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것을 찾으며 살자(골 3:1-5)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서론)
오늘 읽은 골로새서의 저자는 ? 사도 바울이십니다. 골로새서를 쓴 목적은? 바울에게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전해준 에바브라에 대한 감사와 아울러, 골로새 교회에 침투하려는 이단 및 그릇된 철학과 속임수를 주의하라는 의미의 전달이었습니다. 바울이 아시아(투르키예) 지방을 떠난 지 2년 정도의 기간에, 골로새 교회에는 거짓 교사들의 교활한 이단 사설이 스며들었습니다. 이단 사설이라 함은? 잘못된 헬라 철학이라든지 유대주의적 형식주의와 천사를 숭배하는 신비주의, 금욕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왜곡된 신앙, 점성술 같은 학문을 혼합시킨 혼합종교(영지 주의 등)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잘못된 가치관과 철학과 혼합된 종교 등을 배척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본론)
가)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았다는 의미는?
오늘 말씀 가운데 1절 말씀=“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 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골3:1절에서,“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즉,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가 죽은 적이 있습니까? 다시 살아난 적이 있습니까? 육신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이것은 육적인 의미가 아닌 영적인 의미의 말씀입니다.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그렇지요. 이 말은 우리가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거듭나서 영적으로 부활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을 때, 우리의 옛 사람, 육신에 속해 있던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같이 죽고, 주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 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부활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 “거듭난다”, “중생한다”는 말로 자주 사용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새로운 존재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영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걱정, 근심이 많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엔 복잡한 문제가 많아요. 그런데 그 사실을 자세히 알고 보면 문제들이 별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죽지 못해서 그럴 때가 많다는 겁니다. 내 욕심이 죽지 않고, 내 자랑이 죽지 않고, 자존심과 성질이 죽지 않고,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허영이 죽지 않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고, 문제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내 주장, 내 생각이 철저히 죽어야 하는데, 아직도 덜 죽어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을 갔답니다. 신부가 옛 애인을 잊지 못하고, 신랑 몰래 전화를 걸다가 들켜 가지고 얻어맞은 일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는 안되겠지요. 결혼과 동시에 이제는 옛 남자친구는 정리가 되었어야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죽음은 회개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과거의 모든 죄를 완전히 십자가 밑에 묻어 버리고, 죄악된 과거와 관련을 아주 끊고,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예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자는 율법 앞에서도 완전히 죽은 자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도 죽은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아주 작아지고, 또 결국엔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고맙고, 은혜가 너무 고마운 나머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라고 바울은 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사도 바울처럼 될 때, 진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어느 날, 홍수가 나서 물이 많이 불었는데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 하나가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행히 구조대원 두 사람이 그쪽으로 헤엄을 쳐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 생각은 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간 채 가만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죽겠다고 난리입니다. 그러다 힘이 빠지게 됩니다. 그제서야 두 구조대원은 그 사람을 건져냅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왜 빨리 건지지 않고 기다렸느냐고 물으니까, 그들이 답하기를,‘저 사람이 힘이 남아 있어서 버둥거릴 때에 손을 잡았다가는 저 사람이 우리의 목까지도 끌어안아서 우리도 죽게 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앞에 철저히 죽고, 율법 앞에 죽고, 은혜 앞에 죽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되게 살 수가 있습니다.
한번은 성자 ‘마카리우스’란 분에게 그의 제자가 물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말을 하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성자는 아주 실질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너 오늘밤에 저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 보고 ‘이 나쁜 놈들아, 이 위선자들아, 이 부자 놈들아, 이 천하고 고약한 놈들아’하고 욕이란 욕은 있는 대로 다하고 돌아 오거라”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성자가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를 보고 성자가 묻습니다. “어떻더냐?” 제자가 보고합니다. “아무 반응이 없던데요” “그렇더냐? 그러면 내일 아침 다시 가서 이번에는 칭찬을 해보아라. ‘훌륭하고 위대한 분들이여’ 하고 돌아오너라.”
그 제자는 아침이 되자 다시 묘지로 가서 성자가 시키는 대로 무덤들을 향하여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칭찬의 소리를 잔뜩 외쳐대다가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어떻더냐?”,제자 왈 “역시 아무 반응이 없습디다.” 비로소 성자는 말합니다. “그게 바로 죽었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죽은 사람은 세상 것들에 반응이 없어야 합니다. 칭찬해도 교만할 것도 없고, 중상모략을 당해도 분노의 말이 없습니다. 사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세요. 온갖 중상모략을 당해도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왜요? 대답할 가치도 없으니까요. 세상에 대해서 이미 죽었습니다. 깨끗이 죽었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9-20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5:15절도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바로 그분(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 내 생애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3:12절에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내 기쁨도 그리스도요, 내 영광도 그리스도요, 사는 것이 그리스도 때문이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믿고 행하며 사는 사람이란 말이 됩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세요. 그전에는 자신을 위해서, 쾌락과 육신을 위해, 그리고 헛된 것들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모든 소유와 친구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품에 돌아온 탕자는? 과거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오직 은혜로 살게 되었습니다.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를 위해서 삽니다. 여기에 감사가 있고,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오직 돌아온 삶의 감격과 감사로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복과 기쁨이 재물이나, 이 세상에 친구들에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께 있음을 깨닫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먼 산 보듯 할 이야기가 아닌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떤 생물학자가 세미나에서 강연을 하는데, 조그마한 씨앗을 집어 들고 ‘이 씨앗 하나가 참으로 신비한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든지 그 성분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질소, 수소, 탄소로 합성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성분대로 씨앗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만든 것은 땅에 심으면 썩어 버립니다. 그러나 여기 내 손에 있는 이 조그마한 씨앗은 땅에 심으면 싹이 납니다. 그리고 똑 같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이유는 이 안에 감추어진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만든 씨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씨앗은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씨는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주렁주렁 맺습니다. 우리 안에 이런 생명이 있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나)위에 것을 찾는 구체적 실례들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의 구체적 실례들은 무어일까요?
위에는 누가 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에 것을 생각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항상 생각하고, 하늘 나라를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능력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다나 강을 볼 때마다, 산과 바위와 나무와 꽃을 볼 때마다, 들의 푸르름이나 밤하늘의 찬란히 빛나는 별들을 바라볼 때마다, 사람들의 눈동자를 들여다 볼때마다, 주신 음식을 볼때마다…뭘 하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입술에서 ‘할렐루야’가 늘상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겸손하심, 그분의 온유하심, 그리스도의 진리의 교훈,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고난 당하심,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스도의 대속해 주신 사랑, 재림의 약속, 그리스도의 인내와 자비, 긍휼과 능력을 생각해야 합니다. 분하고 억울한 생각이 들 때,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를 위해서 기도하신 그 놀라운 용서를 생각해야 합니다.”
결론)
그래서 빌립보서 4: 8절에서 바울은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즉, 이것이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의 특징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강 같은 평강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승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 높은 곳, 위를 향하여 날마다 힘차게 전진하며 나아가는 일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잠깐 있다 사라질 것들보다는 영원하고, 참으로 존귀하고 거룩한 것, 사랑이 넘치는 것, 복된 하늘 나라의 것들을 생각하고 사모하며 투자하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실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031026 안익선 목사/참조:김종민 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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