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마가복음 2장 강해 1/2부(1~17, 중풍병자의 치유와 레위를 부르심)

호걸영웅 2026. 7. 16. 04:11

마가복음 2장 강해 1/2(1~17, 중풍병자의 치유와 레위를 부르심)

서론)
오늘 본문은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단락 구분은? 1) 중풍 병자를 고치심(1~12), 2) 레위를 부르심(13~17) 등입니다.

본론)
)중풍 병자를 고치심(1-12)
(1,2)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수 일 후’= 1장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병든 자를 낫게 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피하여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다가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셔서 가르치시는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모여든 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도, 즉 진리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도’를 헬라어 원문에서는 ‘로고스’로 기록했는데, 이는 복음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때, 한 무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3, 4)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메워왔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로 도무지 다가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집 뒤로 돌아가서 지붕을 타고 올라가 지붕을 일부 뜯어내고, 그 구멍으로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며 예수님의 관심을끌게 됩니다. 병자를 살리려는 이 네 사람이 보인 행동은 그들의 간절함과 절박함을 잘 보여줍니다.

이들이 예수님께로 나아감에는 많은 사람들의 인파라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런 비슷한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는 사회적 냉대와 부끄러움이라는 장벽이, 맹인 바디매오도 마찬가지로 가로막던 수많은 사람들이라는 장벽이 예수님께로 나아감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유의 확신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그들을 마침내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서양 속담에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눈앞에 나타난 중풍병자와 그를 달아 내린 이들을 보시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동을 결코 책망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행동을 믿음으로 보셨습니다. 믿음은 단지 어떤 것을 확신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확신에 따라 포기하지 않는 행동을 포함합니다.

만약 이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며 쉽게 포기해버렸거나 내 일이 아니라며 모른척하였다면, 기적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절박함과 의지는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 사함의 선포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있어서 예수님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요, 죄로 인해 병이 발하였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6, 7)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때에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신성을 모독 하고 있는 자라고 생각하게 했습니다. ‘신성모독’으로 표현된 헬라어 원문은 ‘블라스페메이’입니다.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훼방을 받거나 모독되었을 때, 둘째는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영광이 사람에게 돌려지거나 우상에게 돌려지게 되었을 때입니다.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하신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에 대해서 어이없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저 단순한 한 인간이 어떻게 죄 사함에 대해서 선언할 수 있느냐며 비판하는 마음을 갖었습니다. 죄 사함의 선언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어찌 보잘 것 없는 인간이 그런 선언을 할 수 있겠는가! 라며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러자그런 서기관들의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하시게 됩니다.

(8,9)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님께서는 병의 치유를 죄 사함의 표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병이 치유 받았다고 해서 죄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병을 치유하시는 표적을 사용하셨습니다.

 

죄 사함의 선언은 그 효력을 당장 검증할 수 있는 길은 없지만,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명하는 것은 당장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참으로 놀라운 이적이며, 그 효력이 검증되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기가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할 때,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죄 사함의 선언도 능히 유효하고 남는다는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10~12)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님의 죄 사함의 선언이 정당하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권세를 받은 분이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시며 선지서를 통해 예언된 ‘인자 같은 이’가 바로 자신임을 암시하십니다.

참고로..(다니엘 7:13, 14)=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는 말씀을 봅니다.
이 구절에서 이 신적인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는데, 인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권세에 죄 사함의 권세가 있으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 사함의 은혜 가운데 임합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실 때 신성모독으로 간주될 위험을 감수하시면서도, 죄 사함을 선언하신 이유는 죄 사함의 사역이 바로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적 행위요 능력이고, 또 그로 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다시 바닷가로 나가십니다.

)레위를 부르심(13~17)
(13,14)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 신적 존재, 메시아임을 사람들이 알게 하시고, 또 다시 바닷가로 이동하셔서 큰 무리를 가르치십니다.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던 중,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 레위를 만나시고 그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당시, 세리는 기준 이상의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자기 몫으로 착복한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많은 미움의 대상이 되는 종류의 사람이요 직종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직책을 수락한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도 외면과 수치를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당시 동족으로부터 멸시당하고 죄인 취급당하던 사람을 회복하신 사건이기도 합니다. 레위는 “나를 따르라”라는 그 한 마디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반응합니다. ‘따르라’로 표현된 헬라어 원문은 ‘아코루세이’입니다. 이는 명령형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초청이나 권유가 아니라 행동의 개시와 지속을 원하는 명령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에게 복음의 길을 걷도록 부르셨고, 레위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지금 자신을 강권적으로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순종합니다. 그래서 지체함이 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전적인 순종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15,16)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했습니다.

레위는 큰 부자였으므로 많은 음식을 차렸고, 또 많은 사람을 초대하여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이 레위가 훗날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헬라식 이름;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로 그 이름이 바뀝니다(9).  외적 경건을 생명처럼 중시했던 유대인들은 레위와 같은 세리와, 율법 규례를 잘 지키지 않았던 자들을 죄인이라 부르며 경멸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거나 식사하는 것조차 치욕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경멸하지 않으시고 어울려 함께 식사하심으로써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자녀이며 구원받아야 할 자들임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신 까닭입입니다. 어찌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느냐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동시에 이 땅에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은 죄인들에게 있었습니다. 죄인을 불러 교제하며, 그들의 죄를 사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경험하게 하고, 또한 복음을 일에 참여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목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건강하다거나 의롭다고 여기며 당신을 외면하는 바리새인들이나 그와 같은 자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핍을 알고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부름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 역시 부족한 죄인의 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에 죄 된 본성이, 우리를 계속해서 범죄함 가운데로 몰아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매 순간, 우리의 힘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하루도 제대로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으니 그 부르심에 가난한 심령으로 응답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오늘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셨고, 레위(마태)를 부르셨고, 죄인들과 함께 잡수신 것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고치시고, 부르시고,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각이 어떤 사람이건, 어떤 문제를 안고 있건 개의치 않으시고 동행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도를 전하시는 일에 협력하길 원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초청과 사랑에 힘입어 우리이 크고 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으로 지켜 나가는 날마다의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070726 안익선 목사/ 참조: 김지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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