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장 강해( 6번째 표적: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심)
요한복음 9장 강해( 6번째 표적: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심)
(찬송 213, 219 장)
서론)
요9장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6번째 표적입니다. 9장에서는 예수께서 길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소경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타락한 구약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로 오신 것을 나타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치유하시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병자를 치유하시는 능력을 베풀어 주실 수 있으십니 다.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도 소경되었던 자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받도록 은헤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의에 빠졌던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들이 죄 가운데 있다는 것만 선언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우리 자신의 알량한 의를 보면서 자만하지 않기 를 바랍니다.
본론)
가) 소경을 치유하심과 사람들의 반응 (1-23절)
1) 하나님의 영광을 나탸내기 위해 소경을 치유하심 (1-7절)
1절에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났습니다. 2절= 제자들은 이 사람의 소경됨이 누구의 죄인가 하고 논쟁하기 시작합니다.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답은 분명합니다. 3절에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물론 예수께서는 그 부모나 자녀가 죄인이라는 것을 부인하시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질병이 그 사람의 구체적인 죄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에 대한 관점을 제공해줍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 속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특별히 아주 깊은 장애에 부딪힙니다. 그때 우리는 이것이 누구의 죄인가 따질 순 있지만 쓸 데 없는 따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문제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해결책을 가지고 오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문제의 상황에서 해결책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과연 어떤 문제 상황 속에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기대하셔야 합니다.
6절에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진흙으로 침을 진흙에 뱉어서 그걸 이겨서 이 소경의 눈에 발라주십니다. 그리고 실로암(보내심을 받다)에 가서 눈을 씻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명령에 복종했고, 마침내 치유되었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침(능력과 은혜)으로 치료했습니다. 6절에서 예수님은 침을 진흙에 뱉어서 소경의 눈에 발랐습니다.
상당히 상징적인 일입니다. 발랐다(크리오)는 단어는 기름 붓다(크리오)에서 왔습니다.
그리스도는(크리스토스) 기름부음 받았다는 뜻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침으로 기름을 붓듯이 이 소경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질병을 치유하시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셨 습니다.
2) 사람들의 반응 (8-12절)
사람들(유대인)은 이 눈뜬 자가 그 소경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치유하셨다는 것을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 있는지 물었습니 다. 눈이 뜨인 그 사람은 자신은 그것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나은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3) 소경과 바리새인의 비교: 자신을 안식일에 고친 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라고 고백하여 출교 당함
ㄱ) 바리새인이 소경에게 심문과 소명의 고백, “그 분은 선지자” (13-17절)
13절에 이웃 사람들은 그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에게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안식일을 지킬 때에 많은 규칙들을 만들었습 니다. 안식일에 이런 저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규칙들을 엄청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병을 치료해서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문제로 삼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토론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긴 문제에 대한 논란입니다. 16절에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합니다. 즉 예수 는 하나님께로 온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며 상당히 다른 의견을 주장해 말합니다.
그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느냐?” 소경이 대답합니다. “나는 그 분을 선지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바리새인처럼 성경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정신을 따라 예수님은 ‘선지자’라고 추측해 고백합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치유 받았으면 축하하고 하나님이 주신 해방의 날을 기뻐해야 합니다만 오히려 그것을 문제로 삼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형식에 얽매인 율법주의가 없어야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복음은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남을 정죄하는 이런 율법주의적 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복음으로 인해서 해방과 행복이 있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ㄴ) 소경이었던 사람의 부모의 심문과 고백: “나는 모른다” (18-23절)
바리새인들은 또 그의 부모를 불러서 이 소경이 어떻게 보게 되었는가를 물었습니다. 부모는 자기 아들이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사실만 확인해 줍니다.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대해서는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왜냐하면 22절에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는 자가 있으면 출교하기로 결정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21,22절). 이 부모는 자기가 당할 수 있는 어려움을 두려워했습니다.
나) 소경이었던 자의 재심문과 고백, 그리고 출교 당함 (24-34절)
26절에서… 다시 바리새인들은 전에 소경되었던 자를 불러서 묻습니다. “우리는 그대를 낫게 한 사람이 죄인이라 생각한다.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낫게 되었는가?” 물었습니다.
27절에 그 사람이 말합니다. “제가 낫게 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고 싶습니까? 그럼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또 30-3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낫게 한 사람이 죄인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나를 낫게 했으니까 이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의 말(요청, 기도)을 들으시겠습니까?” 하면서 정직하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분노하며 말합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가르치러 하시오?” 그를 ‘쫓아내어 보내니라.’(34절) 며 맹인되었던 자를 출교하고 말았습니다.
이 낫게 된 소경의 정직성을 보십시오. 그렇게 고백하면 자기가 손해를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낫게 한 그분에 대해서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정당하게 결론을 내리고 증거하 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모독하고 있더라도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분명히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큰 위기에 부딪혔습니다. 전에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고 먹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몸은 나았지만 출교 당하였습니다. 그 사회로부터 추방되었기 때문에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먹고 살아야 될지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일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정직하게 고백함으로써 손해를 보고 위기가 오기도 합니다. 이것을 두려워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자녀 된 우리를 어떤 형편에서든 돌보십니다.
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 소경은 ‘인자와 주님’으로 고백, 바리새인은 정죄당함 (35-41절)
1) 예수님이 소경을 다시 찾아 오심, 소경은 ‘인자와 주님’으로 고백하며 믿음 (35-38)
35절에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출교조치 했다)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주님은 소경이었던 사람을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소경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절에 “주여 당신이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기 원합니다.”
여기서 ‘주여’는 보통 존경하는 사람을 높여 부르는 칭호입니다. 37절, 예수께서 대답하십 니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네가 말하는 자가 그로다.” 예수께서 당신이 인자, 곧 그리스도라는 것을 나타내 주셔십니다.
38절에서 그 사람이 말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합니다.
여기서 ‘주여’는 ‘여호와’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여호와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 절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고백하는 표시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죄용서의 은혜를 받았습니다(41절)
그는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좀 더 분명히 하게 되었습니다. ‘선지자’à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à ‘인자와 주님’으로 고백이 발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양심적으로 생각하면서 상당한 손해를 보면서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 순박한 자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환히 비춰 주셨습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와 함께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물질적인 것이나 여러가지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기보다는, 그리 스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와 만나고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2) 교만한 바리새인을 정죄하심 (39-41절)
39절에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 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고요.
소경을 치유하신 것에 대한 진정한 숨은 진리의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40절에 바리새인들이 옆에 있다가 “우리가 소경인가?” 라고 자문합니다.
41절에 예수님께서 “그렇다. 너희가 소경 되었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시며 그들이 영적인 소경임을 지적해 주십니다.
자기는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영적 소경됨 가운데 그대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약함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은 소경은 육체의 어둠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죄라는 영적 어두움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결론)
본문의 소경은 예수를 그냥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알았다가 결국 메시아로, 하나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과거엔 영적 소경이었습니다. 영의 눈을 뜨려면 예수님을 의지해야 됩니다.
또한 매일매일 우리를 덮으려는 죄를 깨닫고 고백하며 그리스도께 나아갑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과정(혹은 섬기는 과정)에서 위기가 있고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섬기고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 더 큰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041625 안익선 목사 / 참조:다음 카페
마치는 찬송; 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