문
 17절입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라 했습니다.  그들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까? 아나니아의 안수  그의 축복으로 세상을 바꿀 세계 복음화의 리더가 태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1800
년대 중엽, 미국 보스톤의  교회에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all)이란 이름을 가진 주일 학교 교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자기 주일 학교 반에  소년이 등록을 했습니다. 그는 교회 학교에 삼촌의 권유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선생은 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자 했으나 그는 성경도 없었고 글자를 모르는 문맹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구두방에서 일하는 소년이었습니다. 킴볼 선생은 그에게 성경을 사주고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자주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했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전도자로서 백만 여명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디가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킴볼은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이들을 축복할 준비만 되어있다면 말입니다.

또 동일한
 원리로 우리가 바울은   없을지 모르지만, 바울을 축복하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하던 아나니아는   있지 않겠습니까? 그가 바울의 머리에 손을 얹었을 , 그는 앞을 보지 못하고 실명한 장애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나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인도에 민감했습니다. 그의 마음속 깊은 편견을 뛰어 넘어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했습니다.  순간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18
절입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가  일이 무엇입니까? 사울이 새로운 세상을 보도록 도운 것입니다. 사울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사울은 눈을 다시 뜨고,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겸손하고 위대한 자 바울이 되었습니다. 

 

결론)

오늘도 우리 기독교의 역사는 우리 모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입니다. 이 역사를 변화시키고 이끌어 가는 데에는 너와 내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순종하느냐, 얼마나 편견을 버리느냐, 얼마나 하나님 음성에 귀 기울이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 사울이 바울 되게 하는 (예수님 앞에서 겸손한 자 되게 하는) 이 놀라운 사역에 쉬임없이 모두가 헌신하며 동참해야 되지 않을까요? 이 일은 바로 여러분의 참된 기도에서 시작합니다. 함께 더욱 동참하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091118 안익선 목사 / 참고:이동원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