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갈에서 세운 스물네 돌(수4:1~9)
서론) 1. 몇 년 전의 전 세계 24개국에서 베스트셀러였던 존 맥스웰의 “사람은 무엇으로 성장 하는가”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제15장 공헌의 법칙에 보면 “인생의 흔적 남기기”란 항목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단지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을 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저자인 존 맥스웰은 그가 40년 전, 인생의 성장 여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처음에는 성장 동기가 이기적이었다고 합니다. 오로지 성장해서 성공하겠다는 생각 밖엔 없었다 했습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이루고 싶은 목표, 세우고 싶은 업적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만한 깨달음, 즉 “내가 성장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성장의 문이 열린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성장하면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의 성장은 단순히 자신만의 성공만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웃들에게도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성장을 통해 거기에서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을 찾은 것입니다.
또 존 맥스웰은 1998년, 51세 때에 심장마비가 왔을 때, 그는 생사가 불투명한 상황이 었지만 죽음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했다고 합니다. 오직 고통 속에 누워 있던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두 가지 생각뿐이었답니다. 하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주고 싶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직도 이루고 싶은 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답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공헌하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쉰한 살에 죽기에는 인생이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힘 있게 자신에게 스스로 말했습니다. “저수지가 아닌 강물이 되자”고!
대개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성장에만 주력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물을 받아들이지만, 받아들이고 계속 고여 있기만 하면 저수지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강물은 계속해서 “흐릅니다.” 물이 어디서 들어오면 강물은 그대로 계속해서 아래로 흘러 내려 보냅니다. 사람은 그런 자세로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어떤 가치가 있는 인생이 될 것인가”를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속한 가정뿐 아니라, 이 지역사회와 나라와 인류를 위해 어떤 공헌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기도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2.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존재에 대한 흔적을 남기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기록하고, 책을 쓰기도 하고, 일기를 쓰기도 합니다. 왜요?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작은 역사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의 역사의 일부를 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 여러분이 잘 아시는 토인비라는 역사학자는 이스라엘 역사를 가리켜 “경이로움이며 기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수 천 년 동안 흩어진 사람들 곧 디아스포라로서, 나라 없이 유랑하면서 흩어져 쫓겨 다닌 고난 속의 민족입니다. 그러다가 그 민족이 근대사에서 시오니즘을 기치로 하여, 옛 조상들이 살던 고토로 돌아와 국가를 건설하고 독립을 이뤄내었습니다. 한마디로 경이로움이며 신비로움이죠. 또한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미국의 핵심세력 안에 유태인들이 있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입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40%가 유태인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그들은 그들의 역사의 정체성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수 천 년의 역사가 흐른 이 시점에도 다시 응집력을 가지고 모여서, 독립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저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역사가들은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고, 둘째는 그 신앙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아주 고유한 집념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남은 인생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우리의 역사에 무엇을 준비하고 남길 것인가? 를 생각하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본론) 가)먼저 역사를 읽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1. 본문 1절을 보면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가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이 말씀 이전인, 앞 장, 3장 15절에 보면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쌓이고,,,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라고 했습니다.
백성이 바로 건 널새,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그 당시가 바로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창일하게 물이 넘치는, 범람하 던 때였습니다. 그런 물이 넘치는 시기에도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기적의 역사를 베푸셧고 당신의 백성들의 앞길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넘치는 물을 마르게 하시고, 메마른 땅으로 건너가게 하신 것입니다.
2. 요단강을 건너는 백성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두렵기도 하고,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그 영광스러운 속죄의 피가 뿌려진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강을 건넙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다 건넌 후에 여호와께서 명령하십니다. 그들이 유숙할 곳, 곧 길갈에 열두 지파가 강에서 어깨에 메고 가져온 열두 돌을 가져와서 기념비를 세우고, 또 열두 돌을 강물 속에다가도 세워두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음 세대가 이 기적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물이 넘칠 때든 가물어 강물이 마를 때든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 능력과 그 인도하심과 그분의 살아계심을 기억하라는 것이죠.
‘길갈’은 요단강에서 약 3.2km 떨어진 곳입니다. 아마도 기적을 기념할 돌은 사람이 어깨에 메고 나올 만한 15~20 킬로그램 정도의 바윗돌들로 예상됩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야 할 역사인식을 보게 됩니다. 우리에겐 개인의 역사가 있고 사회와 민족의 역사가 있습니다. 역사인식이 없이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게 되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바로 보는 “현미경”의 안목도 필요하지만,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망원경”의 안목도 필요한 것입니다.
고로하나님께서는 “길갈에 세운 돌들을 보며 요단 강물을 어떻게 끊으셨는가? 하나님이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게 하셨는가”라고 하는 상징물을 통해 후손들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게심과 일하심을 후대에 전수하는데 더욱 힘을 써야만 합니다. 믿음을 반드시 힘써 전수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대에서 믿음이 끝날수는 절대 없습니다.
둘째는 요단강 중심에 세운 열두 돌입니다. 본문 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말씀합니다.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는 강 바닥에서 열두 돌을 가져다가 길갈에 세운 후에, 요단 강바닥에다가도 열두 돌을 세우도록 한 것입니다. 결국 두 장소에 기념비를 세우라 하신 것입니다. 강 물속에 세운 기념비는 결국 물에 잠기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까지 거기 있더라”는 말씀은 그 의미의 영원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복사판 같은 두 개의 돌 비가 양쪽에 세워지도록 했을까요?
중요한 표현으로 강바닥 돌을 세울 곳을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이라고 합니다. 언약궤는 속죄하시는 어린양, 즉 아들 하나님 예수를 상징하고, 열두 돌은 열두 지파, 즉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죽음과 함께 죽음을 경험한 열두 족속과 구원으로 나아온 상지으로서의 열두 돌을 세우라 하셨던 거죠.
결국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과 지나 온 곳 모두에 스물네돌이 세워집니다. 우리의 죄악을 위해서 피 흘린 어린양과 함께 장사 지낸바 된 사건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곧 침례를 의미합니다.
셋째, 마지막으로는 이 시대의 우리들의 사명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5장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길갈은 “굴러가 버렸다”는 뜻입니다. 길갈에서 노예로서의 옛 삶과 죄인으로서의 정욕과 수치와 부끄러움과 이생의 자랑과 어둠이 다 굴러가 버렸다는 뜻입니다. 길갈은 모든 과거의 불행과 죄된 삶은 굴러가 버리고, 다시 사는 새생명의 자유와 구원하심, 그리고 부활을 상징합니다.
우린 오늘도 길갈의 의미가 바로 우리에게 임했음을 기뻐하고 또 감사 감격해야 합니다. 과거의 나의 불순종의 삶과 부끄러웠던 삶과, 불신앙의 수치스러운 삶들은 어린양 예수의 은혜로 굴러가 버렸고, 그리고 이제 예수의 부활하심을 힘입어, 새로운 길갈의 역사가 우리에게 임했음을 찬송하여야만 합니다. 문제에 매여 있어서만은 아니됩니다.
결론) 길갈은 당시 새로운 가나안의 역사를 시작할 수 있었던 자리였고 또 여리고의 난공불락을 점령하기 위해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었던 장소였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새롭고 위대한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길갈의 믿음으로 한걸음씩 한걸음씩 전진하며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써 나가야할 새역사를 우리의 가정과 지역사회와 미국과 세계 곳곳에서, 모두 함께 힘을 합쳐 써 나아가야만 하겠습니다.. 이것이 곧 이 시대에 우리 교회와 우리 모두의 사명인 줄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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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717 안익선 목사/참고: 양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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