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이가봇 (삼상 4:1~22)

호걸영웅 2008. 9. 13. 11:54

                      이가봇 (삼상 4:1~22)



저는 다이아몬드 하면 그저 크기만 하면 좋고 비싼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다이아몬드를 감정하는 기준을 소위 '4C'라고 하는데, 그것은 carat(무게), clarity(투명도), color(색) 그리고 cut(연마가공)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4C'에 따라 여러 등급이 나뉘어져 있었고, 실제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니 비싼 것은 정말 약간 푸르스름하고 영롱한 빛이 나는 데에 비하여, 싼 것은 좀 누런 빛을 내는 것도 있고 속에 금이 간 것도 있답니다.

 

즉 다이아몬드라고 해서 다 같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그것이 얼마만큼 순수하고 오묘한 빛을 발하는가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누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비추어 주는 개개의 보석입니다.

이 지상의 각 성도와 교회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얼마만큼 깨끗하고 아름다운 빛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빛을 완전히 상실한 경우에는 두말할 필요 없이 가장 무가치한 존재가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모습이 바로 그 빛을 완전히 상실한 경우였습니다.


19절부터 22절까지에 기록하기를 "19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산기가 가까왔더니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그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문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20죽어갈 때에 곁에 섰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지도 아니하며 관념치도 아니하고 21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 22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가봇"이라는 이상한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이름은 '영광이 없음'이란 뜻의 말이며,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음'을 상징한 것으로서, 엘리 제사장의 며느리가 난산 후에 지금 막 낳아 놓은 아들에게 붙여 주었던 이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언약궤를 적군에게 빼앗기고 이스라엘의 영적 리더였던 자기 시부와 남편을 하루아침에 잃고 줄초상을 당한 충격들이, 그녀로 하여금 죽기 직전에 자기 아들에게 그런 이름을 붙이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 이름 뜻 그대로 당시의 이스라엘의 형편은 실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찾아보려 해야 찾을 수 없는 완전한 암흑기요 최악의 대공황이었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습니까?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을 통하여 주변 이방 민족들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었던 이스라엘이 이 사사 시대 말에 와서는 어떻게 그처럼 어처구니없게도 하나님의 영광을 아예 상실한 백성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까?

 

이 시간 우리는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상실케 되었는지를 본문 말씀을 통해 두 가지로 상고해 보면서,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생활에 경종으로 삼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사용하려 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게 됩니다.


본문 1절 하반절부터 4절의 말씀에 "1b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쳤더니 2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3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4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지중해 연안에 자리 잡은 호전적인 민족으로서 사사시대 초기부터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던 블레셋이 또 다시 쳐들어왔을 때였습니다.

 

그들과 대항해서 싸우러 나갔던 이스라엘은 초전에서 "사천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배했습니다.

전장에 함께 나와 있던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 패전의 요인이 군사력의 열세라기보다는 "여호와께서... 패하게 하신" 것이라고 일단 문제의 진단은 정확하게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 대책에 가서는 어처구니없는 유치한 발상을 해내었는데, 그것이 곧 "여호와의 언약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그것으로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패전하도록 버려 두실만큼 진노하셨는지 그 이유를 되새겨 보고 회개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언약궤만 갖다 놓으면 문제가 다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언약궤는 그런 목적으로 쓰일 물건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언약궤는 성소에서도 지성소에만 안치해 두어야 할, 예배를 위한 성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소에 예배하러 오는 자들에게 당신의 임재를 상기시켜 주시기 위하여 언약궤를 거기에 두도록 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하나님 임재의 상징으로 보지 않고 마치 하나님이 그 속에 살고 계신 것처럼 여겼습니다.

즉 그 언약궤를 옮김으로써 하나님을 자기네들 필요한 곳으로 마음대로 데려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언약궤는 "실로"의 성소로부터 그 전장으로 옮겨져 왔으며 엘리의 두 아들로서 제사장들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 언약궤 운반과 관리의 책임자 격으로 전쟁터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2장에서 하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이들은 바로 거기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5절부터 11절까지에 기록하기를 "5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6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7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8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9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 (편집: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같이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10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야말로 신을 그 가시적인 상징물과 동일시하는 우상 종교 사상에 익숙했습니다.

휴대용 수호신상을 품에 넣고 다니면 어디로 가도 안전하고, 자기 밭 어귀에 나무 우상을 하나 세워 놓으면 바로 그 밭에 농사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던 백성이었습니다.

 

실제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대하는 자세가 바로 그런 우상 숭배의 수준과 조금도 다름없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중에 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이 도착했다고 하면서 처음에는 벌벌 떨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그들이 마음을 "대장부같이" 단단히 먹고 공격해 왔을 때,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초전박살 당하고 나머지는 삼십육계일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 줄 줄 알았던 언약궤는 오히려 빼앗김을 당했으며, 이것이 언약궤가 이방 민족의 손에 넘어간 유일한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언약궤 자체가 당신의 임재나 도움을 보장해 주는 '휴대용품'은 결코 아닌 것을 명백히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당신이라는 존재가 그 이스라엘 백성들 원대로 이리저리 불려 다니고 끌려 다니고 하실 분이 절대로 아님을 천명하셨던 것입니다.


휴대(portable)장비가 점점 더 좋아지고 사람들은 그런 휴대용품들에 점점 더 익숙해져 갑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도 그런 식으로 착각하고서 하나님을 무슨 '휴대용품'처럼 여기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교인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란 대상을 자기 필요한 일에만 불러 써 먹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사업 잘되도록 도와주는 컨설턴트쯤으로, 자기 육신 건강 지키는 보디가드 정도로, 자기 자녀 취직과 결혼이나 알선해 주는 브로커처럼 착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필요할 때 마음대로 부르고 원하는 곳으로 마음대로 옮길 수 있는 휴대용품 정도로, 아니면 내 말이면 뭐든지 들어주는 하인처럼... 여기는 백성,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그처럼 값싸게 취급하는 백성에게 그 영광을 두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결론: 온 우주의 창조자시오 절대주권자이시며 유일한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 제멋대로 써 먹을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니라 오직 두려워 떨며 섬기는 대상이 심을 잊지 말고, 우리 모두가 그 거룩하고도 지존한 영광의 빛을 늘 지키고 발할 수 있도록 오직 하나님을 지극히 높이고 경외하여 섬기며 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석기현 목사)

080806편집:익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