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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亂)

호걸영웅 2007. 11. 5. 15:35



프란시스코 사비에르에 의해 일본에 전해진 천주교는 신자가 많이 증가하여 게이초 연간(1596 ~ 1615)에는 60 ~ 70만 명 정도에 이르렀다. 이미 히데요시 때부터 금교령이 발표되어 신자나 선교사들에게 가혹한 박해가 가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예수회를 비롯한 외국 선교사들은 목숨을 걸고 일본에 찾아왔다.





해외 무역을 확대하고자 했던 이에야스는 포교 활동을 묵인하고 있었다. 에스파냐령 마닐라, 멕시코, 포르투갈 등 외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선교사들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나 히데타다를 알현한 선교사들은 이 두 사람을 '관대하고 인정이 많은 인물'이라고 평하였지만 사실 막부는 히데요시가 발표한 금교령을 철회하지 않은 채 힘을 과시하며 자신들의 지배 체제속으로 기리사탄들을 편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1609년 이에야스의 측근, 혼다 마사즈미의 실무 담당자인 오카모토 다이하치와 히젠의 성주 아리마 하루노부 사이에 뇌물이 오고간 사건이 발견되면서 사태는 급변한다. 이 일은 당사자들이 기리시탄(吉利支丹)이고 사건의 뿌리가 깊어 선교사들까지도 적지 않게 관여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게다가 슨푸의 가신들 중에서도 열심히 믿고 있는 신자가 있음이 알려지면서 이에야스는 즉각 이들을 추방하였다. 또한 도요토미 측의 무사들 중에도 기리시탄이 많음을 알게되면서 크리스찬 다이묘나 신도들의 반란, 외국의 침략등을 우려하여 선교사와 신자를 쓸어버리는 정책으로 바뀌었다.


1612년 3월, 먼저 에도, 오사카, 교토에 한정하여 천주교 금교령을 발표하고 다음해 12월 마침내 전국적으로 금교령을 확대하였다.


"천주교는 식민지 정책의 앞잡이이며 신불 숭배에 기초를 둔 일본의 질서를 뒤흔드는 사악한 종교이다. 서둘러 금지시키지 않으면 후세에 분명 국가의 재앙으로 닥쳐올 것이다."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이듬해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을 비롯한 14명의 신자가 마닐라나 마카오등 해외로 추방되면서 기리시탄 박해의 폭풍우가 불어 닥쳤다.





이에야스가 세상을 떠난 후 히데타다는 탄압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1622년에는 기리시탄 55명을 처형한 '겐나 대순교' 가 있었다. 이처럼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강경해졌다.





쇼군 이에미츠 때에는 막부와 각지의 번에서 개종을 거부하는 기리시탄에 대한 처벌이 더욱 가혹해졌으며 각지에서 화형식까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미츠의 처음 10년간의 정치 시기를 '화형의 시대'라고 까지 불렀다.





규슈의 시마바라 반도에는 특히 기리시탄이 많았다. 왜냐하면 이곳은 크리스찬 다이묘 아리마 나오즈미의 영지였기 때문이다. 아리마씨 다음에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4만 3,000석의 시마바라 번주가 되면서 지금까지의 히라성을 폐쇄하고 시마바라 성을 축조했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축성을 위한 노역과 과중한 세금으로 궁핍함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시게마사의 뒤를 이은 아들 가쓰이에는 아버지보다 더 가혹한 번주였다. 가쓰이에는 농민에 대한 가혹한 정책뿐만 아니라 철저한 탄압 정책으로 기리시탄 근절에 나섰다. 아마쿠사 지방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크리스찬 다이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무너진 이후, 이 지방은 히젠 가라쓰의 데라자와 가타타카의 영지가 되었다.





반란은 1637년 12월 17일 농부들이 시마바라를 다스리는 다이묘(大名) 마츠쿠라 가쓰이에를 상대로 봉기하면서 터졌다. 대부분의 반란군은 개종한 천주교인이었으나 봉기의 주요 원인은 매우 무거운 세금 때문이었다. 반란군은 농부, 낭인, 수많은 여자들을 포함한 23,000명의 병력이었으며, 시마바라와 인근의 아마쿠사 군도는 천주교식 세례명인 제롬을 사용하는 소년 장수 아마쿠사 시로(天草 四郎) 의 지휘를 받았다. 시마바라와 아마쿠사는 크리스찬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가 다스리던 당시 천주교 선교활동이 광범위하게 행해졌던 곳이다.


