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글 모음

[스크랩] 007보다 드라마틱한 스파이의 세계

호걸영웅 2007. 11. 22. 20:39

북한 스파이 정수일-진운방-정수일 국적세탁  계보


‘직파 간첩’ 정경학이란 자가 체포됐다. 남북간 긴장분위기가 현저히 해소된 상황에서 북한에서 직접 보낸‘간첩’이 활동하고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그것도 한국에서 장기간 활동을 위해 국적세탁까지 했다니 한 사람의 간첩을 보내기 위해  오랫동안의 공력을 기울인 북한의 정성(?)이 일견 가상할 뿐이다.

 

정경학은 방글라데시→태국→중국→필리핀 등 네 차례의 국적 세탁 과정을 거쳐 완벽한 외국인 행세를 하며 주요산업시설, 군기지 등을 촬영하고 김정일에게 도움이 되는 자료들을 챙겨서 발송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김일성종합대를 다닌 엘리트로 영어 태국어 중국어에 능숙하다는 정은 간첩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북한에서 여러 차례 훈장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켈톤 가르시아 오르테가란 이름이 좀 독특하다. 켈톤은 북한의 다부작 스파이 영화 ‘이름없는 별’에 나오는 포악한 미국인 이름이다. 그 역할은 북한에 망명했다가 일본인 부인을 따라 일본에 정착한 찰스 젠킨스가 맡았다. 상상력 빈곤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북한의 국적세탁 간첩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6년 7월 무함마드 깐수 교수로 활동하다 체포된 정수일, 1999년 민혁당사건 때의 진운방에 이어 세 번째다. 처벌을 받고 이제는 한국인 정수일씨가 된 무함마드 깐수 사건은 충격 그 자체였다. 레바논에서 태어난 필리핀 국적을 가졌다는 무함마드 깐수 단국대 교수가 북한 간첩 정수일인줄은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는 정씨의 한국인 부인까지 그가 같은 동포일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그가 국가안전기획부에 체포됐을 때 처음엔 ‘용공조작’으로 오해하고 박원순 변호사가 항의를 했을 정도니까. 아랍인의 풍모를 지녔던 그가 ‘토종 한국인’ 정수일로 밝혀진 것은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간첩죄에 대한 처벌을 받은 후 정 교수는 활발한 저작 활동을 하면서 대한민국의 아랍학, 실크로드학의 수준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발군의 공헌을 하고 있다.


말레이시아계 화교로 위장했던 진운방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종옥청으로 위장한 처(38)와 함께 침투해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말레이시아 음식점 ‘삿떼리아’를 운영했었다. 주한 말레이시아 대사관이 진운방이 자국인으로 철썩 같이 믿고 개업축하 화분을 보내기도 했다. 민혁당 간첩 조직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진운방은 반잠수정을 타고 북으로 도피를 하던중 한국 해군의 포격을 받고 남해의 수중 고혼이 됐다.


세계사를 바꾼 남자, 조르게


국적세탁은 스파이의 세계에선 보편화된 현상이다. 2차대전 중 일본에서 활동했던 리하르트 조르게(Sorge, Richard 1895~1944)가 대표적인 예다. 조르게는 구소련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수도 바쿠에서 출생했다. 광산기사인 독일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조르게는 3살 때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1914년 10월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 육군으로  참전했다. 전투중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입원중 사회주의 사상을 알게 됐다. 전후 1919년 함부르크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독일 공산당에 입당했다. 당에서 활발한 실적이 인정돼 1925년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본부에 스카우트돼 모스크바로 임지를 옮겼다. 그는 소련 시민권을 얻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조르게는 1930년 독일신문 프랑크푸르트 차이퉁의 특파원이란 직명으로 상하이에 파견된다. 상해에서 취재활동을 하면서 아그네스 스메들리(1892~1950『한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저자)와 아사히 신문기자였던 오자키 호쓰미(尾崎秀實 1901~1944)와 친교를 맺게 된다. 1933년 9월 6일 그는 동 신문의 도쿄 특파원으로 요코하마에 파견됐다.


상하이 시절 알게 됐던 오자키는 도쿄 제국대학 출신의 엘리트로 일본 고노에 내각[近衛內閣]의 브레인으로 당시에는 남만주철도 주식회사 촉탁이었다. 고노에 후미마로(1891~1945) 공작(prince)은 일본 최고의 명문가인 후지와라(藤原) 가문의 후손으로 천황가가 단절되면 천황후보 0순위로 꼽혔던 인물이다. 청년기에는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됐다가 보수 정치인으로 변신했다고 한다.


프랑스 아바스 통신사(지금의 AFP통신) 특파원인 유고슬라비아인 브랑코 우게리치, 원로 정치인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의 손자 사이온지 긴가즈(西園寺公一), 서양화가이며 미국 공산당원 미야기 요도쿠(宮城與德), 독일인 기사 막스 클라우젠 부부를 중심으로 하는 간첩망을 일본 국내에 구축하고 스파이활동을 시작한다.


