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하나님을 기쁘시게 (시 37:4, 요 8:29)

호걸영웅 2010. 1. 9. 10:31

                   하나님을 기쁘시게 (시 37:4, 요 8:29)



  공자의 ‘효경’에는 아주 잘 알려진 말이 있습니다. ‘신체발부(身體髮膚) 수지부모(受之父母) 불감훼상(不敢毁傷) 효지시야(孝之始也)’라 했습니다. 신체와 머리카락, 피부는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므로 자신의 몸을 잘 지키는 것이 효의 첫걸음입니다. ‘입신행도(立身行道) 양명후세(揚名後世) 이현부모(以顯父母) 효지종야(孝之終也)라 합니다. 출세하여 도를 행하고, 이름을 후세에 날려 부모의 명성을 드러냄이 효의 마침입니다. 부모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자녀가 건강하게 자라서 출세하고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효경에서는 말합니다.

 

자녀가 건강만 하면 됩니까? ‘개구쟁이라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는 광고문구가 있었습니다. 말이 그렇지 건강한 게 공부 못해보세요. 그것도 많이 속상해요. 그래서 부모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는 매일 아픈데도 공부 잘 하는데 넌 뭘하냐?”. 부모를 기쁘게 한다는 것은 어느 하나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때가 어느 때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세 가지 잃은 것에 대한 비유입니다. 양을 잃은 목자의 비유, 동전을 잃은 여인의 비유 그리고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세 비유의 공통점은 다시 찾아 돌아올 때 주인은 기뻐하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찾고 관계가 회복될 때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 죄를 짓기 전에는 관계가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때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때입니다. 죄를 짓기 이전의 온전한 상태를 보세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심히 좋았더라”가 반복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된 상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상태입니다.

 

인간이 언제 하나님을 슬프게 하였습니까?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불순종하여 먹었을 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과다한 욕망은 하나님과 분리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게 된 다음부터는 적극적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한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창세기 6:6에는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동물 지으심을 한탄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와를 꼬이고 죄를 짓게 했던 뱀을 하나님은 저주는 하셨지만 한탄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한탄하신 것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하나님과 대화하게 사람만이 유독 하나님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심하게 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동물에게 한탄하지 않으셨습니까? 동물은 그냥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동물은 자신의 의지로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사람만이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하므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을 기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시편 37:4에는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Delight thyself also in the Lord’(KJV), ‘여호와 안에서 기뻐하라’, ‘여호와와 함께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떠난 기쁨,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은 기쁨은 참 기쁨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영혼이 스스로를 위해 하나님을 기뻐하는 행위요 동시에 하나님을 위해 내 자신과 내 이웃을 기뻐하는 행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감사하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항상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급에 가서 갖은 고생 끝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얼마든지 형들을 원망할 수 있겠지만 요셉은 창세기 45:8에서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죽을 뻔하고, 팔려가고, 종살이하고, 옥살이하고, 온갖 고생을 다 했지만 형들을 원망하지 않고, 형님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애급에까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당대에 의인이었고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그 많은 재산, 자녀, 건강 다 잃고 병들었지만 욥기 1:2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22절에는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욥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였습니다.

 

시편에 보면 “여호와를 기뻐하라”,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하라” 등의 말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참 기쁨입니다. 세상에서 우리의 일들이 설사 잘못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기쁠 일이 없어도 기뻐해야 합니다. 윌리엄스는 ‘기뻐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한번 웃어보세요. 분명히 기뻐질 것입니다. 기뻐할 일이 없지만 하나님을 생각해 보세요. 분명히 기뻐질 것입니다.

 

올 한해에도 기쁜 일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기뻐합시다. 기뻐하면 좋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2세기의 ‘디오그네터스 서신’이란 글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했지만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모든 것에 풍성했다. 그들은 학대당했지만 학대하는 사람들을 축복했다. 선행을 베풀었지만 행악자로 처벌받았다. 처벌받는 가운데 새 생명을 얻고 기뻐했다”. 환난과 핍박이 그들의 상황이었지만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성도들이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에는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왜 기뻐합니까? 하나님의 평강 때문에 기뻐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슬퍼하실 일을 하면 하나님이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기뻐하실 일을 하고,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 일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39에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둥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일은 아버지의 뜻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독일 나치에 의하여 희생된 600만 유대인을 추모하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야드바심’이란 이름을 가진 기념관입니다. ‘야드바심’이란 기억이란 말입니다. 결코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오스카 쉰들러의 묘도 있습니다. 오스카 쉰들러는 유대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인이지만 이 기념관에 묘가 있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는 700명의 유대인을 구출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쉰들러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려고 자신들의 이름을 서명한 편지을 전해주면서 반지 하나를 선물했습니다.


반지 표면에는 탈무드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한 사람은 전 세계를 구한 것이다”. 공장 주임에게 쉰들러는 “좀 더 살릴 수 있었는데”를 반복합니다. 탈수 있는 자동차를 가리키면서 “저거면 열 사람은 더 살릴 수 있었는데”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금 넥타이핀으로는 독일군을 매수하여 두 명을 풀어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소중한 것은 돈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뜻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은 온 율법의 완성이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영국 출신의 두 육상 선수인 에릭 리델과 해롤드 아브라함을 다룬 영화 ‘불의 전차’가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육상을 사랑했지만 그 방법은 서로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인가 쫓기면서 달렸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의무감에 사로잡혀 재미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반면에 리델은 육상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내가 달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같아”라고 늘 얘기했습니다.


리델은 자유라는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리델이 달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아브라함은 “저 친구는 야생동물처럼 달려. 저 친구를 보면 기운이 빠져”라고 중얼거렸습니다. “목표점을 향해 달리는 힘이 어디에서 오냐고? 그야 내면에서 오는 거지”. 리델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으로 달렸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달리는 사람’(God's joyful runner)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후에 중국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1944년 일본군 치하의 한 수용소에서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난 다음에 그의 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결코 마지막 만남이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삶을 산 사람이었고 그의 아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결론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지겨움이나, 힘든 일이나, 짜증스런 날이 없습니다. 2010년 365일을 하루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기뻐합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을 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100108익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