나가사키 지방관이었던 테라자와 히로타카는 3,000명의 병력을 아마쿠사에 급파했으나 1637년 12월 진압군은 2,8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반란군에게 패했다. 생존자들은 나가사키로 후퇴했고, 지방관은 막부에 지원 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1638년 1월 3일, 막부의 지원군은 1,000명의 사망자를 내고 반란군에 패한 후 시마바라로 후퇴했다.


시마바라에서 반란군은 시마바라성을 포위한 후 하라 요새를 점령했다.





천주교 반란군에 의해 목이 잘린 지장 보살 석상


히로타카는 이미 1월 2일에 병사 500에 800명을 증원한 병력을 이끌고 오무라를 떠나 시마바라로 진격한 상태였다. 히로타카의 군대는 시마바라 성에서 약 1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거리에 진지를 세웠다. 진압군은 일본과 중국 선박으로부터 징발한 대포를 쏘면서 전투를 개시했다.


진압군은 네덜란드 무역선에게 바다쪽에서 하라성을 포격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히라도 네덜란드 상관의 총 책임자였던 코체베커는 항구에 정박된 상선 한척을 사용해 지원 사격을 해주기로 했다. 그는 대포 20문과 이를 운용할 인원 100명을 해안에 배치했고, 역시 바다에 띄운 상선에서도 대포로 지원 사격을 해왔다. 이 대포들은 15일간 약 425발의 포탄을 쏘아댔으나,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 반란군의 사격에 의해 네덜란드인 망루 감시병만 부상당했다. 네덜란드 선박은 포위당한 반란군 부대가 보내온 경멸어린 서신을 받은 일본측의 요청으로 물러났다.


"우리와 전투를 벌일 용기있는 병사는 더 이상 없으며, 우리의 소규모 부대와 싸우기 위해 서양인의 도움을 요구하는게 너희들은 부끄럽지도 않은 것이냐?"


막부의 추가 병력이 도착했으나 하라성의 반란군은 1달이 넘게 공성전에 저항했으며 진압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막부군과 반란군은 겨울 날씨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1638년 1월 3일, 반란군은 히젠의 다이묘와 함께 그의 병사 2,000명을 죽였다. 그러나 반란군 진영에서는 서서히 음식과 탄약, 다른 필수품들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3월 10일에 막부군은 병력을 다시 재보충한후 4월에 120,000명의 병력으로 30,000명의 반란군을 공격했다. 절망에 빠진 반란군은 필사적으로 성을 방어했고, 4월 4일 공격군은 후퇴했다. 진압군에 잡힌 생존자들은 성안의 식량과 화약이 떨어져간다고 실토했다.





1638년 4월 12일 히젠의 병력은 하라성을 강습했고 외곽 성벽을 점령했다. 반란군은 저항했으며 4월 15일에 완전히 진압될 때까지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막부군도 10,000가량의 병력이 전사했다.





오늘날의 하라 성터


전투가 끝난 후 막부군은 반란군과 동조자 37,000명의 머리를 베었다. 반란군 지도자 아마쿠사 시로의 머리는 나가사키로 보내졌으며 하라 성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반란의 확산에 서양 천주교 세력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품었으며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 밖으로 추방당했다. 이미 존재하던 천주교 금교령은 더욱 엄격해졌고, 일본내의 천주교는 오직 지하조직으로만 살아남았고, 이들은 카쿠레 키리시탄(숨은 기독교인)으로 변해갔다.





아마쿠사 시로





야규 쥬베이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天草四郎時貞)는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여러 번 악역으로 등장했으며 특히 야규 쥬베이 미츠요시(柳生十兵衞三厳)와 맞서 싸우는 가상의 이야기를 다룬 후카사쿠 긴지 - 영화 '배틀 로얄'의 감독 - 의 영화 '마계전생(魔界転生)'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이 영화에서 죽었다 살아난 아마쿠사 시로는 기독교의 신을 거부하고 악귀가 되어서 그와 시마바라의 반군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도쿠가와 막부를 멸망시키기 위해 위대한 무사(미야모토 무사시, 호조인 인슌, 야규 무네노리)와 시대의 악당들을 마계의 힘을 빌어 부활시키며 쇼군의 검술 사범인 야규 쥬베이(소니 치바가 연기)는 이들의 음모를 막기 위해 맞서싸운다는 내용이다.


격투 게임 사무라이 쇼다운(Samurai Showdown)에 나오는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는 시마바라 반란군을 지휘한 이 소년 장수를 모델로 했다.
출처 : THIS IS TOTAL WAR
글쓴이 : 왕마귀 원글보기
메모 : 일본 기독교 탄압에 대해 전부터 궁금했는데 오늘 다른 카페글에서 좋은 자료를 발견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