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은혜로 말미암아 <By grace alone>(엡 2:1-10)

호걸영웅 2017. 6. 15. 03:13

은혜로 말미암아 <By grace alone>( 2:1-10)

 

한 노예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싼 값에 노예들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동정'이나 '사랑'이란 단어는 사치스러운 감정에 불과했습니다. 주위에서는 그를 '냉혈인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마음속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죄악 된 삶을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됐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권위의 상징인 목사의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항상 노예복을 입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노예들을 파는 죄인이었던 나를 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맙기 때문에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노예복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이 목사의 이름은 존 뉴턴 (John Newton)입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지은 목사입니다. 1절은 이렇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의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노예를 팔았던 죄인, 인신매매였습니다. 그런 죄인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된 다음에 고백합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은혜는커녕, 심판을 받아야할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었고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곳에 은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장 8,9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그 은혜를 받는 방법이 믿음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기본적이면서도 많은 경우에 이해가 부족한 한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들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다고 목소리를 높여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면서도 많은 경우에 은혜가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묵상해도 가슴 벅찬 말씀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편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두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공로가 조금도 개입될 여지가 없다는 사실과 그만큼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홀로 행하신 일이기에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끝까지 책임지실 것을 확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헌신적인 교인이 죽었습니다. 그가 천국 진주 문에 도착하자 이런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입장료 1000원.” 어떻게 입장료를 낼까 고민하는데 저 앞에 사도 베드로가 보였습니다. 그가 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님! 저 한국에서 왔는데 죽기 전에 돈을 세상에 다 놓고 왔어요. 어떻게 천원을 벌지요?”

그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자네가 세상에 살 때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돈이 자동적으로 매겨지네.” 그 말을 듣고 그는 얼굴을 활짝 피며 말했습니다. “그래요? 저는 32년 동안 교회를 다니고 지난 14년 동안은 주일예배를 한번도 빠지지 않았고, 12년 동안 주일학교 교사를 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훌륭해! 이제 1원 벌었네.”

 

그 교인은 계속 말했습니다. “사도님! 저는 십일조 생활도 철저히 했고, 장로와 재정위원으로 있으면서 재정도 관리했고, 교회 건축할 때는 건축헌금도 많이 했습니다. 또한 성찬식을 할 때는 목사님을 도와서 떡을 나눠주는 일도 했고요.” 그 말을 듣고 베드로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했네. 이제 1원 더 벌었네.”

 

그렇게 열심히 헌신한 기록을 들어도 겨우 2원밖에 벌지 못한 것을 알고 그는 식은 땀을 흘리며 계속 말했습니다. “사도님! 저는 교인들을 최선을 다해 섬겼고,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교와 구제에도 몸과 마음과 물질로 제일 열심히 참여했어요.”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정말 잘했네. 이제 1원 더 생겼네. 이제 총 3원을 가졌군.”

 

베드로의 말을 듣고 그는 근심하며 말했습니다. “사도님! 천국 입장료가 너무 비싸네요.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누가 거기를 들어가나요. 아무도 못 들어갈 거예요.” 바로 그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이제 들어가게. 하나님의 은혜로 자네의 부족한 997원이 채워졌어.” 결국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믿음에 관해 흔히 범하는 오해가 있습니다. 사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는 말은 기독교의 대명사처럼 들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습니까?”라고 물으면 “믿음으로요”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기도 합니다. 이때의 믿음이란 마치 구원이 전적으로 자신의 믿음에 달린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믿음 자체가 우리의 구원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열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이루시는 은혜의 사역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되는 구원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인 반응일 뿐입니다. 신학자인 피터 오브라이언 (Peter O’Brien)은 은혜와 믿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일반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이해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의 근거라면 믿음은 그것을 적용하는 수단입니다. 믿음 자체가 사람의 공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을 먼저 이해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죄와 허물로 완전히 죽은 사람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울부짖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진다 해도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구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죽은 자가 이런 것에 의존해 구원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믿음은 결국 그 사람의 공로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누구도 자랑할 근거가 없다고 다시 못 박습니다.

