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에 대한 처방과 하나님의 지혜 (고전1:14-17 고전1:18-21),
가) 분열을 훼파하는 십자가
하나가 되어서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할 교회가 때때로 내적 분열의 시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 교회가 이런 경우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시험에 처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염려하여 올바른 교훈을 보냅니다. 인간은 그 심성 속에 파당을 즐기는 편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와 국가,그리고 직장과 나아가서 교회에 이르기까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이에 고린도 교회의 내적 분열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분열의 원인
1)편협한 동류 의식
고린도 교회의 내적 분열에는 편협한 동류 의식이 그 저변에 깔려 있었습니다. 파당은 언제나 ‘끼리끼리’라는 편파적인 성향에서 비롯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새로 거듭난 ‘같은 형제’임을 깊이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분파 의식이 생겼습니다.
바울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분파였습니다.
아볼로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순수한 신앙적 차원에서 벗어나 헬라적인 지적, 철학적 경향을 추구하는 종교로 전환시키려는 분파였습니다.
또 게바(베드로)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유대의 율법을 존중하여 은총을 경히 여기는 율법주의적 분파였습니다.
한국에는 250개가 넘는 장로교파가 존재하며 침례교회는 이단이 아닌 교파는 2 개밖에 되지 아니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로교단이 250개라는 점은 250군데의 차잇점들이 있다는 것인데, 그런 차잇점들은 모두가 구원과 관련된 교리나 근본적인 교리외의 인간적인 목회철학의 차이에서 오는 분열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침례교회 타이틀을 걸고 있는 이단은, 귀신론을 주장했던 김기동 목사 교회 등이나 김기동 목사는 기침에서 축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단으로서의 분명히 구별되는 침례교단들은 4개 정도인데,구원파의 대한예수교침례회(기쁜소식선교회:박옥수),기독교복음침례회(권신찬,유방언,이요한), 성경침례교회(말씀보존학회:이송오) 정도로 봅니다만, 성경침례교회는 킹제임스 성경만 고집하는 아집?이 있어서 문제가 되긴 하지만 이단에 주요 조건에는 다소 못 미치지 않는가 생각이 됩니다.
인터넷에서는 이송오목사의 주장 중에는 휴거 할 때는 혈과 육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했다고 피를 다 쏟고 간다고 하거나, 부활 때는 젊은 나이(30세 정도)라고 하는 것 등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주장을 하지만 이런 것은 주요 교리는 아니며 개인적 믿음의 일부 견해이므로 이단이라고 까지 하기엔 무리가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성서침례교회에서 가르치는 휴거 따위의 가르침이 이단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소 무리한 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스코필드 이후에 세대주의라는 학설을 통해 나온 것인데, 세대주의에도 장단점이 있고 학설마다 완전한 것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어차피 칼빈의 예정론에도 모순은 있는 것이고, 휴거니 천년왕국설이니 하는 것도 학자에 따라 다 다른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점을 다 고려하고 이단여부를 따져여야 할 줄 압니다.
학적으로는 성침이나 기침이 교류하는 입장이므로 어느 쪽이 꼭 바르다거나 틀리다거나 해서는 아니 될 줄 압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성침 신학교의 교무과장을 지내셨던, 조직신학 박사였던 장두만 박사라는 분도 어차피 수년을 기침의 대전침신에서 강의 하셨고 그곳에서 교무과장으로 모시려 하였으나 거절한바 있습니다. 최광욱 목사님 역시 장두만 목사님을 카리스마있는 분이라고 칭찬한 바 있습니다. 또 제가 기침의 경기평안 지방회에서 활동할 때도 '세대주의를 가르치는 달라스 신학'에서 수학한 박영근 박사를 모셔다가 목회자 대학원 세미나를 하기도 했습니다. 다음 기회에 세대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래 신학도 일종의 학문이며, 학문은 파고 들수록 피곤한 것이고 모두가 예수 앞에서는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배경이나 사상적인 배경을 따라 교회에서 편협한 동류 의식으로 분파를 일으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인간 중심
분파의 비극은 언제나 합리적이지 못한 편협한 개인 중심적인 생각에서 기인됩니다. 우물 안에 개구리 같은 생각을 통하여 분파가 탄생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말미에는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 까지는 희미한 부분들이 있을 수 밖엔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들이 구원의 교리를 어그러뜨리거나 자기 교회만이 구원이 있다거나 다른 성경을 들고 나오거나 하지 않는 이상, 쉽게 이단을 정죄하는 일들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분파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하여,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침례를 많이 주지 아니한 것을 오히려 감사하였습니다(14절).
고린도 교회는 누구에게 침례를 받았느냐를 따지며 분파를 형성했습니다. 이는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즉 인본주의적인 신앙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주님의 이름보다 더 내세우는 사람, 또 인간의 유명세를 따라 예속하려는 사람, 모두가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인은 이미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침례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어리석은 유혹을 피하여 자신의 이름을 오히려 잊혀지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기억되게 하기 위해 침례를 베푸는 일에 지나치게 골몰하지 않았던 바울의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2.분열을 극복하는 길
1) 사명의 참된 의식을 가져야 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분열 상태를 올바르게 지적하여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바울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사명을 올바르게 인식하였습니다.