재일 독일인 사회에서 일본 전문가인데다 골수 나치스 당원 행세를 했던 조르게는 독일대사 오이겐 오토(Eugen Ott, 1889~1977)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었다. 그는 대사의 사설 정보관이 돼 기밀정보에 가장 근접하기 쉬운 위치에 올랐다. 이같은 위치를 활용, 조르게는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 「바바로사 계획」의 정확한 개시 일시(1941년 6월 22일)를 비롯, 상세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다. 그러나 조르게를 이중간첩으로 의심하고 있던 스탈린 정권은 이를 무시, 결과적으로 소련은 서전에서 독일에 대패를 당했다.

 

오자키는 일본군의 공격목표가 동맹국 독일이 원하는 소련 방향이 아니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국령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남방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조르게는 이에 근거, 일본의 대소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일본 군부는 독소 개전 보다 앞선 1941년 4월 30일 일소(日蘇) 중립조약을 체결, 남방자원 확보가 목적이어서 소련침공에는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의 전쟁 기본정책이 대소전 회피, 대미단교(對美斷交), 남진론(南進論)을 취하는 것을 확인, 소련에 타전했다. 소련은 일본군의 침공에 대비, 소련․만주 국경에 배치했던 병력을 유럽 방면으로 이동시켜 모스크바 공방전(태풍작전)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데 성공, 1945년5월 독소전에서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만큼 조르게가 소련에 보낸 정보는 파괴력이 컸고 정확했다. 


정보는 외교행낭을 이용, 비밀리에 소련에 보내지는 것은 물론 클라우젠이 무전기를 사용, 블라디보스토그의 중계지로 송신했다. 특고는 일찍이 괴전파가 도쿄시내에서 소련과 중국 방면을 향해 송신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클라우젠은 송신기를 자동차에 넣어 발신장소를 수시로 변경한데다 암호 자체를 해독할 수 없어 일당이 체포되기까지 발신원을 파악하지 못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41년 10월 조르게, 오자키 그룹은 스파이혐의로 경시청 특고(特高) 1과와 외사과(外事課)에 체포됐다. 군사정보 스파이사건은 육군 헌병대 관할이었지만 코민테른 스파이로서 특고경찰이 담당했다. 체포된 경위는 1941년 6월に 일본 공산당원 이토(伊藤律)가 체포됐고, 미국 공산당원으로 당시 일본에 거주했던 기타바야시 도모(北林トモ)의 이름을 발설하고, 다시 기타 바야시가 미국 공산당원인 미야기(宮城)의 이름을 발설한 게 계기가 됐다고 하지만 상세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난무하고 있다.


이들의 체포후 오자키의 친구이며 중의원 의원, 왕조명(汪兆銘)이 이끄는 난징(南京)국민정부의 고문이었던 이누가이 다케시(犬養健), 조르게의 기자 동료로 우게리치의 아바스 통신사 동료였던 프랑스인 기자 로벨 등 관계자 수백명이 참고인으로 취조를 당했다.


조르게의 친구였던 오토 주일 독일대사는 자국국민에 대한 부당한 체포라며 여러 외교루트를 통해 강력하게 석방을 요구했으나 조르게와 특별면회에서 본인으로부터 소련 스파이라는 사실을 직접 들은 후 대사직에서 해임돼 일본을 떠났다.


그 후 조르게 오자키는 1942년 국방보안법,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기소돼 사형판결을 받았다. 두 사람은 스카모 (巣鴨) 구치소에 수감돼 1944년11월7일 러시아 혁명 기념일에 사형에 처해졌다. 이듬해인 1945년1월 우게리치도 홋카이도 아마스(網走)형무소에서 옥사했지만 막스 클라우젠 부부는 연합군에 의해 석방돼 고향인 동독으로 귀향했다.


사상의 조국 소련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던 조르게는 오랫동안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조르게가 코민테른 스파이라는 사실을 자백했지만 소련 정부는 완강히 조르게가 자국 스파이라는 사실을 부정해 한동안 소련에선 조르게의 존재는 잊혀졌다. 그후 반스탈린노선을 표방한 흐르시초프의 집권시기에 들어서야 1964년 조르게에 대해 소련 영웅훈장이 수여됨으로써 사후 20년이 지나서야 공적이 인정됐다.


아랍권을 농락한 이스라엘 스파이 엘리 코헨


이스라엘 스파이 엘리 코헨(Elie Cohen 1924~1965)의 첩보활동은 전형적인 제3국 우회침투를 통한 첩보수집 사례를 보여준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유대인인 코헨은 카이로의  모이모노데스 스쿨을 거쳐, 미드라슈 람뱀에 입학했다.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던 그는 랍비(유대교 성직자)를 꿈꿨다. 학교 시절 수학과 어학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13세때 선물로 받은 코닥 카메라가 인연이 돼 사진 촬영과 현상을 몸에 익히게 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코헨은 팔레스타인에서 조국건설운동단체인 유대 시오니스트 청년단에 가담했다.