 

전도 현장에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이 주어지는 것처럼 이해시키려 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한 번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마치 구원이 기다렸다는 듯 떨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라도 입술로 고백하게 하려는 열정은 소중하지만 구원이란 사람의 입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알야야만 합니다. 이런 것은 본 훼퍼의 말처럼 소위 은혜를 ‘값싼 은혜(Cheap Grace)’가 되게 할 뿐입니다.

 

바울 서신에서 가장 사랑받는 말씀 중 하나인 오늘 본문은 타락한 인류를 오직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말씀에 속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인류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사랑으로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한 눈에 보여줍니다. 1-3절이 허물과 죄악 속에 살아간 인간의 모습, 즉 구원받기 전의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4-6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살리셨음을 강조합니다. 7-9절은 앞에서 말한 구원의 근거가 사람의 행위와 공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임을 다시 한 번 확증해 줍니다. 마지막 10절은 선한 일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우리에게 명확히 밝혀 줍니다.

 

본문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성도의 출생의 비밀은 다름 아니라 죽었던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인간의 조상이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죽음은 단절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났고 하나님은 화염검을 두어 에덴에 접근을 막았습니다. 이 때부터 인간은 죽은 존재입니다. 여기서 죽은 존재란 자연상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상태의 인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종과 종족들에게 나름의 종교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속에 남아 있는 종교성 즉, 절대자를 두려워하고 찾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 종교성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개도 원숭이도 없습니다. 오직 인간에게만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교성만으로는 절대자를 제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복음을 통해 자신이 찾고 있는 절대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7절“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일까요? 복음은 바로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복음이고 그분께서 행해주신 대속의 은혜 즉,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신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을 통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허물과 죄에 대해 다음 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여기서 그 때란? 예수님을 믿기 전을 말합니다. 그 때에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말합니다.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는 말은 죄 가운데 있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온갖 죄를 짓고 그 이유로 인해 죽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로마서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은 유대인 외의 사람들을 죄인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온갖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온갖 짐승과 동물의 모양을 만들어 놓고 신이라고 숭배하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하며 남녀 간에 바르지 못한 행실로 인해 죄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모든 불의, 악취, 탐욕, 악의가 가득하고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하며 수군수군하고 비방하며 교만하고 악을 도모하며 배약하고 무정하며 무자비한 삶을 살기에 죄인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형에 해당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로마서 2장은 유대인들도 죄인이라고 하는데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죄를 지었지만 유대인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음에도 죄인이라고 정의합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는 자가 의인이 아니고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함을 얻는데 그들은 율법을 받았을 뿐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3장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10절부터 18절까지 말씀에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23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3절에서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행하여 온갖 더러운 죄를 짓고 사는 자들에게 주어진 형벌은 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한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나는 것이 곧 지옥의 형벌을 받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지 않음이 나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 나면서부터 지옥의 형벌을 타고난 인간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4절과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인간에게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계속해서 말씀드렸지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 없으신 당신의 아들의 생명을 취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예고해 오신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하셨는데 이는 인간에게 죄를 짓도록 유혹한 뱀을 저주하시면서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 즉, 사탄을 벌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사탄에게 예고하신 형벌의 사건이 광야에서 한번 있었습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길로 인해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 죽게 했던 뱀의 모양을 놋으로 만들어 장대에 달게 했고 그것을 보는 자마다 살게 해주신 사건입니다. 이렇게 달린 뱀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을 물어 죽음에

이르게 했던 뱀이 심판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사망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것을 믿는 자마다 살 것이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뱀이 나무에 달린 것 같이 인자도 달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죽으심의 효력에 대해 히브리서 9장 25절부터 28절에서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라고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십자가 상에서 모두 사하여 주셨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게 된 것에 대해 우리가 읽은 5절에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죽으신 주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새로운 신분과 지위가 생겼습니다. 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 세워지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혀 주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는 아직 이 땅에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고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현재

