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내 몸에 예수의 흔적 (갈 6:14-17)

호걸영웅 2019. 5. 24. 22:25

                     몸에 예수의 흔적 (갈 6:14-17)

 

서론)

1.

1. 미국에서 거리를 다니거나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몸에 타투(Tatoo, 문신)를 한 사람들이 꽤 많이 눈에 들어 옵니다. 전에는 한국에서는 조직폭력배나 불량한 그룹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속을 표시하기 위해서 문신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꽤 유행을 타고 있습니다. 요즘 미국도 유행처럼 보기 흉한 문신들을 한 것을 보고 참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모양도 별로 보기 좋지도 않고 해괴한 모양의 문양도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십자가를 몸에 새깁니다. 그래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자신의 몸에 남깁니다. 아마 신앙심이 특별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신은 새기는 것에 비해 지우는 것이 몇 배의 고통과 비용이 들기도 하고 피부염으로 고생하거나 문신 잉크에 발암 물질도 꽤 많다고 하니 가능하면 안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2.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로 살아가면서 몸에 십자가 문신을 새기는 것보다 더 필요한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맨 마지막 부분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갈라디아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개척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다음에 문제가 생겼는데, 교회 안에 들어온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도 육신의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을 합니다. 육신의 할례가 곧 하나님의 백성의 표식이고, 구원의 표식이기 때문이기에 받아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육신의 할례는 받으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지도 않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표시한 그 할례가 무슨 소용이 있냐고 반문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흔적은 육신의 할례의 흔적이 아니고, 예수의 흔적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흔적이라고 할 때에 쓰인 '흔적'  헬라어 의미는 소나 양의 소유주가 '이 짐승은 나의 것이다' 라고 표시하기 위해, 자신의 소유를 나타내는 고유한 글씨나 문양을 불에 달구어 짐승의 몸에 지져서 낸 표식을 대개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 곧 나는 예수님의 것이라는 표식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님의 소유됨을 드러내는 삶의 어떤 흔적들이 있었던 것일까요? 또 그 교훈은 무엇일까요?)

 

본론)

)예수 고난의 흔적.

1. 사도 바울이 몸에 지닌 예수의 흔적을 무엇입니까? 그 흔적은 바로 고난 받으신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이사야 53:4= "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 나시기 700여 년 전의 예언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성취된 흔적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대들을 두려워해서 모여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그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21절에서,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십니다.

 

2. 그 고난의 증거는 곧 부활의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두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이었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형의 흔적이었습니다. 물론 주님께는 채찍에 맞은 흔적, 가시면류관 쓰신 흔적도 있으셨겠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십자가의 흔적을 본 제자들은 놀라워하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은 그 분께서 진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시고, 이제는 부활하셔서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신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 사도 바울이 받은 흔적

1. 사도 바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는 예수님과 같이 자신의 삶에 고난의 흔적들이 많았음을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그 고난의 흔적들은 바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요, 구원받은 자임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와 교회도 그 존재의 흔적들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흔적은, 죄와 무지로 인한 흔적이 아니라,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사랑과 구원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흔적도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자신의 육체적인 할례를 자랑하면서 자신들은 구원받았다고 자랑스러워하면서,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 일을 방해가 되었습니다.

 

2. 사도 바울이 오늘날 터어키의 중부에 있는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핍박하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찾아와 사람들을 선동하여 예수 복음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루스드라에 사는 유태인들이 바울이 어려서부터 된 앉은뱅이를 고치고 사람들에게 존경과 숭배를 받자 돌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저항 없이 그 수 많은 돌에 숨이 끊어질 지경이 되어 쓰러집니다. 유태인들은 사도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해서 그 몸을 성 밖으로 끌어내 던져 버립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돌로 친 사람들이 있는 그 루스드라 성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더욱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할 수만 있다면, 돌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돌을 맞아 몸이 멍들고 머리에서 피가 난다고 할지라도 사도 바울은 그것을 예수의 흔적의 하나라 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11:22~28에 보면 또 이런 고백의 말씀이 있습니다.

22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예수의 흔적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우리들이 가져야 할 예수의 흔적

1. 오늘날 우리 자신을 보면서 우리에게 어떠한 예수의 흔적이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육체의 할례를 자랑하는 유대인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내가 구원받았음을 만족하며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고, 이 세상에서는 복 받아서 물질적으로도 풍성하게 살고, 자녀들도 잘되고, 건강하게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 없이 살아가기만을 원합니다.

그런데 안타가운 것은 그러한 모습 속에서는 예수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그 고난의 흔적을 받는 것에 대해서 거북해 하고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의 흔적이 나타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2. 누군가는 복음전도의 사명을 위해 손해 보지 않습니다. 희생하지 않습니다. 수고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땀 흘리지 않습니다. 책망 받지 않습니다. 투자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드리지 않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전도를 위해서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낯선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전하거나 전화하거나 찾아가거나 기도하는 그런 흔적을 보기 어렵습니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새날이 시작되면 주인 앞에 무릎을 끓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짊어집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알기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는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그리고 낙타는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다시 한번 무릎을 꿇습니다. 등에 있는 짐을 내려지기를 기다리며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기에 낙타의 무릎은 볼품이 없지만, 그것이 또한 주인에 대한 복종과 순종의 흔적이 되는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흔적은, 영혼을 구원키 위한 흔적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와 교회에서도 이러한 예수의 흔적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결론)

1. 물론 예수의 흔적은 부활의 흔적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 흔적은 예수님의 고난과 수치, 죽음을 나타내는 슬픔의 흔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다는 흔적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그 고통과 눈물을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보시면서 너에게 나의 흔적이 있다며 칭찬하실 것입니다.

 

2. 저는 이 시간, 우리 스스로가 예수를 위한 어떤 흔적들이 있는지를 살펴보길 원합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바른 믿음을 지키기 위해 기도 드리는 그 기도의 흔적이 있습니까? 주일성수하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서 여러 모양의 손해를 감수한 흔적들이 있습니까? 교회에 봉사키 위해 피곤함을 무릎 쓰고 진통제를 먹어가며 까지 고생한 흔적들이 있습니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신음하며 아픈 중에도 영혼들을 섬긴 흔적이 있습니까? 선교사명을 위해 기꺼이 물질을 드려본 경험이 있습니까? 예수 때문에 왕따를 당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과 같은 흔적은 없더라도... 오늘날 죄에 대항하며 구원을 위해 무언가를 드리거나 포기해 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시간 우린 기도 해야 합니다. 주여! 나도 예수 당신 주님의 흔적을 갖기를 원합니다. 저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때에, 우리가 이 땅에서 받은 예수의 흔적은 수치와 부끄러움이 아니라 칭찬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을 통해,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날마다의 삶을 통해서 예수의 흔적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40919 안익선 목사/ 참고:배 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