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헷세드 (룻 1:1~17)

호걸영웅 2008. 9. 20. 11:01

                                                                         헷세드 (룻 1:1~17)


 룻기는 한 가문의 이야기에 머물지 아니하고 신약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룻기의 족보는 신약 마태복음 족보로 연결되는 고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룻기를 읽을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어떤 역사를 행하셨는지 "구속사적 관점'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룻기 신학의 주제는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룻기에서는 1:8, 2:20, 3:10 세 번 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헤세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이념입니다. 헤세드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자비, 선대, 은혜, 인애라는 뜻으로 본문에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보호, 나와의 따뜻한 교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고난당한 한 가정을 향한 헤세드가 오늘 나에게도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헤세드가 없이 어찌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를 룻기는 말하고 있습니다.

  

   룻기는 히브리인들에게 참 사랑받는 책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추수를 다 끝내고 가정에서 가족이 모여 앉아 룻기를 읽곤 합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절기 때 읽는 메기로스(megilloth)라 불리는 두루마리 책이 있습니다. 거기엔 아가, 애가, 전도서, 에스더서 그리고 룻기 등 다섯 권의 책이 들어 있습니다.

  룻기는 4장 85절로 구성된 짧은 책입니다. 85절 중 절반이 넘는 45절이 대화체로 되어 있어 룻기를 읽을 때 사람들은 배역을 정해 입체적으로 읽곤 합니다.


II. 흉년을 만났을 때


3000년도 더 된 이 옛날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흉년이 들어 굶어 죽게 생긴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먹을 것을 찾아 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이 모두 죽은 시어머니와 두 젊은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그 땅이 어떤 땅입니까?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를 것이라고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가나안 땅입니다. 약속의 땅에도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흉년을 만났을 때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합니까?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모압은 요단강 동편 고원지대인데 곧 현재 요르단입니다. 당시 그곳은 먹고 살기가 그런대로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사해면보다 131미터 높다)


우리의 삶속에도 가끔은 흉년을 만납니다. 사업의 실패, 건강의 어려움, 가족애의 파멸, 이혼....등등

이때 현실적인 삶속에서의 흉년을 긍정적으로 직면하고 해결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못한 것 같습니다.  때로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술과 약물, 현실도피...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인생의 난제 가운데 하나가 왜 인생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예수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왜 흉년이 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① 하나님의 징계로 고난이 올 때가 있습니다. 사업이 어려워지고 건강에 이상이 오고 영적인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 내가 잘못한 일이 없는가?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자세이지요.


② 고난 가운데 내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는가? 내가 가진 신앙이 참된 신앙인가? 테스트 하기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③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싸인으로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탕자는 고난을 당했을 때에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고 아버지께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고난이 가져다 주는 유익입니다.


④ 고난은 하나님의 훈련 방법 중 하나입니다.

고난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여러분 주변에 누군가 고난을 겪고 있다면 너무 쉽게 그 사람을 동정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지금 그 사람을 다듬고 있는 중입니다. 그의 인격과 신앙을 만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맑아지고 깨끗해지는 순간일 수 있는 것이지요. 고난이 유익이라.



III. 남겨진 여인들(하나님의 헤세드)


흉년을 만나 그 사람은 모압 평원을 찾아갑니다. "거류 했다"는 말은 잠시 머물며 흉년도 피하고 돈도 벌어 금의환양하겠다는 겁니다. 그 사람은 홀로 모압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아내와 두 아들을 함께 데리고 떠납니다.


가장의 이름은 엘리멜렉입니다. 엘리는 "나의 하나님"이란 뜻이고 "멜렉" 왕이라는 뜻입니다. 상당히 지위에 있었던 이름입니다. 전체를 붙혀보면 "나의 하나님은 왕이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왕이 없던 사사시대 이런 이름을 가진 것이 특이합니다.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인데 1:20에 나오미 이름을 가지고 언어유희를 합니다. "나를 나오미 - 즉 기쁨, 희락이라 부르지 말고, 마라 - 즉 괴로움, 슬픔이라 부르라" 이처럼 나오미는 기쁨이란 뜻입니다.


반면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입니다. 이름의 뜻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히브리어 이것 저것을 끌어다가 말론은 "병약한" 기룐은 "쇠약한"이란 뜻을 가졌다고 나쁜 쪽으로 풀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일찍 병들어 죽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연구는 잘못된 연구입니다. 그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일찍 죽으라고 이런 이름을 붙였겠습니까?