의 삶에 대해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늘에 속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것들에게 대해 죽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성공과 명예, 쾌락과 정욕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란? 그것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자란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받을 자인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들을 “분토, 즉 똥”과 같이 여겼다고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기에 기꺼이 자신의 혈통과 학벌, 재산과 명예를 주저함 없이 버리고 예수님을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거룩한 삶에 대하여는 산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산자의 삶에 대해 7절부터 10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

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먼저는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 산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삶과 말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증거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억지로 등 떠밀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극히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해도 그들은 나가 이 소식을 전했던 것과 같습니다. 받은 은혜가 크고 감사한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그분을 증거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만큼 복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때 구체적으로 어떤 축복과 변화가 일어날까요?

 

1.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구원의 은혜(saving grace)’도 있지만 ‘지탱의 은혜(sustaining grace)’도 있습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지지해주시고, 뒤를 받쳐주시고, 삶을 지탱하게 하시고, 위로와 격려를 주십니다.

 

가끔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면 많은 사람들이 낙심합니다. 그러나 낙심하면 누구만 좋아합니까? 마귀만 좋아합니다. ‘낙심’은 사단이 제일 좋아하는 도구입니다. 그것만 사람의 마음에 잘 집어넣으면 어떤 사람도 쉽게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낙심은 마귀에게 성문을 열어놓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트로이의 목마를 기억하십니까? 그리스의 군대가 퇴각하며 전략적으로 남겨 놓은 목마 속에 그리스 병사들을 숨겨 놓았는데, 트로이 사람들은 그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 놓고 승리의 축제를 즐겼고 모두들 잠들어 있는 새벽에 목마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이 성문을 열어 트로이는 무너지게 되었던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낙심은 마귀에게 마음의 성문을 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마귀에게 당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문제보다 훨씬 크다고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워 낙심하지만 않으면 어떤 어려운 환경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2. 더욱 겸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3S’라고 합니다. 첫째는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의 은혜(saving grace)’가 있고, 둘째는 우리를 지탱하게 하시는 ‘지탱의 은혜(sustaining grace)’가 있고, 셋째는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결의 은혜(sanctifying grace)’가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변화된 성품 중의 하나는 바로 ‘겸손함’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자신을 높이지만 은혜가 충만하면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입니다.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상담학 교수도 부부싸움을 합니다. 많이 안다고 이해심이 넓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를 받아야 이해심도 넓어집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변화되지 않는 성격으로 고민합니다. 그 고민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은 더욱 은혜를 받는 방법입니다.

 

은혜가 있으면 인간관계도 잘합니다. 겸손하니까 누구나 환영하고 인간관계를 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겸손하면 힘든 자리나 힘든 길에서도 잘 견디고 결국 승리하게 됩니다. 은혜가 없으면 한쪽이 잘되는 것 같아도 다른 쪽에 꼭 부작용이 생깁니다. 반면에 은혜가 있으면 과정은 힘들어도 반드시 선한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3. 사명이 취미처럼 느껴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명’을 ‘힘든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명이 힘들게 느껴질 때는 대개 은혜가 떨어졌을 때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만 있다면 사명이 쉽게 느껴지고 더 나아가 즐거운 취미처럼 느껴집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 아내가 되기를 꺼려합니까? 고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갤럽연구소가 18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행복도 조사를 했습니다. 조사결과 ‘아이슬란드’사람들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추운 북대서양에 고립되어 사나운 바다와 싸워야 하고, 겨울에는 밤이 20시간씩 계속되며,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는 인구 30만여 명에 불과한 나라의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아이슬란드 대학교 (University of Iceland)의 사회학자 소르린드 교수 (Sociologist Thorlindsson)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행복의 비결은 생활의 안락함이 아니라 오히려 불편함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불편함 속에서도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환경을 즐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결코 안락함과 편안함에서 오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들지라도 그것을 즐기며 감사할 때 비로소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고등학생이 코카콜라 회사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바닥에 흘러내린 콜라를 닦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50개의 콜라 병이 든 상자가 터졌습니다. 아무도 이것을 닦아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검은 피부의 한 고등학생 소년이 바닥에 꿇어 앉아 콜라를 열심히 닦아내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자메이카 출신이었고, 가정은 항상 가난했고, 학교 성적도 하위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직했고 성실했으며 시련 앞에 용감했습니다. 결국 그 소년은 훗날,‘정직’과 ‘성실’과 ‘투지’를 바탕으로 미국의 합참의장이 됐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걸프전의 검은 영웅’인 콜린 파월 장군으로 미국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콜린 파월 장군은 그 비결을 간략하게 밝혔습니다. “역경은 사람을 강하게 만듭니다. 역경에 굴복하면 고난은 눈덩이처럼 커지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한꺼번에 왕창 쏟아지지 않습니다. 왕창 쏟아지는 장마비는 식물의 성장에 도움보다는 오히려 해가 됩니다. 오히려  꾸준히 내리는 가랑비와 이슬비가 식물을 성장시킵니다. 우리는 꼭 횡재를 노리지 말고 조용히 하나님의 은혜를 차곡차곡 받아서 누려야 할 것입니다.

