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막 같은 교회(눅10:30-37)
30.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
31. |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32. |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
33. |
34. |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
35. |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
36. |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37. |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서론)
1. 오늘 읽은 성경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사실 앞부분인 25~29절을 먼저 읽어야 하는데, 본문이 좀 길어서 지금 좀 더 소개해 읽어 드리고자 합니다.
25. |
26. |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
27. |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
28.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
29. |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
라고 했을 때, 참된 이웃이란 누구인가를 예수께서 설명하는 내용이 오늘 읽은 말씀의 내용입니다.
본론)가)교회와 주막의 공통점
1. 본문 34절 이하에서 주막(酒幕)이란 단어는 본문에서 두 번 나옵니다. 영어성경에는 KJV나 NIV에서 모두 같이 Inn으로 나옵니다. 곧 작은 마을의 여관 혹은 요즘 미국식으로 허름한 시골 모텔 같은 곳입니다. 굳이 한글 성경에 주막이라 번역한 것은 주막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는 외딴 여관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거기선 숙소도 제공하고 술도 마시고 식사도 하며 쉬어 가는 장소입니다.
2. 옛날 사람들은 10~20 마일 정도의 길은 대부분 걸어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광야에서는 더울 때는 땀을 식힐 수 있고 추울 때는 몸을 녹일 수 있는 주막이 길가에 종종 있었습니다. 옛날엔 광야 길 여행에서 대부분 쉴 만한 곳은 흙이나 돌로 다소 엉성하게 담을 쌓아놓고, 야생동물의 공격이나 피하면서 지붕도 없이 쉬는 쉼터가 꽤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허름한 여관이나 주막 같은 곳이라도 만나면 너무도 반갑고 고마운 일이 되는 것이지요. 본문에서 주막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3. 저는 오늘 교회란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교회란 바로 이 성경에 나온 주막 같은 곳이어야 한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4.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당시 주막은 어디 있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있습니다. 사실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목이지요. 영적으로 예루살렘을 천국에 비유하고 여리고를 세상에 비유한다면, 교회의 위치는 천국과 세상의 중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주막은 누구를 위해 있습니까? 길가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쉴 수 있는 곳입니다. 마른 목을 축이며 피로를 풀며 허기를 때우는 곳입니다.
교회 역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인생의 나그네들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막은 길가는 나그네가 잠깐 쉴 수 있는 곳이지, 오랫동안 살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교회도 역시 성도들이 영원히 거하는 곳은 아닙니다.
나)강도 만난 이웃 같은 세상
1. 오늘 본문에는 강도와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세상엔 참으로 악하고 양심이 없거나 비뚤어지고 자기 욕심만 챙기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약하고 착한 사람들이 강도질 같은 일들을 종종 당하게 됩니다. 양순한 사람들이 악인들에게 물질을 빼앗기고, 마음을 빼앗기고 건강을 빼앗기고, 생명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합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도 나중에 알아 보니 바가지를 쓴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속이 상할 때가 많지요. 미국 이민 사회에서도 본의 아니게 법을 잘 몰라서, 벌금을 맞고 손해를 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말이 잘 안 통해 그냥 손해보고 말자 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민 생활이 어렵다는 거지요.
2. 성도들도 예외없이 강도 맞은 것처럼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강도 만난 사람은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했는지 몹시 두들겨 맞고, 거의 죽은 것처럼 되었다 했습니다. ‘거의 죽게 된 사람’을 사마리아 사람이 주막으로 데리고 와서 주막 주인에게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주막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아 주었던 곳’입니다.
결국 교회의 역할은 바로 이런 점과 유사한 기능이 있습니다. 주막과 같은 교회는 강도 만난 사람, 삶의 소망이 없는, 어쩌면 거의 죽게 된 사람들을 돌보아 살려주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본문에서는 강도 말고도 두 종류의 사람이 더 나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직분의 사람이라 피 흘리는 부정한 사람을 돌봐주기에는 너무나도 고상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레위인도 제사장 가문에 속한 사람들로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거룩한 삶을 살기에 힘쓰는 지파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섬기는 일이 누군가를 돌보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 습니다. 하나님에겐 잘 하였으나 사람에겐 잘 못 한 사람들이었죠. 정말 누군가를, 두 팔 걷어 붙이고 돌보아 줄 만한 훌륭한 지위와 품격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그냥 피하여 가버리고 맙니다. 세상이 냉정한 이유가 다 있습니다. 이런 실망스럽고 안타까운 일들이 세상엔 너무도 많습니다.
4.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주막 주인에게 강도 만난 사람을 데리고 와서, 그 다친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했고, 또 주막 주인에게 환자를 돌보아주면 그만한 대가를 더 치루어 주겠다 합니다. 사실 자기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위해서 그런 희생을 기꺼이 치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관 주인도 꽤 순박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웬만하면 “왜 하필이면 우리 여관이냐? 다른 곳에나 가봐라. 귀찮게 하지 말라. 라며 거절했을 텐데, 그리 하지 아니하고 두말없이 환자를 거두어 준 것입니다. 여관 일도 바쁜데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할만하였지만 여관 주인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삭막한 세상을 아름답고 정답게 만들어 줍니다.
