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글 모음

조직신학박사님이신 장두만 박사님의 구원간증(펌글)

호걸영웅 2009. 6. 18. 12:55

너무 어렵게 찾다가 너무 쉬워서(1)

 

장두만 목사


  저는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포항 외가에서 자라면서 안질로 노년에 실명하신 외할머니의 새벽 기도 길 안내를 하기 위해서 교회에 발을 디뎌 놓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 때 제 나이가 4-5세 전후가 아니었을까 짐작이 됩니다.

  포항에서 초등 학교 2학년에 진급한 지 얼마 안되어 어머니가 계시는 부산으로 옮겼습니다. 포항에서나 부산에 이사 온 후에나 교회는 착실히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대연동에 있는 대연교회에 다녔고,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좌천동으로 이사와 그 동네에 있던 성산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완전히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냥 교회에 가는 게 좋았고, 또 친구들 만나 노는 것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으레 교회에 가는 것이 저의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 학교에 진학하면서 상황이 많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고등 학교 1학년 때에는 학교 공부는 기본적으로만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독서에 열을 올렸습니다. 미친듯이 책을 읽어댔습니다. 학교 도서관에 있는 웬만한 책은 다 읽었다고 할 정도로 많이 읽었습니다. 1학년 때에는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학교에서 독서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교회 전도사님의 책도 엄청나게 많이 빌려다 읽었습니다.

  

  독서를 많이 하니까 인생을 보는 눈이 뜨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특히 1학년 여름 방학이 지나고 나니 저의 생각이 굉장히 많이 바뀌고 깊어진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점점 자의식이 들기 시작하면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은 무엇이냐?"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등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종교적, 신앙적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나는 왜 교회에 다니느냐?" 하는 질문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답은, "구원받아 천국에 가기 위해서" 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진짜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전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제 자신을 볼 때 저는 분명히 죄인이고, 이대로 죽으면 저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서운 지옥만큼은 정말 가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불과 유황이 타는 곳, 그 곳만큼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피해야겠다는 것이 저의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천국에 가야 할텐데." 이것이 늘 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고민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어느 누가 보나 모범생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반장을 했고 (고1 때와 고3 때), 공부라면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교회에서는 학생회 간부를 하면서 열심히 교회 일도 했습니다. 주일 낮 예배, 저녁 예배, 수요 예배, 토요 학생회 예배, 심지어는 어른들이 모이는 금요 구역 예배에까지 별로 빠진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저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도 알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도 알았고, 예수께서 세상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죽으신 것도 알았고, 천당과 지옥이 분명히 있는 것도 알았습니다. 정통 교리 가운데 하나도 부인하거나 의심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죄 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되지를 않았고, 저의 내적 고민은 더해 가기만 했습니다. 천당이나 지옥 얘기만 나오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2,000년 전에 죽은 예수의 죽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아무리 머리를 짜내 보아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성산교회는 신학자로 또 주석가로 명망이 높으셨던 고(故) 박 윤선 박사님이 담임 목사님으로 시무하셨습니다. 박 목사님은 설교만 하시고 나머지 시간은 저술에 전념하셨기 때문에 저의 신앙적인 고민을 박 목사님과 상의할 기회는 갖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부목사님, 전도사님, 학생부 지도교사, 청년부 부장, 성가대 지휘자 등 무언가를 알 것 같은 사람은 다 붙들고 물어 보았습니다.

  "제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겠느냐"고 그 분들은 물론 최선을 다해서 답변하셨겠지만, 저의 영적 문제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저의 심각한 고민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지를 못했습니다. "결국 나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인가?" "그러면 나는 이렇게 살다가 지옥에 가야 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주저 앉아서 지옥으로 갈 수는 없어!"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 다해서 좀 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그때 가서 포기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율법을 지킴으로 천국에 가 보아야 되겠다고 제 나름으로 결론을 내리고 율법을 지켜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제가 아는 율법이라야 주로 10계명이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조금 지켜지는 것 같았고, 그 때에는 "지금은 죽으면 잘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을는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안심이 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음 순간 율법을 범하게 되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절망감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천당과 지옥 사이를 수없이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 저를 괴롭혔던 또 한 가지 문제는 예정론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시키지 않기로 예정하셨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내가 예수 믿고 천국에 가고자 하는 이 모든 것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지옥 보내기로 작정하셨다면 나는 어차피 지옥에 갈터인데, 그럴 바에야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인생을 즐기다가 지옥에 가는 게 더 낫지 않은가?"

  이런 생각으로 교회에 빠져 보기도 했지만 왠지 불안하고 두려워서 교회를 그만 둘 수가 없었습니다. 한 주일 한 주일 교회에 가는 것이 참으로 고통스럽기만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설교가 머리에 제대로 들어 올 리가 없었습니다.

