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인내에 대한 교훈 (약5:7-11)

호걸영웅 2025. 2. 23. 05:21
       인내에 대한 교훈 (5:7-11)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 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와 늦은 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서론)

1. 리더스 다이제스트(1989 6월호)에는 수백 년 동안 꿈꾸어 오던 흑색 튤립이 네덜란드의 한 육종가의 노력에 의해 마침내 탄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튤립 육종 전문가인 헤르트 하헤만은 어려서부터 흑색 튤립을 만들어 내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는 23세 되던 해에 튤립 품종개량 연합회의 회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품종개량에 착수합니다. 1979 5월에 시작하여 7년만인 1986 2월에, 마침내 그가 꿈꾸던 흑색 튤립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화초세계에 있어서 첫 달 착륙과 같은 사건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흑색 튤립이 상품화되려면 향후 20년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먼저 20kg의 구근을 만드는데 14년이 걸리고 그 후 6년을 더 재배해야 시장에 내 놓을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튤립의 새로운 한 품종이 개발되어 시장에 나오기까지는 무려 27년이나 걸린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정말로 오랜 기다림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운이 좋아야만 된다고 했습니다.

2.
영국에도 금잔디에 대한 개발 경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영국의 아름다운 정원의 금잔디를 보고 감탄한 어떤 외국 손님이 그 비결을 물었답니다. 그러자 금잔디의 주인은 태연히 대답하기를 "이건 11대나 걸려 다듬어진 거랍니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엔  끈질긴 인내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 아주 많습니다. (오늘은 성령의 열매의 하나인 인내에 대해 살펴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본론)
) 인내에 대한 의미

헬라어 원어로 된 신약성경에는 '인내'로 번역될 수 있는 두 개의 낱말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의 낱말은 고난에 직면하여 낙심치 않고 굳건하게 잘 참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욥의 인내를 가리키는데 사용된 낱말, 휘포모네입니다(5:11). 욥은 여러 가지 환난을 만났으나 끝까지 그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하나의 낱말(마크로두미아)는 갈라디아서 나온 성령의 네 번째 열매에 바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고, 오늘 야고보서 본문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오랜 시간을 견딘다는 뜻으로, 농부가 추수 때를 기다리는 것과 같이 조급해 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으며 정해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인내가 바로 바로 두 번째의미의 인내인 마크로두미아입니다.

'
마크로두미아'라는 단어는 원래 두 단어가 합성된 것입니다. '마크로스' '두모스'가 합친 낱말로서 '마크로스'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형용사 또는 부사이고 '두모스' '진노, 분노'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노를 억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말이 하나님의 인내하심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
103:8)="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악에 대하여 진노하시지만, 그러나 그 진노를 즉각 나타내셔서 그 인간들을 심판하시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정한 시간까지 꾸욱 참고 오래 오래 기다리시며 그분의 진노를 억제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당신의 계획을 위해서 결코 서둘지 않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까지 아브라함 때부터 2천년의 시간을 참으며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지 또 2천년이 지나가도록 추수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가라지 비유에서 종들은 서둘러 밭에 돋아난 가라지를 뽑아 버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종들에게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에게 회개하고 돌아올 시간을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오래 참음이 성령의 열매인 까닭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오래 참아야 할까요?

) 오래 인내해야 할 것들
1)
첫째로 영적 성장에 있어서 오래 참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3:18)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자라고 있는 것을 결코 쉽게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몸이 자랐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자라나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믿음 생활을 하다보면 어느날 영적으로 한 단계씩 성장하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날마다 부지런히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 놓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때로 신앙의 성장을 서두를 때가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이 곧 신앙 성장의 척도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방언의 은사라도 받으면 마치 이제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 성장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꾸준히 세끼 밥 먹고 활동하면 몸이 자라는 것처럼, 쉬지 않고 꾸준히 영적 성장을 위해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며 실찬하고 형제 자매가 서로 사랑하고 헌신하는 과정에서 믿음이 성장하는 것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둘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는 바울의 권면대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최선을 다할 기회를 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오래 참음은 특별히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에 있어서 필요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4:19)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한두 번 예수 믿으라고 말 한 것만으로 그가 금방 교회에 나와 주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고집이 세서 예수 믿기 틀린 사람이야 라고 단정해 버리기 쉽습니다.

