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삼일절 정신(요8:31~36)
기독교와 삼일절 정신(요8:31~36)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서론)
요즘 최근 뉴스엔 뉴욕주와 뉴저지주가 3월 1일을 ‘유관순의 날’이라고 정하였다는 소식을 보았습니다. 생소한 미국 땅에서 왠 생뚱 맞은 이야기냐? 여기가 한국이냐?라는 의문을 갖을 만큼 있기 어려운 이야깁니다. 미국 사람들이 왜 한국의 유관순을 기념하느냐 는 것이지요. 그런데 미국인들도 유관순을 알고 3.1 독립 만세의 정신을 높이 산다는 점입니다. 그 숭고한 민족 정신, 그 놀라운 기독교 정신, 그 아름다운 인류 행복을 추구하는 정신만큼은 칭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 한국에서 1919년 3월 1 일에 독립만세 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습니다. 3.1독립만세 운동과 8.15해방을 비교해 볼 때, 3.1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8.15는 해방이 되었으니 8.15가 더 가치가 있다고 판단할지 모르나 3.1운 동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3.1정신이라는 말은 자주 들었으나 8.15정신이라
는 말은 없는 것만 보아도, 3.1정신이 우리 민족의식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입 니다.
한국은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았지만, 이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마침내 패망한
결과, 한국이 거저 해방된 것이지, 독립운동이나 전쟁을 통하여
쟁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반면에 3.1운동은 비록
탄압에 실패로 돌아갔으나 참으로 고귀한 피를 흘리고, 무력 앞에 맨주먹으로 총칼 앞에 항쟁한, 참으로 존경 받아 마땅한 역사적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3.1운동과 그 정신이 매우 기독교적이요 성경적이라는 점을 아시는 분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3.1운동을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 3.1 정신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본론)
가) 출애굽정신
1. 기독교를 한마디로 표현할 때, 출애굽(Free from Egypt) 사상이라고 합니다. 출애굽을 ‘엑소더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엑스(~로부터)와 호도스(길)의 합성어이므로 '길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애굽의 노예생활의 길, 혹은 사슬을 벗어나서 자유를 쟁취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합니다.
또 성경은 그 밖에도 새 술을 새 부대에 넣으라고 한다든지, 낡은 시대가 지나가고 새 시대가 도래한다고 한다든지, 묵시록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완성의 종말에 이루어진다고 하는 등등이 다 출애굽사상과 직결되고
있는 ‘탈출의 정신, 혹은 탈출의 문화’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출애굽 사상에 뿌리박은 기독교인들의 열정은 곧 3.1 운동으로 연결되어 뜻있는
분들이 자기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던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 한 예로
3.1운동의 민족 대표자 33명중의 한 분이 셨던 길선주 목사는 민족대표 명단에 이름을
쓰라고 자기 도장을 선뜻 내어 맡기고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다고 합니다. 십중팔구 죽는 일에 선뜻 도장을
내어주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3.1운동에
이처럼 생명을 내던진 사람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3.1운동은 우리 나라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민족의식과 신앙의식이
결부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3.1운동은 출애굽정신의
유일한 쾌거요, 영원한 민족의 명예입니다.
2. 좀더 구체적으로 그 증거를 말한다면, YMCA를 거점으로 한 한국기독청년의 독립운동
사를 살펴보면, 쉽게 기독청년과 독립운동의 깊은 연관관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이런 거사를 꿈꾸기 전에, 이미 한국기독청년들은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계획하고 있었다 합니다.
1919년 1월 26일, 3.1 운동 한 달여 전에 이미,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보성전문학 교의 강기덕, 전수학교의 윤자영, 그 외 이용설, 주종의, 김형기
등 8명이 모여 YMCA 간사였던 박희도의 주재로 회의를
해 독립선언서는 2월 20일까지 기초를 만들고 조직을 하며, 선교사를 통하여 조선독립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알게 된 기독교의 이승훈 장로가 천도교의 손병희와 불교의 한용운 등을 만나, 전 민족적 거사를
재합의하여 3.1 절에 이것을 터트리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나) 남은 자 정신
독립선언서 공약 제 3장의
두 번째 나오는 내용에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
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 남은 자(remnant) 사상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살려는 소수의 무리 (spiritually minded minority)를
남은 자(remnant)라고 합니다. 이 말이 곧 이사야서의
중심사상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되어 머나먼 타국에 끌려와 차례대로 죽어가도... 최후의 남은 자가 돌아와서 이스라엘을 재건하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은 믿음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메시야가 태어나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이라는 이스라엘 신앙의 대명사 중 하나가 된 단어가 바로 ‘remnant’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이러한
창조적인 소수(creative minority)가 없는 나라는 망하고 마는 법입니다.
