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메시야의 눈물(마26:36~46

호걸영웅 2016. 4. 13. 22:47

메시야의 눈물(26:36~46)         93,98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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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시대적으로 훌륭한 영웅이 갖는 공통점이 있다면,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정의감, 단호함, 그리고 굽힐 줄 모르는 불굴의 의지, 어떤 난관에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투지, 당당한 기풍과 같이 범인들이 갖지 못하는 그런 용기일 것입니다.

 

2. 안중근의사를 주인공으로 다룬 ‘영웅’이라는 뮤지컬을 보면, 안의사가 사형 집행 중에 일본군과 당당하게 맞서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라고 합니다.

안중근은‘누가 죄인인가! 모두들 똑똑히 보시오!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는 무죄, 이토를 쏴 죽인 나는 사형! 대체 일본법은 어찌 이리도 엉망이란 말인가!’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3. 몽고의 지도자였던 징기스칸도 손으로 꼽히는 영웅 중에 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내 나라는 병사로는 어린애 10,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가히 그는 역사에 남는 영웅적 존재감을 남긴 사람이 되었습니다.

 

4. 우리가 기억하는 영웅들은 대부분이 강인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유약함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습니다. 위인전 어디에도 약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도 연약한 육체를 가진 인간이었을 텐데도 어찌 이렇게 강한지 존경 받을만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건지, 능력 많으신 우리의 메시아요, 아들 하나님 예수께서 눈물을 종종 흘리시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으니 그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공생애 때도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던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도 우셨고, 훼파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고, 오늘 본문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통곡하며 우셨습니다.

 

5. 그런데 이사야도 메시아의 연약함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53에서 보면‘그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홍해바다를 두 갈래로 가르시고, 불 병거와 불 말로 엘리야를 휘감아 산채로 하늘로 들어 올리시고, 짐작하건대 애굽의 군대 수만 명을? 순식간에 바다에 수장 시키신 분이십니다.  또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반역했던 고라 자손을 땅 속으로 지진을 일으켜 한번에 삼키게 하신 참으로 강력한 하나님이셨건만!

이런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아버지처럼 위풍당당한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이에 대하여 아주 명쾌한 답을 우리에게 해줍니다. 예수는‘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고난을 받으신 이로되~’라고 (4:15)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연약하게 오신 이유는 ‘연약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였 던 것이죠.  죽임 당할 어린 양 곧 희생제물로 오셨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이런 이유 하나 때문에 낮고, 미천하게 취급 당하시고 버림받은 자가 되어, 십자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7절에 보면, 잡히시던 그날 밤에 겟세마네로 향하시며 참담했던 주님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라고 했고,  38절에는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셔야만 했을까요? 두 가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본론)

) 메시아 는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고난의 자리로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1.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의 말씀도 매우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3 1절은‘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2. 사실 예수님은 그 전에 기도하시기를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고, 그날 새벽에 제자 유다의 배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음까지 이르는 6시간의 긴 고통 중에도 잠잠히 침묵하셨습니다.  이사야서에 있듯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양같이 잠잠하였  도다’라고 한 바 대로 되었습니다.

 

3. 죽음 앞에서 의연했던 예수는 겟세마네를 통해서 변화된 것입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사,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외치며 심한 통곡과 눈물로 밤을 꼬박 새운 결과였습니다.  마음에 준비가 끝난 것입니다.

 

4. 영국 신학자 ‘제임스 스튜어트’는 그리스도의 고민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수의 괴로움은 그의 죽음을 무서워해서가 아니었다. 예수로 하여금 이렇게 안타깝게 부르짖게 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였다. 모든 세상의 수치와 모든 인간의 짐이, 죄 없이 결박 당하신 주님으로 하여금 그 참담함을 맛보게 했다. 죄악의 차디찬 공포, 그 지긋지긋한 모습,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반역, 이것들이 주님을 괴롭힌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절규하며 통곡하셨을 때, 같이 올라간 제자들은 돌 던질 만큼의 몇 십 미터의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어느 제자도 그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5. 극한의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예수님은 사망의 저주와 사투를 벌이셨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 메시아가 흘린 눈물은 갈보리 보혈과 같습니다.

1. 신학자 캐논 리돈(Canon Liddon)은 말합니다.

우리가 겟세마네를 잊어버리고 갈보리만을 기억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영혼은 무섭게 투쟁하고 있었다. 이 투쟁은 이곳 지상에서 하잘것없는 인간 생명이 몇 주 또는 몇 년 연장하느냐 하는 문제의 투쟁이 아니었다. 고 했습니다.

 

2. 시편기자도 겟세마네의 순간과 비슷한 체험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나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1~)’라고 했습니다.

 

결국 겟세마네의 소망은 하나님 아버지였습니다. 그분의 뜻을 겸허히 이뤄드리는 것으로 결론을 맺게 됩니다.

 

3. 적막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울려 퍼진 메시아의 눈물의 기도는 바로 우리자신이 맞닥뜨렸어야 할 슬픔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토록 처절했던 예수님의 거룩한 고통을 나눠 가졌어야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잠시도 깨어있지 못했던 무력한 모습들이 곧 우리의 모습은 아닐런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결국 메시아가 흘린 피눈물은 곧 십자가 밖에서 흘리신 구속의 보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골고다에서 흘리신 보혈이 어린양 순종의 표적이라면, 겟세마네에서 쏟으신 눈물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극진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님의 사랑의 표적이라 하겠습니다.

 

결론)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리셨던 기도의 눈물은 바다 같은 사랑이 되어 우리를 긍휼의 사랑으로 덮으셨으며, 골고다 십자가에서 강물처럼 흐르는 보혈이 우리의 죄악을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절실하게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겟세마네의 눈물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기도, 통곡의 기도, 눈물의 기도입니다.

우리들도 죄로 죽어져 지옥으로 빠져드는 안타까운 영혼들을 향해, 간구와 통곡의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는 더욱 아름다운 믿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235

 

참조:울림의 소리/편집:익선 03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