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죽이는 사람과 살리는 사람 (막 3:1-12)

호걸영웅 2007. 10. 25. 22:45
 

             죽이는 사람과 살리는 사람 (막 3:1-12)



   엘빈 토플러는 힘의 원천은 폭력. 부. 지식으로부터 나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 힘을 얻기 위해 아귀다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실 당시 사회를 보면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로마에서는 총독을 파송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렸고 보다 효과적으로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헤롯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당시 통치자는 빌라도였습니다. 로마의 4대 총독입니다. 그는 천성적으로 고집불통이고 잔인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도 대중인 유대인의 의견을 무시하지는 못했습니다. 여론을 무시하고 정치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느날 빌라도는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이사의 화상이 들어 있는 군기를 밤에 몰래 예루살렘에 들여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제 2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강력하게 항의하였습니다. 여론이 자신에게 좋지 않게 돌아가니까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자존심을 접고 그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이 당시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은 유대교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여론 주도층이었습니다. 그들의 여론에 따라 정책과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교 내에 분파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분파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입니다. 예루살렘 공회의 회원을 구성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말하면 국회의원들입니다.


바리새파는 인간 영혼의 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파는 부활을 부인했습니다(행23:8). 바리새파는 천사와 악마의 존재를 믿었으나 사두개파는 부인했습니다(행23:8). 바리새파는 구약과 구전으로 전해오는 미쉬나를 인정하였으나 사두개파는 모세 오경만 인정하고 모든 구전을 부정했습니다.

바리새파는 주로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사두개파는 주로 정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 종파 중에는 에센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세상이 싫어 타락한 세상을 부정하고 쿰란 공동체를 이루며 수도사적 삶을 살았습니다.


반대로 헤롯당이 있었는데 이들은 헤롯에 아부하며 세속적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혈맹당이 있었는데 이들을 무력으로 로마의 권력을 몰아내려고 한 사람들입니다. 일제시대 때 우리 나라 친일파와 같은 사람이 헤롯당들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는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세력들이 서로 힘을 차지하기 위해, 여론을 주도하기 위해, 그리고 여론을 업고 예루살렘 공의회 회원이 되기 위해 치열한 정치 다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나타나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며 수많은 병자를 고쳤습니다. 그러자 힘의 판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론이 예수님께 기울어지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 다녔습니다. 지지율이 60%-70%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한 것입니다. 새로운 종교 세력이 등장한 것입니다.


1. 죽이려는 마음과 살리려는 마음


이것에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었던 종교적 인기를 예수님이 빼앗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었던 종교적 기득권을 침범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날 밀을 따먹었습니다. 올무에 걸려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따졌는데 이 때 예수님은 명쾌한 논리와 권위 있는 말씀으로 안식일의 본질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아마 그들은 많은 백성들 앞에서 창피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을 떼로 갔다 혹을 붙이고 온 꼴이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무지만 노출한 꼴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자존심이 심히 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에게 몇 차례 당하면 어떤 생각을 합니까? “두고 보라 언젠가 복수하리라”라고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이 왜곡되고 꼬이게 되어 있습니다. 상대를 죽임으로 잃었던 지지도를 회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더욱 그들은 예수님을 감시하였습니다. 지난번 안식일을 어긴 것은 예수님 본인 스스로 한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한 것이기 때문에 결정적인 단서는 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제거시킬 결정적인 단서가 필요했습니다. 한 번에 넘어뜨릴 단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백성들에게 민감한 것이되어야 합니다.  그 당시에는 가장 좋은 것이 안식일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목숨처럼 지켰고 그것이 곧 적인가 동지인가를 구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침 결정적인 단서가 잡혔습니다. 자신들이 백성들을 늘 가르치던 회당으로 예수님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때 마침 한편 손 마른 사람, 오른 손이 불구인 사람이 회당에 있었습니다. 대부분 오른 손으로 일을 하니까 오른 손이 불구라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았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친구들로부터 조롱을 당했을 것이고 늘 소외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었을 것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 힘없는 사람, 도와주어야 할 사람,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을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한 미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생각 자체가 죽이는 쪽으로 이미 결정되니 상대의 모든 것을 죽이는 쪽으로 해석을 하고 접근을 합니다. 이런 사고를 정치적 사고라고 말합니다. 정치인들이 정치적 판단을 하는 사고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 불리하냐 유리하냐로 따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너무 형식을 강조하다 보니까 내용과 본질보다는 형식을 강조하는 형식주의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들이 최고입니다. 종교적 교만이 넘쳐 흘렀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규례 234개를 만들어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방어하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는 도구로 활용합니다.  견고하게 굳어져 버려 이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이 사랑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죽이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마음을 가졌습니까?