1957년 코헨은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정보요원으로 선발됐다. 엘리의 상사들은 아랍인과 유사한 용모, 아랍어에 능숙한 점을 감안, 그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파견키로 했다. 당장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건공작 차원에서 이슬람 연구를 하는 대학생 신분으로 아랍인이 많이 살고 있는 나자레로 보냈다. 그곳에서 코란의 교리를 배우며 이스라엘 전역에 있는 회교사원을 순례케 했다. 엘리는 시리아의 역사 경제 행정 지리와 시리아 특유의 아랍어를 배우는 훈련을 받았다. 이와함께 아르헨티나에 관한 학습도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친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랍인 사회에 이주했다. 카말 아민 타베스란 시리아인 행세를 했다. 코헨은 아르헨티나 아랍인 사회의 상류층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는 과거 실권자로 있다가 쫓겨난 바트당의 유력인사를 비롯, 각국대사와도 친밀해질 수 있었다. 그가 가장 친밀하게 접근한 대상은 시리아 대사관 무관인 하페스였다. 당시 그는 영관급 장교였지만 수년후 시리아의 대통령이 됐다.


아르헨티나 주재 시리아 정보기관은 유력자에게 접근하는 코헨의 움직임이 의심스러웠다. 철저한 뒷조사를 했다. 그런데 코헨의 말은 전부가 사실과 부합됐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카밀이란 가명을 줄때 실제 레바논에 거주했고,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한 카밀 타베스의 신상을 그대로 뽑아 경력을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카밀이 한때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살았다는 사실마저 일치돼 시리아 정보기관은 의심의 끈을 놓았다. 


1962년 1월 코헨은 베이루트를 거쳐 다마스쿠스에 도착했다. 시리아 육군본부가 있는 근처에 아파트를 마련했다. 코헨은 이 거점을 중심으로 시리아 상류사회 내에 영향력을 키우면서 한편으로는 군 장교단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는 국영방송의 대남미지역 방송담당자로 활약도 했다. 그리고 틈틈이 깊이 사귀어 온 군 작전장교를 앞세워 전선의 진지를 시찰하고 뛰어난 기억력으로 하나하나를 모두 암기하고 정리, 종합하여 텔아비브로 송신했다. 이스라엘군은 시리아 군의 장비에 대하여도 상세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물론 코헨이 제공한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하페스장군이 대통령이 된 그 연줄을 이용하여 자기 아파트를 엽색행각을 위한 아지트로 제공하면서 더한층 군 간부들에게 깊숙이 침투했다. 한때는 집권 바트당에 정치자금을 두둑하게 제공하여 국방위원까지 추대되었고, 당에서는 그를 국방장관까지 내정했으나 갖가지 구실을 부쳐 겨우 사양했다.


1967년 6월5일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6일만에 결판이 났다. 이스라엘군이 난공불락을 자랑하는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10시간만에 완전히 함락시켰다. 병력수로는 열세한 이스라엘의 완전 승리였다. 이때 이스라엘 국방부장관인 모세 다얀장군은 후에 이렇게 술회했다. "엘리 코엔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골란고원을 함락시키기 위하여 더 많은 희생을 치렀어야 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요새의 점령은 영원히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재 스파이 엘리에게도 실수가 있었다. 다마스쿠스에서 활동한 지 4년만에 체포당한 것이다. 시리아 대간첩본부는 인도 대사관으로부터 간간이 전파 간섭현상을 유발하는 괴전파가 발생한다는 신고를 받았다. 뉴델리로 보내는 무선연락이 빈번히 전파방해를 받는다는 항의였다. 장비와 기술이 부족한 시리아로서는 도저히 원인을 규명할 수 없어  소련 군사고문단에 지원을 요청했다. 소련은 즉각 방탐차량까지 제공하고 요원을 파견했다. 그러나 워낙 뛰어난 무전기로 송신을 하기 때문에 도저히 잡아내기가 어려웠다. 대간첩본부는 고의로 다마스쿠스시 전체를 정전(停電)상태로 만들었다. 그러나 주의심이 약해진 코헨은 그날 따라 건전지를 이용, 송신했다. 송신 시간도 길었던 것이다. 결정적인 실수였다.


시리아 정보기관은 코헨의 아파트를 포위하고 그가 송신하고 있는 순간에 급습했다. 코헨은 아르파페스 대통령 앞에 연행됐다. 대통령은 자신의 심복이라고 생각했던 코헨이 스파이였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너는 누구냐?” 대통령이 물었다.

“나는 텔아비브에서 온 엘리 코헨, 이스라엘 군인이오”

자신을 믿고 사랑해온 아르파페스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의 호의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그의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로마교황, 프랑스 드골 대통령까지 여기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리아의 입장에서 코헨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간첩이었다. 드디어 1965년 5월 18일 새벽 3시 35분 시리아는 서둘러 코헨을 수천명이 모인 광장에서 공개 교수형에 처했다.


출처 : 百花齊放
글쓴이 : joseph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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