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해인가, 사해인가?(마태복음 4:18-25)
18. |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
19. |
20. |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
21. |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
22. |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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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
24. |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
25. |
서론)
1. 이스라엘을 여행하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개의 큰 호수를 볼 수 있습니다. 호수가 너무도 커서 ‘바다’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곧 갈릴리 해와 사해입니다. 두 호수는 하나의 강, 곧 요단강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 갈릴리와 사해는 다 같이 북부의 해발 2,850m의 헬몬산에서부터 (북한의 백두산은 2,744m) 주로 내려오는 요단 강물이 모여된 것이지만, 갈릴리 바다는 많은 고기들이 살고 주변에 푸른 초원인데 반해, 사해는 생물이 전혀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갈릴리해는 생명의 바다라면 사해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생명의 바다라고 하는 갈릴리나 죽음의 바다라는 사해나 다 같이 헬몬산으로부터 내리는 물을 받아들입니다. 둘 다 같이 헬몬산에 덮힌 눈이 녹은 물을 대부분 받아 들이지만, 갈릴리 바다는 고기들을 비롯해서 주변에는 동식물들이 살고, 사해는 어떤 물고기나 식물이 전혀 살 수 없는 바다입니다. 어떻게 같은 물을 받아들이면서 하나는 생명의 바다가 되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바다가 될까요?
사해는 지중해보다 해발 388m나 더 낮기에 물이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사해는 들어오는 물을 받아 들이기만 하지 밖으로 물을 내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죽음의 소금바다가 되었습니다.
2. 성지순례 여행을 하면서 사해에서 수영하고 갈릴리 지역에는 푸른 초원에 양떼들이 꼴을 뜯는 것을 보며 북쪽으론 눈덮힌 헬몬산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라신 곳이 갈릴리 나사렛이며, 복음을 전하신 주 무대가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갈릴리 지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해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셨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갈릴리라는 지명은 수 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갈릴리 바다보다 세배 이상 큰 사해는 신약에선 지명 조차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국경을 말할 때 ‘염해’라고 하는 곳은 여호수아서를 비롯해서 구약에 몇 번 기록되어 있을 뿐이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께서 사해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시지 않으시고 갈릴리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신 것은 오늘날 교회의 성격을 잘 가르쳐 줍니다.
(이러한 갈릴리와 사해를 통해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본론)
가)사해와 갈릴리의 차잇점
1. 사해는 강물을 받아 들이기만 하고 밖으로 내 보내지 않을 뿐더러, 또 그 물이 뜨거운 햇볕에 증발하여 매우 농도가 짙은 소금물이 됩니다. 그 염도는 바닷물보다 다섯배나 더 높습니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라도 사해에 넣어주면 곧 바로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생물체도 살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사람도 물에 가라앉지 않고 물위에 둥둥 뜹니다. 뒤로 누워 신문을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소금에 절여져 죽을지언정 물에 빠져 죽을 염려는 없습니다.
그러니 주변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살지 못하며 주변 언덕에도 소금 기둥들이 마치 바위처럼 서 있습니다.
2. 그러나 갈릴리 바다 주변에는 양떼들이 뛰어 놀며 풀과 나무들이 싱싱하게 자랍니다. 이런 갈릴리 바다 물은 이스라엘 전 국민들의 식수로 사용되어 온 나라의 사람들을 기쁘게 합니다.
받기만 하고 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생명을 죽이는 것이 되지만 베풀고 나눌 때 자신도 살뿐 아니라 남들까지도 살리며 만물을 살리게 된다는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나)두 바다가 주는 교훈
1. 여기서 귀중한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옛날 어떤 동네의 쌀을 파는 가게 중엔 누가 쌀을 한 되 살 때, 어떤 집은 되를 싹 깎아 주는가 하면, 어떤 집은 되에 좀 수북이 담아 주는 집이 있습니다. 사실 약간 더 담아주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만, 그 가게 주인의 인심을 알 수 있습니다. 과일을 사건 야채를 사건 마찬가지입니다. 덤으로 조금씩이라도 더 얹어주는 가게는 손님이 많습니다. 단골도 많습니다. 그러나 덤없이 야박한 가게에는 뜨네기 손님, 지나가는 손님이 주로 들리게 되니 점점 장사가 잘 안됩니다.