17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자신의 사명은 형식적인 침례를 베푸는 성례전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것, 곧 ‘오직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침례는 제자화 사역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주님은 예수를 믿고 구원 얻은 자에게 ‘침례를 주라’(마28:19)고 명령하셨습니다. 따라서 침례를 받은 사실 혹은 그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 누가 침례를 주었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도 바로 그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인 것을 깨달아 침례를 받고자 할 때는 누가 침례를 베풀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신념을 가졌던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생각을 우리들은 본받아야 합니다.
복음 전파의 중요한 사역은 뒷전에 두고 자신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듯이 자신의 이름을 내려는 인간 중심적인 생각은 깨어져야 합니다. 내가 맡은 본분이 무엇인가를 상기하여 자신의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2)십자가 아래서 훼파되는 분열
바울 사도의 평생 자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18절). 그것은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롬1:16). 본문 17절에서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한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바울은 순수한 마음과 용어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나타내려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철저히 부인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구원의 능력만을 전파하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 된 신앙을 가졌습니다. 거기에는 분열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가 분열을 훼파합니다.
나)두번째 대지는,참된 하나님의 지혜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전1:18-21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연이어 설명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하나님의 지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당시 문화,경제,학문이 융성했던 고린도 교인들이 인간의 거짓된 지혜에 미혹되지 않도록 권면하였습니다.
1.참된 지혜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20절).
이 구절에는 인간들 가운데 지혜가 있다고 생각되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언급되었습니다.
첫번째는 ‘지혜 있는 자’입니다. 이는 22절의 내용을 볼 때 헬라인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 당시 헬라의 지식은 고도로 발달되었기 때문에 헬라인들은 명철하고 지식이 많다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두번째는 ‘선비’입니다. 원래 이 말은 서기를 가리키지만 바울이 살던 시대에서는 유대 율법에 능통한 율법 교사들을 지칭했습니다.
세번째는 ‘변사’입니다. 이는 학자나 변론가 등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의 특성은 어떠한 문제이든지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언급한 이 사람들은 유대 사회나 헬라 사회를 막론하고, 지식과 지혜가 있다고 일컬어지는 부류의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학식이나 지성도 하나님의 지혜에 비하면 ‘미련한 것’이라고 평했습니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의 왕이라고 불렸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다”라는 견해를 주창한 바 있는데, 이는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하나님의 크심과 위대함에 비할 때는 지극히 불완전한 것이다 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 이성이 발달해도 생명에 관한 문제나 창조에 관한 영역은 전혀 손대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과학이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법칙을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이지 결코 창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구원에 관한 한 하나님의 섭리와 지혜를 이해하고 해석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더더욱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어리석은 자의 고집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절).
바울은 2:14 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미련하게 생각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하나님의 지혜를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을 거부하려고 고집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 지역인 거라사에 가셔서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를 치료하셨을 때 그곳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고 놀라거나,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기는 커녕 잃어버린 돼지로 인한 손실만을 생각하고 주님께 떠나시기를 간청한 일이 있습니다(막5:1-20).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는 자들은 예수를 거부합니다. 또한 계속적으로 멸망의 삶을 고집합니다.
우리 속담에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일수록 겸허하고 자기보다 뛰어난 지혜를 인정하고 존중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부인하고 고집을 피우는 일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겸손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백부장이 있었고,겸손으로 인하여 삭개오가 구원을 얻었으며
겸손으로 인하여 구스의 내시와 나아만 장군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할 때 큰 은혜를 받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3.지혜로 인한 구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21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하나님답지 않은 구원의 조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숱한 천군천사를 동원하실 수도 있고 당장 불벼락을 내리는 일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방법은 이상하게도 믿음에 대한 테스트를 통과하기를 바라고 게십니다.
소금물에 넣어보면 곯은 달걀은 물 위로 떠올라 버려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전도라는 피곤할 수도 있고,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하는 비능률적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로 거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죽은 부자에게 모세와 사람들을 통하지 않으면 눅16:19~31을 보면 전도가 구원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31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가 수도 없이 끝도 없이 예언했던 중심 인물의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들이 말 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리스도만이 날마다 해마다 드려졌던 짐승의 피 제사를 십자가의 단번의 사건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잠3:19) 지혜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여러 성경 기자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고 칭송하였습니다(시104:24 ;단2:20,21).
구원 사역도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그 많은 능력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려 대속적 죽음을 당하신 것은 결코 인간의 한정된 지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만 이러한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자신에게 베풀어진 은혜, 곧 구원과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늘 감사하며 그 지혜를 전파하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아야 하겠습니다.
혹 여러분에게 오늘날 삶속에서 지혜가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까?
약1:5은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했습니다.
이 시간도 변함없이, 꾸짖지아니 하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간절히 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012/6/4 익선(고전강해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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