다)선한 사마리아 사람 같아야 할 교회
1.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소위 경건한 이스라엘인들이 싫어하는 동족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란 바로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130여 년 간을 점령 당했을 때, 앗수르 사람들 사이에 대부분이 혼혈이 된 북부지역 유대인들입니다. 곧 순수한 유대인 혈통이 망가져버린 거죠. 그러다 보니 왕따를 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이 배척하는 그런 부류의 사마리아 사람들 중 하나가 자기들을 배척하는 유대인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푼 것이지요. 참으로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워해야 할 사람을 사랑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기 힘쓰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무엇인가를 받기 위해서만 나오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릴 때 더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사실 교회는 돌보아 주고 섬기는 장소입니다. 드리고 나눠주고 베풀고 격려하는 장소입니다. 고로 성숙한 성도, 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는 주막집 주인 같이, 또 선한 사마리아 사람같이 힘없고 어린 영혼들을 돌보는 성도입니다.
3. ‘닉 부이치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팔도 다리도 없이 태어났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닉은 어려서부터 넘어졌을 때 부모가 일으켜 주려고 하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고, 스스로 일어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는 팔 다리가 없었지만, 자기가 스스로 일어날 수 있어야만 앞으로도 이 세상을 당당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누구의 도움도 받기를 거절하였답니다. 그래서 몸뚱이를 이리저리로 마구 굴리고 머리를 벽에 붙여 밀고 해서, 수없이 넘어지고 몸의 여기저기 깨어지고 종종 피투성이가 되도 자기 스스로 일어났던 것이지요. 그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세계 많은 사람이 용기를 다시 갖게 되고 그들의 고통스런 삶이 격려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만약 ‘닉 부이치치’가 받기만 하는 사람으로 살았다면 지금 즈음 그는 매우 불행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4. 한번은 허 목사란 분이 다른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이 약40여명이 모여 예배를 드릴 때 설교할 순서가 되었습니다. 설교를 할 때 제일 힘들고 어려운 대상은 목사님들 앞이라고 합니다. 목사들은 모두 설교라고 하면 박사들인데, 그 앞에 설교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3:30에서 침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한 말씀을 중심으로 ‘침례 요한의 목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답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목사가 좋은 교회, 좋은 성도를 만나 어려움 없이 대접받아가며 교회를 크게 성장 시키고, 은퇴 후에 공로 목사가 되어, 죽을 때까지 안정적으로 생활비를 받는 목사를 성공한 목회자라고 한다면, 어려운 교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목회지에서 쫓겨나 서 방황하는 목사들은 갈 곳이 없어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게 되는데, 나이 들어도 누구 하나 돌보아 주는 이 없는… 그런 목사는 실패한 목회자냐? 고 하는 전제를 먼저 말하면서, 그럼 침례 요한은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만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 자신이 침례 주어 제자 된 무리들을 결국 예수님께로 다 넘겨 주었으며, 그 후 옥에 갇혔다가 결국 간교한 공주 ‘살로메’의 요청에 의해 목 베임을 당했으니, 그를 실패한 목회자라 할 수 있느냐? 는 내용의 설교를 했답니다.
예수께서는 침례 요한을 지극히 큰 선지자라고 하셨다는 것이 믿을만한 사실이냐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 앞에서의 성공은 결국 무엇인가를 많이 받기 것보다는, 많은 것을 아낌없이 드림에 있다는 것을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씀이지요?
5. 동식물의 세계는 ‘베풂의 원칙’으로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고추 한 포기를 보면, 아주 작은 씨앗에서 많은 고추를 맺어 사람에게 줍니다. 고추는 자신만을 위해서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을 사람들에게 빼앗기더라도 무성하게 자라 가지가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추를 열리게 합니다.
물고기들 역시 수많은 알을 낳지만, 95% 이상을 다른 고기들의 먹이로 주고 매우 소수의 몇 마리가 자라서 종족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거북이 알도 부화되면 새끼들이 바다로 깊이 들어 가기 전에, 이미 갈매기나 다른 큰 물고기들에게 대부분 잡혀 먹히고 만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번성하고 또 새끼를 많이 낳습니다.
베풀지 않는 맹수 같은 종류는 거의 멸종이 되었지만, 베풂을 많이 하는 종류는 더욱 좋은 종자로 육성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교회도 베풀지 않으면 성장이 멈출 뿐 아니라, 머잖아 존재 자체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결론)
1. 고로 교회는 상처 받은 영혼들이 고침을 받고 즐거워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는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이 행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다시 주막을 떠나 나그네 길을 가볍게 떠나 가듯이, 우리 교회도 온 성도들이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선한 사마리아인과 인간미 넘치는 여관 주인의 베풂 같은 축복을 주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오늘은 여러 집사님들과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등의 교회의 여러 직분 임명장을 나눠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아가 임명장이 있건 없건 우리 모두가 드리고 베푸는 성도 본연의 삶을 더욱 살기 힘씀으로써, 좋은 주막 같은 교회의 역할, 성도의 역할, 그리고 하나님의 일꾼들의 역할을 잘 감당해 내야 되겠습니다. 그리해서 훗날 우리 주 예수 앞에 설 때, 예수님께로부터 그것이 칭찬거리가 되고 크고 아름다운 천국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모두 힘을 합해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가 주시길 거듭 당부 드리며,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할렐루야!
(참고: 허창수/편집: 익선 02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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