기본적으로 살리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형식보다 본질을 중시했습니다. 예수님은 형식보다 하나님의 계명을 주신 본질을 중시하였습니다. 4절을 읽어보십시오. 안식일에 바리새인들처럼 규례를 만들어 놓고 고소하려고 감시하며 악을 행하는 것보다 선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고 안식일을 지킨다고 말로만 하면서 사람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것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4차례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시비를 하였습니다. 2장 2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시비하였고 이제 그들은 덫을 쳐 놓고 예수님이 범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마른 사람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으로 접근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안식일일지라도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죽이는 마음이 아니라 살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식을 살리고 남편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기업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 이 시대의 문화를 살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살리는 마음을 가지고 계속 생각하다보면 모는 것을 살리는 쪽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자신이 새벽기도한다고 새벽기도를 못하는 사람을 죽이려는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자신이 헌신하면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인도 아니라고 생각해 버리면 안됩니다. 자신의 경험을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하나님의 사랑보다 말씀보다 우선시해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해 "회칠한무덤, 독사의 새끼들. 그리고 지옥의 자식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2. 죽이려는 말과 살리려는 말


죽이는 쪽으로 생각을 하면 자연적으로 사람은 죽이는 쪽으로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살리려는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에 어떤 말씀을 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손마른 자에게 한 가운데 일어서라고 합니다. 공개적으로 일어서게 합니다.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노려 보는 자들 앞에서 살리는 말씀, 치유의 말씀, 사랑과 긍휼의 말씀을 합니다. 그가 내밀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회복되었습니다.


위협이 있는데도 살리는 말을 하는데 인색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혀는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해 줍니다. 말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쪽으로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을 사용할 때는 죽이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말 한 마디가 힘이 있습니다. 대부분 말이라는 것은 한 번 말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 씨가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자라 말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 18:21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너무 죽이는 말이 난무합니다. 우리가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셰드 헴스테더 박사는 우리 인간은 하루에 5만~6만 가지의 생각을 하고 그 많은 생각 중에 75%는 부정적인 생각이고 25%는 긍정적인 생각이라고 주장합니다. 관리하지 않고 되는 대로 말하면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관리하지 않고 가만히 놓아두면 누구나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말을 오래 할 수 있지만 긍정적인 말은 오래 하지 못합니다.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은 곧 지루해 하고 힘들어합니다. 긍정적인 말을 하려면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작은 시골 천주교회의 주일 미사에서 신부를 돕고 있던 한 소년이 실수를 하여 제단의 성찬으로 사용할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습니다. 신부는 즉시 소년의 뺨을 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서 물러가고 다시는 제단 앞에 오지마!" 이 소년은 장성하여 공산주의자의 지도자인 유고의 티토 대통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큰 도시의 천주교회당에서 미사를 돕던 한 소년이 역시 성찬용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습니다. 신부는 곧 이해와 동정이 어린 사랑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여 주었습니다.

"응, 네가 앞으로 신부가 되겠구나" 이 소년은 자라나서 유명한 대주교 훌톤 쉰이 되었답니다. 티토 대통령은 그 말대로 제단 앞에서 물러가 하나님을 비웃는 공산주의의 지도자가 되었고, 쉰 소년은 그 말대로 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한 마디 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살리고 남을 살리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어떤 처지 어떤 환경일지라도 나도 살고 가족도, 교회도, 이 시대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을 통해 나도 살고 이웃도 살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말을 통해 나도 살고 이웃도 살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행동을 통해 나도 살고 이웃도 살려야 하겠습니다. (김필곤 목사)


 


2007/01/25 Thu 12:5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