  

설교가 시작되면 처음 얼마 동안은 설교에 귀를 기울여 보지만 이내 저의 마음은 다른 데로 향하곤 했습니다. 집에서 외우던 영어 단어나 숙어 생각, 수학공식 생각, 친구 생각, 내가 은근히 좋아하던 여 학생 생각 등등으로 몸은 예배당에 있었지만 마음은 완전히 콩밭에 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설교가 끝나지 않으면 그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졸음과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안 졸고 깨어 있어 보려고 귀를 후비기도 하고, 팔을 꼬집기도 해봤지만 잠은 왜 그리 눈치도 없이 쏟아지는지... 졸다가 창피를 당한 적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정말 무미 건조한 가운데 교회생활을 했습니다. 아무런 기쁨도, 감사도, 감격도, 확신도 없는 그런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졸업을 앞둔 채 대학입시 때문에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석근리로 옮겼습니다. 평택에서는 형님 (장두천 목사; 현재 서울 은평구 신사동 신광 성서 침례 교회 담임 목사)이 전도사로 담임 목회를 하고 계셨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대학 입시 때문에 형님과 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입시 시즌이 다 끝난 후 저는 형님과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형님은 저에게 물었습니다. "두만아, 너 구원받았나?" "형님, 구원이 그렇게 쉽나요?" 형님은 구원의 길은 참으로 쉽고 단순하다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3년 동안 그렇게 찾고 찾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주어졌지만 저는 도대체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쉬웠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어려웠다면 오히려 믿기가 쉬웠을는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쉬우니 오히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그냥 믿기보다는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교회에 다닌 경력이 몇 년인데. 더군다나 똑똑하다고 자부하던 제가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형님이 한 마디 하시면 저도 질세라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던 성경 지식을 총동원해서 반박을 했습니다. 거의 한달 가량 하루에도 몇 차례 그런 식으로 논쟁을 했습니다. 한달쯤 지나니 저의 성경 지식은 고갈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반박할 자료가 바닥이 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때부터 약 1주일 정도 저는 형님의 얘기를 일방적으로 듣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때가 1968년 3월 아니면 4월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입시철이 지난 후 약 한달이면 3-4월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 날은 어떻게 된 일인지 형님과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제 방에서 홀로 묵상에 잠겼습니다.

  

  멀리는 지난 3년 동안의 나의 모습을, 그리고 가까이는 최근 한달여 기간 동안의 일들, 형님과의 대화, 나의 무지와 반박 등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마음 속으로 큰 깨달음이 한 가지 왔습니다. "아하! 예수께서 이미 2,000년 전에 다 이루어 놓으셨구나! 이제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네! 모든 게 이미 다 끝나버렸네!"

  그 때가 바로 제가 거듭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저의 이름이 하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되는 순간이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이었고, 나의 모든 죄가 완전히 해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무슨 굉장한 체험이 오지는 않았습니다. 무언가가 일어 난 것은 확실했지만 아직 내가 감지할 정도의 "그 무엇"은 없었습니다. 운 것도 아니었고, 기뻐 뛴 것도 아니었고, 감사가 터져 나온 것도 아니었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3일이 지났습니다. 엄청난 변화의 파도가 제 심령 가운데로 몰아 닥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생활을 20년 가까이 했지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변화들이 걷잡을 수 없이 찾아 왔습니다.

  

  주님의 은혜만 생각하면 눈물과 콧물이 봇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진실한 감사 같은 것은 해본 적도 없었고 또 정말 감사할 것도 없었습니다. 주님 은혜 때문에 감격해서 눈물 한 방울도 흘려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나 위하여 십자가에 중한 고통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구속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 안 할까" (403장) "웬 말인가 나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같은 찬송을 부르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찬송가 가사 하나 하나가 바로 저의 신앙고백이요 저의 간증이었습니다. 거의 6개월 정도를 그런 기쁨과 감격과 눈물 가운데서 지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이 새롭게 인식이 되면서 하나님 말씀이 너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막혔던 눈이 뜨이니까 신령한 세계가 보이면서 제가 이전에 보았던 성경과는 전혀 다른 책으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평택에 있던 약 6개월 기간 동안 거의 200구절을 암송했습니다. 매일같이 성경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교제하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저는 또 주님을 만나고 나서 한 2-3일 정도는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히 땅에 있는데 땅위를 걷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저의 가치관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릴 때부터의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보려고 오직 머리 하나만 믿고 공부를 했습니다. 법관이 되어서 출세하고 잘살아 보고 유명하게 되고 싶은 게 저의 평생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고나니 이제 그런 것은 너무나 시시하고 더 이상 저 에게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의 전부를 주님께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 후 신학교 1년, 군 복무 3년, 일반 대학으로 복귀해 4년, 그리고 미국에서의 신학 공부 8년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이 50중반에 들어서면서 다시 저의 삶을 돌아보니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바울 사도의 고백을 다시 한 번할 수밖에 없음을 느낍니다. 저의 주님인 동시에 모든 거듭난 성도들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성서침례신학교 교수  장두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