2. 이런 점을 교회에 적용해 봅시다. 교회도 인색한 교회, 풍성한 교회가 있습니다. 물론 두 교회의 차이는 그리 커 보이진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비교 할 수 없는 사랑의 차이가 있습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따뜻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해마다 헌금이 마구 쌓입니다. 점점 저금액수가 늘어납니다. 장로님이나 집사님들이 그 통장을 볼 때 마다 기뻐합니다. 어떤 교회는 그저 그렇습니다. 별로 재정이 비축이 없어요. 선교헌금이나 구제헌금, 교육 투자등을 열심히 하다 보니 은행잔고가 얼마 안되요. 자,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생각되시나요? 제 개인적으론 두번째 교횝니다. 좋은 교회란 베풀 수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성장발전과 숫적 증가에만 힘쓰고 사회로부터 인색하게 보여진다면......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교회가 되겠습니까? 교회가 사랑을 열심으로 베풀 때,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풀 때 주의할 것은 보답을 바라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3)고 하셨습니다. 우린 항상 어려운 이웃과 사회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교회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공산권 선교나 아프리카 선교 등,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관심을 포기해서도 아니됩니다. 형편에 따라 최선을 다 할 수 있어야겠죠.
허창수 목사란 분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몇 년전에 중국 훈춘에 가서 특수학교를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이사장이 한국인으로서 미국 시민권을 가진 분이신데, 미국의 교회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훈춘에 장애자들을 위해 특수학교를 설립하고, 북한 나진에 고아원을 세우고, 어린이들에게 우유를 먹이기 위해 양을 키우고, 빵을 전해 주는 일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후에 그분으로부터 저에게 편지와 북한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 도 북한 어린이들에게 빵을 먹일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하였습니다. 북한에 굶주리는 어린이들에게 직접 빵을 전해줄 수 있는 방법이 어렵지 않습니다. 큰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쉽게 그리고 효율성있게 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선교는 꿈도 못 꾼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선교는 교인이 많고 돈이 많이 들어야 할 수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교인이 얼마 않되는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선교 역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난 번에 중국 신학교에 가서 한 주간 강의한 것은 어느 큰 교회들도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했습니다. 그리고 큰 부담 없이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 지 말고 기도하며 긍정적으로 이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동참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갇힌 물을 흘려 보내기 위해 물꼬를 열어야 합니다. 흘려 보내지 않으면 죽음의 바다가 됩니다.
2. 인간관계도 동일하다고 봅니다. 인색하면 복이 올거 같아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왕따만 당하고 흉허물이나 잡힙니다. 전에 어떤 군인형제가 우리 교회 왔었는데, 형제들 한테 얻어먹기만 하고, 자기는 한번도 형제들을 대접하지 않았대요. 그리고 점점 왕따를 당해 얼마 후 교회에서 떠나가 버렸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생활이 어려워도 두세 번 얻어 먹으면 한번은 대접하는 인간성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눅6:38절에서 예수께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38. |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
물론 누군가에게 줄 때에도 성경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에게 먼저 주어야 합니다. 교회 안의 형제가 매우 어려운데 교회 밖을 먼저 돕는 것은 현명하지도 형제답지도 않습니다. 갈6:9,10절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9. |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
10. |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
또 잠 19:17절은,
17. |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고 했어요. 여러분의 선한 행실은 반드시 하나님이 갚아 주시되 풍성하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째째하게 이자도 안 쳐서 원금만 갚아 주시겠어요? 아니죠! 최소 갚절로 갚아 주실 줄 믿습니다. |
결론)
갈릴리 바다는 예수님의 복음 사역지였습니다. 제자들을 그 바닷가에서 부르셨고 또한 제자들을 훈련 시키는 교육의 장소였습니다. 또 풍랑 속에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 때 홀연히 바다위로 걸어오셔서 죽음의 위기를 안전하게 지켜 주셨던 바다요, 제자들이 낙심할 때 새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던 바다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신 곳도 갈릴리 바다였습니다.
사해는 죽음의 바다 저주의 바다였기에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 언급하신적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나 우리 교회가 사해와 같은 죽음의 바다, 저주의 바다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생명을 살리는 바다,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킨 바다, 실패한 제자들을 다시 불러 재 사명을 주신 갈릴리 바다와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나 우리 자신들이 갈릴리 바다와 같아야 교회가 살고 아름답게 성장하며, 성도 여러분들이 모두 함께 복을 받습니다. 교회 주변에 이웃들이 복을 받습니다. 나아가 그런 교회들이 많아질수록 민족이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의 오늘날의 믿음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을 두 주먹으로 꼭 쥐고 놓지 않는 사해바다 같은 믿음입니까? 그러면 도대체 그것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아니면 베풀고 나누며 세계선교의 사명을 나의 사명으로 여기는 갈릴리 바다 같은 믿음입니까? 오늘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하시겠습니까? 고민해보는 한 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101917 안익선 목사/ 참고: 허창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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