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대강절을 맞는 자세(벧후 3:8-13)

호걸영웅 2018. 1. 5. 03:27

대강절을 맞는 자세(벧후 3:8-13)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하늘 을 바라보도다

 

 

서론)

1. 대강절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강절이란 단어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대강절은

대강절(待降節, Advent)은 대림절(待臨節) 혹은 강림절(降臨節)이라고도 하며, '왔음', 혹은 '도착'을 의미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된 말로, 이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을 뜻합니다.

대강절은 성탄절 전의 4주간을 가리키며, 세상에 메시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앞서 그의 오심을 기념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성탄절을 준비하기 위한 기간입니다.

2. 성경에는 끊임없는 두 가지의 기다림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구약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라면, 신약은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에 대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3. 사실 어떤 측면에서는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하루하루의 일상에는 작은 기다림이 있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 길게 늘어서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퇴근 시간에 맞춰 따뜻한 저녁을 준비하는 사람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또한, 꿈을 이루기 위한 인생 설계에는 기다림이 있고, 추수를 기다리는 농부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밤잠 설쳐가며 공부하는 학생들의 마음에도 성공을 향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네 인생에는 크고 작은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4. 그런데 이런 기다림에도 기쁨과 행복으로 기다리는 사람과 두려움으로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곧 종말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이런 기다림은 피하고 싶은 끔찍한 기다림일 수 있습니다.

불행한 기다림은 이러 것들이죠. 갚을 길 없는 가난한 자가 빚 청산의 마감 날짜가되어 빚 받으러 오는 사람을 기다림은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심한 통증을 견디며 초조하게 수술 시간을 맞이하는 그 기다림은 그 자체도 두려움입니 다. 사형 집행 시간을 맞이하는 사형수의 그 기다림도 그 자체가 절망입니다. 우리

인생에 이런 기다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본론)

)신앙은 곧 기다림이다

1. 신앙도 기다림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보면 참 많은 기다림의 이야기 입니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실 때, 처음으로 택하신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의 나이 75세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그는 자신이 살던 땅과 아비 친척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오랜 시간의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100세가 되어서야 부르심을 입고 25년이 지나서야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리라는 약속의 씨앗 ‘이삭’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이삭을 얻고 난 후에 400년이 훨씬 더 지나서야 큰 민족을 이루고 출애굽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애굽을 떠났습니다. 홍해를 건넜지만, 광야에서 40년을 더 기다리며 훈련의 시간을 지나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수없이 많은 일을 경험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3. 어느 날 다윗은 양을 치다 말고 선지자 사무엘에 의해 미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죠. 그런데 그가 왕이 되기까지는 1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기다림의 시간 동안 무명의 목동으로 자신의 양을 쳤고, 그가 장군이 된 후에는 시기하 는 왕 사울을 피해, 광야를 숨박꼭질하듯 도망치며 목숨을 구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다윗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드디어 왕이 됩니다.

4. 문제는 이 기다림의 시간이 무척 힘들고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기다리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 본문 8~9절을 보세요.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쓸 때의 상황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당시는 박해시대입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 동안에 악인들이 흥하고, 죄가 판을 치는데도 심판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악이 이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시간이 더욱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본문 9절을 보세요.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맞이한 대강절은 단순한 기다림의 의미도 있지만, 우리를 위해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는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5. 우리는 모두 서두름을 좋아하지만, 기다림은 많은 유익이 있을 뿐 아니라 깊은 뜻이 있기도 합니다. 서두름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기다림에 대한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자.
1.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가 기다릴 대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대상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다림은 지루함이 아니라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힘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바라보는 시간이기 때문이죠. 거기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0 31절의 말씀이 그런 의미일 것 같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여호와를 앙망한다.”라는 말은 New International Version에서는 “hope in the Lord”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다림은 지루함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여호와를 기다림이 새 힘을 얻게 합니다. 왜냐하면, 바라볼 때 희망이 샘솟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했어요. 그럼 기다림의 시간을 우리가 못 견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생각으로 날 수를 계산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온 우주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시간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우주적 관점’곧 하나님의 관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급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주적 관점의 기다림이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가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을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시간만 보내며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림의 시간을 축복되게 하려면?
본문 10~13절입니다.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며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했어요.

기다림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초대교회에서 박해를 받던 이들에게 이 기다림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A. D. 64
년경에는 그 유명한 네로 황제의 박해가 있었던 시기에 성도들은 참으로 힘겨웠습니다. 언제 붙잡혀 화형을 당할지 사자 밥이 될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로마의 카타콤에 가보면, 그 좁은 미로와 같은 지하 무덤에서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을 신앙을 지키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시간에 그들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렇지만, AD 313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면서 크리스챤 들에게 해방과 감격이 찾아왔었습니다. 기다림의 승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11절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라고 하십니다.
이제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베드로는 그 날을 사모하는 사람으로서 부족하지 않기 위해선 다음과 같이 준비하라 했습니다. 어떻게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며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그 날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은 그 날이 기다려지는 사람입니다. 경건한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볼 때, 대강절에 가장 중요한 핵심은 ‘경건’이라 하겠습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성경의 원어 ‘유세베이아’에 대한 번역입니다.
‘유세베이아’에서 ‘유’는 영어의 ‘well'이라는 뜻이고, ‘세베이아’는 ‘섬긴다, 봉사한다’(serve)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면 경건이란 “잘 섬긴다” 즉, 하나님과 이웃을 잘 섬기는 것이 경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경건의 사전적 의미는 ‘공경하고 마음으로 깊이 삼가고 조심함’입니다. 상당히 율법적인 사고입니다. 이러한 경건은 우리에게 엄청난 금욕을 요구합니다. 무엇을 하면 안 되는 율법적 규범이
경건으로 이해되면서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금기를 만들었습니다.

왕년에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드럼이나 기타 같은 것을 예배시간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교회에서는 뛰어다니거나 장난쳐서는 안 된다!
“주일엔 물건을 사서는 안 된다!”“교회에서는 청년들이 연애를 하면 안 된다!
얼핏 보면 맞는 말입니다. 경건을 율법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약1 26~27절을 보면 참된 경건은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1)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2)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경건은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먼저 악에서 떠나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악한 생각과 악한 말에서 떠나야 합니다. 인자와 자비를 드러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치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이웃과 기쁨을 나누고 우리 주변에 있는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예수를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고 놀라운 사랑의 마음에 품고 실천하며, 그분을 계속 바라보는 것이 바로 대강절의 요청입니다. 할렐루야!

120517 안익선 목사/ 참고:김병삼 & 노래하는 주의 자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