그럼 3.1운동에 있어서 이 창조적인 소수가 과연 누구였습니까?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요 연합한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마지막 보루요, 전위대 역할을 감당한 자가
바로 기독교인들입니니다. 일본 경찰은 언론을 말살하고, 각급
사회단체를 폐쇄하고, 교육기관을 탄압하여 필봉은 꺾고, 입은
봉하며, 고관들은 일본의 작위와 재산을 부여받아 부귀영화를 누리며 매국노가 되어 버리던 그 시대에 최후의
조직이요, 마지막 보루였던 기독교를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 것이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독재와 군군주의가 극성을 부리면 언론이 봉쇄되고, 대학교수를 벙어리로 만들고, 학교를 통재하여 사상의 자유를 박탈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마저
문을 닫으면 그 사회는 최후 거점을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독일을 다스릴 때 교회만은 그 입을 봉할 수가 없었던 것처럼, 3.1운동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민족의식의 선봉대 역할을 감당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3. 부활정신
독립선언서 끝부분에는 부활정신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습니다. 언문은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말이 많아 한글 번역본을 보면 이렇습니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전진하나니,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뛰쳐나와 삼라만상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룩하게 되누나.” 라고 했습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문자 그대로 부활정신이었습니다.
1910년 일본 제국주의는 이 땅을 송두리째 삼키면서 착취의 손길을 폈습니다. 마치 예수의
무덤을 돌로 막고 로마 군인으로 하여금 불의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철야 감시하였듯, 일본제국주의는 선교역사 30여
년 밖에 안 된 한국 땅의 기독교를 완전 매장하고 인봉을 하고 철야감시 하듯 했지만, 인간적인 수단
방법으로는 이 진리의 자유를 완전히 저지하거나 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의가 불의 앞에 영원히 말살될
수가 없으며, 사랑이 권력으로 유전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태양이 솟으면 새벽의 어두움이 사라지고, 봄이 오면 꽃은 피어나기 마련입니다. 불의와 불법으로 삶의 도구를
삼는 인간들이 3월 1일 정오에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서슬이 시퍼런 제국주의의 칼날을 향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며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던 선열들의 고귀한 피는 그들이 이러한 부활정신이 있었기에 그렇게 강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 저편의 부활의 세계를 분명히 보았기에 그렇게 죽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을 초월한
사람들이 아니고는 그렇게 용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부활정신은 죽음에서의 해방을 뜻합니다.
죽음이라는 의미는
우리의 신체 현상 외에도 흔히 쓰이는 표현입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묻어 두고 있는 것도 일종의 죽음이요, 민족의식이 잠자고 있는 것도 분명히 죽음입니다.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는 것도 죽음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부활이라는 믿음을 상실하고 있는 것도 죽음입니다.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도 죽음입니다.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정치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죽음입니다.
3.1운동의 부활정신은 이러한 민족적 죽음에서 깨어나고자 하는 정신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이 부활정신이 일본의 악랄한 통치 제도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유관순의 일대기를 보면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유관순의 독립정신을 꺽고자 밤낮 고문을 하고 손톱을 뽑고 불로 지지고 때리고 물고문을 하고 성폭행을 하고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유관순은 주기까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송곳이 가득히 박힌 널판지 위를 걸러 갔습니다. 병으로 옥사 하고 맙니다.
수원에서 서쪽으로 좀 가다 보면 ‘제암리’라는 동네가 나옵니다. 이 동네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만세운동 후, 한달 보름 된 후, 일본군들이 제암리 교회에 그 동네 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들 28여명을 거기다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집중사격을 하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살려달라고 뛰쳐 나오는 아이들을 총검과 칼로 찔러 죽이고 말았습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몰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근의 채암리(采岩里)에 가서 민가를 방화, 31호를 불태우고 39명을 학살했다. 일제의 이 같은 만행에 분노한 선교사 스코필드는 현장으로 달려가 그 참혹한 광경을 그대로 사진에 담아 <수원에서의 일본군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 미국으로 보내 세계가 분노하는 뉴스를 전했다 했습니다. 이런 악행은 빙산의 일각이라 하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민족이 있었기에 우리가 있습니다. 나라가 있기에 우리가 자부심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조국이 있어야 우리가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나라는 무엇으로 지킵니까? 총칼입니까?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에 대한 소망입니다. 고로 우리는 교회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온 힘을 다하여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3.1운동의 세 가지 기본정신을 살려, 보다 높은 여호와의 신앙으로 나라의 기초를 다지고,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를 속박하는 어떤 비성경적이고 비신앙적은 악한 체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출애굽정신을 살려야 합니다.
또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성도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서, 나의 책임을 다하는 남은 자의 정신과 부활의 정신을 가지고,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022619 안익선 목사/ 참고: 설삼용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