 

서 아프리카에서는 선교사가 파송되고 나서, 최초의 개종자가 나오기까지 14년이 흘렀다고 합니다. 동아프리카에서는 10년이 걸렸고, 뉴질랜드에서 최초의 침례교인이 나오기까지에는 9년이 걸렸으며, 타이티에서는 16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인도에서 윌리암 캐리가 힌두교인을 최초로 기독교도로 개종시켜 침례 받게 하기까지 7년이 필요하였습니다. 선교에 있어서 씨를 뿌릴 때와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 사이에는 오랜 시간의 간격이 있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좋은 추수를 원한다면 그 때가 올 때까지 인내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오늘 한국의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한국은 민주주의에 자유 민주주의를 접목시키는 일에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적 민주주의도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적 민주주의는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고로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국에 미래가 있음 깨달아야 합니다.


)든든한 기초를 다지기 위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큰 세번째로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오래 참아야 할 이유는 믿음의 기초를 단단하게 다지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우리의 믿음의 기초를 다지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자녀들에게도 특별히 고난을 통해서 그 기초를 단단히 다지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오래 기다리시게 한 것도 그의 신앙을 다지시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신앙은 기다림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내란 공간적 개념이 아니고 시간적 개념의 단어입니다.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은 신앙을 가져선 안됩니다. 서두르는 사람은 신앙을 갖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신앙은 미래적 소망과 관계된 것이요, 소망은 기다리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젊어서 부르시지 아니하고 다 늙어서 도저히 자녀를 생산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때에 부르셨고 그리고 25년을 더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도록 명령하시므로 또 한번 아브라함의 신앙의 인내를 다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 바탕을 다지시기 위해서 오래 기다리십니다.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초 작업을 든든히 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반석과 같이 단단하게 기초가 이루어질 때까지 다지고 다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신앙의 바탕을 다지는 과정을 생략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바탕이 확실하면 그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이 지루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 작업을 무시하고 서둘러 눈에 보이는 집 만을 짓고 싶어하는 성도가 되기 쉽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갖추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까닭은 바로 이런 기초가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기초 작업은 확실히 하지 않고 서둘러 집사 권사 장로가 될 때, 그것은 본인에게나 교회에나 덕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초 작업을 생략한 사람은 먼저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이나 그 집은 폭풍이 불어 칠 때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기초를 잘 다진 사람은 시간이 많이 걸려서 집을 짓게 될 것이나, 폭풍이 불고 홍수가 나도   그 집은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래 참으면서 우리 신앙의 기초를 확실하게 만들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오래 참음의 열매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습니다.


몇 번의 은혜로운 설교를 들었거나 성경을 한두 번 다 읽었거나 부흥회를 몇 번 다녀왔다고 우리 신앙이 완전해 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화끈한 성령체험을 몇 번 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성령을 여러 번 체험하고도 아라비아에 삼년을 지낸 후 사도의 일을 하였습니다. 한 두번의 어떤 영적인 경험을 통해서 신앙의 거인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성장을 했다는 사실은 맞지만 다 된 것도 아니요 다 이룬 것도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한 단계씩 올라가라고 권유하고 계십니다.

(배드로후서1:5-7)="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고 했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한단계씩 계속 전진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십시오.

결론)
그렇습니다.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대부분이 특별히 먹는 보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먹는 세끼 밥과 운동과 수면 등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적 훈련과 신앙생활과 헌신에 동참하는 일들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이제 우리는 길이 참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내 안에서 완성해 가야 하겠습니다. 오래 참음, 곧 인내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며 내 개인의 영적 성장이나 교회의 성장이나 이 사회의 민주주주의적 형성을 위해 길이 참음으로 힘쓰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마침내 우리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과실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길이 참음으로써 풍성한 추수의 즐거움을 맛보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존귀한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할렐루야!

 

020424 안익선 목사/참조: 유경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