 

기적은 누구를 좋아합니까? 기적은 놀면서 횡재를 노리는 베짱이보다 땀을 흘리는 개미를 좋아합니다. 너무 왕창 쏟아지는 장마비 은혜만 바라지 마십시오. 진짜 은혜는 현재 내가 할 일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에 대한 열린 시야를 가질 때 사명도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4. 진정한 행복을 알게 됩니다

 

은혜가 없으면 행복의 조건이 많아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지만 은혜가 있으면 행복의 조건이 적어도 행복을 느낍니다. 은혜는 불행을 행복으로 볼 수 있게 만들고 어렵고 힘들 때도 불평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게 만듭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우리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빚에 시달리고 있고,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가족들끼리 원수가 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통사고와 질병으로 죽고 식물인간이 되는지 모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 사람도 다 나름대로의 고민과 상처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며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 감춰진 은혜를 발견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는 복음 전하는 자인 것입니다. 이 복음증거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가 잠잠하면 그 일로 인해 수많은 영혼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는 영적기근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등불이 등경위에 놓여 그 방에 들어오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 그리로 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방향을 잃을 때 그 길을 찾게 하는 등불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성도들이 나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일이 당연한 것은 주께서 약속한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4장 60절에서 이제 이삭의 아내가 되고자 길을 떠나는 리브가에게 리브가의 가족들은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외치는 이들을 통해 음부의 권세 즉, 사탄의 세력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기는 성도들에게는 중요한 사명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바로 10절입니다. 이미 읽었지만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들의 사명은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이란 먼저는 복음전하는 것이요 나아가 이웃을 돌보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성도를 만드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선한 일을 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라고 한 바울을 5장부터 6장까지 선한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이름조차 부르지 않는 것”(엡5:3)입니다. 나아가 적극적인 선한 일에 대해 말하기를 아내들에게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고, 남편들에게는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했으며, 자녀들에게는 주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했고, 아비들에게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으며, 종들에게는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상전들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했고, 상전들에는 너희 상전이 하늘에 계신 것을 기억하고 위협을 그치라고 했습니다.

 

이 선한 일에 대해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라고 하나님과 사귀는 것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주께서 성도를 구원하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신 목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삶으로 음부의 세력을 멸하고 영혼을 구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4절은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인데 이 믿음은 사랑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워터타운 침례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들을 위해 죽으시고 그 죽음을 통해 생명을 주신 주님께 항상 감사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아가 우리를 모아 교회로 세워주시고 함께 주의 나라를 세워가며 주께서 맡겨 주신 일을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우리를 더욱 성도되게 하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선한 일을 하게 하려는 것임을 깨닫고 선한 행실과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나아가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061117. 방석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