성경을 연구하다가 잘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게 정답입니다. 억지로 갖다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나중에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 며느리가 나오는데 이들의 이름의 뜻도 모른다는게 정답입니다. 구태여 오르바(돌아가는 자)는 나쁜 쪽으로, 룻(귀여운 여친, 우정)은 좋은 쪽으로 갖다 부칠 필요가 없습니다.


룻기 저자는 이 사람들을 소개하고 중요한 설명을 한 마디 2절에 남깁니다.

"(이들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미가서 5:2에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주님 예수께서 바로 이곳 베들레헴 에브랏에서 바로 이 사람들 룻의 족보를 타고 이 땅에 태어나십니다.


살아보기 위해서 낯선 땅을 찾아갔던 이 가정에 3절, 5절에서 부고장이 날아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가장 엘리멜렉 그리고 두 아들이 차례대로 죽습니다.


우리 메시야의 조상은 이방 땅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다가 어떤 억울한 일, 어떤 어려운 일을 당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젊은 나이에 죽었고 세명의 여인들만 버려졌습니다. 남편이 가족을 살려보겠다고 몸부림하다 죽어갈 때 그 고통을 성경은 침묵합니다. 자식잃은 어미의 통곡, 남편 잃은 두 자부의 절규도 침묵합니다. 유족들의 찢어지는 가슴과 그 막막했던 상황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이방의 한 모퉁이에 남겨진 이 과부들! 버려진 이 여인들! 사람의 손으로부터 철저히 버려진 이 과부들은 이제 하나님이 돌보실 차례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역사하실 차례입니다. 이것이 룻기의 주제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돌보심이 나타날 때입니다.


룻기 저자는 이 가족이 모압으로 가서 벌 받아 죽었다고 열을 내지 않습니다. 후대 해설가들이 그렇게 정죄하는 것 뿐입니다. 오히려 룻기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율법이 규정한 모압 여인을 다윗 왕의 할머니로 받아들입니다. 불쌍한 이 여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간섭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왜요? 우리같은 이방인들, 이방 땅에 버려진 백성을 당신의 자녀로 받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IV. 슈브(돌아오라)


불쌍하게 남겨진 세 여인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는가 하는 것이 바로 그 다음절 6절 말씀입니다.

6절 말씀에 보면 세 가지 중요한 동사가 등장합니다.


첫째는 "듣다"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기쁜 소식을 듣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떤 소식을 들었습니까? "그 여인이 모압지방에서" 즉 버려진 그 땅에서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단순히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우리 백성을 찾아오셨다! 여호와께서 다시 우리 백성을 품에 안으시고 돌보신단다!


이것이 사건을 보는 신앙인의 안목입니다. 우리 눈에 양식만 보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돌보심 - 헷세드가 보여야 합니다.


둘째 "일어나다"라는 단어입니다. 물론 이 말은 어떤 행동을 시작하는 관용적 표현이지만 이 여인들이 슬픔과 고통의 자리를 툴툴털고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누워서 못 일어나면 그건 죽는 일입니다. 일어나면 삽니다. 기독교는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셋째 "돌아가다" - "슈브"라는 단어입니다.

6절 이하 1장 전체에서 이 "슈브"라는 단어가 무려 12번이나 나옵니다. 1장 전체에서 너는 모압으로 돌아가겠느냐.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내게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손짓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 옛날 하나님의 첫사랑이 보입니까? 돌아가십시요. 그 옛날 하나님을 섬기던 그 행복했던 순간이 기억나십니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돌아온다 "슈브"라는 말이 회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면 정말 회개하고 돌아와야 할 사람은 나오미입니다.


사실 이것이 룻기의 주제입니다.

떠난 자를 한없이 기다려 주시고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헷세드!

도와줄 사람 하나 없이 이 땅에 남겨진 자들을 돌보시고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헷세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자를 무조건 받아 주실 뿐만 아니라 다윗 왕가를 이룰 수 있도록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주시는 헷세드!

가족은 너를 버렸으나 하나님은 너를 새로운 가족으로 품어주시는 그 놀라운 헷세드!

한 절 한 절 감격이요 감사뿐입니다. 한 순간 한 순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칩니다.


헷세드!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차원입니다. 제한이 없는 은혜입니다.

(류영모 목사)


080920 편집:익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