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야 강해

바벨론 멸망의 까닭(사 47:1-15)

호걸영웅 2013. 12. 15. 00:59

바벨론 멸망의 까닭(47:1-15)    

이사야 선지자는 13, 14, 21장 에서 이미 바벨론에 대해 경고하였는데, 오늘 본문 47장에서도 하나님은 다시 한 번 교만한 바벨론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십니다.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벨론의 교만함이 분문 속에서 두 번 기록되고 있습니다. 8절과 10절에 보면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라고 바벨론 왕은 소리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교만한 자의 최후

(47:1-4)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칭함을 받지 못할 것임이니라 (2) 맷돌을 취하여 가루를 갈라 면박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3) 네 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수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4) (우리의 구속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니라) 

  하나님은 바벨론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계속해서 대적하고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은 높은 보좌에 낮아 열방을 통치하던 바벨론을 끌어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티끌에 앉는다” “땅에 앉는다”는 것은 비천한 상태로 전락한다는 의미입니다. 천하를 통치하던 바벨론은 바사 제국의 고레스에게 정복당하여 티끌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맷돌을 취하여 가루를 가른다”는 것도 노예 신세가 되어 맷돌질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는 것”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수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수하신다는 것은 곧 무서운 심판을 의미하고 있는데 그 심판을 내리실 때 사람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고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4절에 그 심판자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이러한 교만이 어디서부터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까?   이사야 14장에서 말씀하셨듯이 바벨론의 교만을 사탄의 교만으로 비유하셨듯이 교만은 사탄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사탄을 상징하는 뱀의 속성 중에 뱀은 머리를 빳빳이 세우고 다니는 동물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땅을 보고 사는데 이놈의 뱀만은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닙니다. 특이한 것은 교만한 자들은 절대로 자신이 교만한지를 모른다는 무지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만이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교만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교만함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자신의 환경이 약하기 때문에 나타나지 아니하고 감추어져 있을 뿐이지, 환경이 변화되고 어떤 권세나 물질을 소유하게 되면 감추어져 있던 교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만은 마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입니다. 사탄은 천사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존귀하게 창조되었지만 그의 교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늘에서 쫓김을 당하였습니다. 사탄은 이러한 사탄의 속성을 인간들에게 심어놓았습니다. 이러한 교만을 어떻게 쫓아내야만 합니까? 먼저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며, 성령 안에서 늘 근신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 교만한 자가 되지 아니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나를 부인해야 합니다.

내가 살아도 너무 살아있기 때문에, 나를 나타내고 싶기 때문에 교만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하라”는 것은 나 말고 오직 예수를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지고 살면 그것이 나를 부인하는 것이고, 내가 교만한 자리에 가까이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하나님 나라도 보고 왔고, 얼마나 신유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났습니까? 심지어 손수건을 병든 자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귀신들이 떠나갔습니다. 충분히 교만해 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예수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예수의 마음을 가진 바울은 교만해 질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마음을 가진 바울은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죽이는 일에 게으르게 하지 아니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오직 예수 안에서 나를 날마다 부인하고 나를 죽이는 일에 게으르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만한 자들이 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쫓아가야 만이 교만한 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곧 고난을 의미하는데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작든지 크든지 고난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결코 나쁘지 만은 않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있고 무릎 끓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곧 고난이 아니라 축복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도 고난이 있었습니다. 남들의 병을 잘 고쳐주면서도 자신의 병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세 번씩이나 간절히 부르짖었지만 응답은 치료가 아니라 말씀으로만 주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고후12:7-9)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예수를 부를 수 있고, 찾을 수 있다면 그 고난은 영광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자들이 눈 앞에 있는 고난을 자기만 당하는 고난으로 생각하고, 너무나 무겁다고 생각하고, 이 고난을 스스로 벗어버리려고 할 때 교만한 자가 되고 영적으로 무지한 자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자기 고난의 짊을 맡기지 않는 것도 교만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 어떤 작은 고난 일지라도 전지전능하신 예수께 구하면 우리의 무서운 짊을 가볍게 해주실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만한 자의 끝은 곧 멸망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성격을 보면 모두가 다 성격들이 온순하고 교만한 모습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교만한 자들입니다.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교만은 없지만 그들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자신만을 의지한 교만들이 가득 찬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교만한 자의 모습

(47:5-11) “딸 갈대아여 잠잠히 앉으라 흑암으로 들어가라 네가 다시는 열국의 주모라 칭함을 받지 못하리라 (6) 전에 내가 내 백성을 노함으로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붙였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7)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 종말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 (8)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9) 한 날에 홀연히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일이 네게 임 할것이라 네가 무수한 사술과 많은 진언을 베풀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 (10)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헤아리지 못할 것이니라”

  이사야는 교만한 바벨론의 몰락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교만한 자의 시작과 끝이 어떻게 되는지 후대에 사람들은 똑똑히 보고 교만한 자로 살아가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벨론 택하여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자 하신 목적은 징계였습니다. 그러나. 무지한 바벨론은 열국의 주모(제왕) 자리에 앉게 된 것이 자신들의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바벨론의 모습은 오늘날도 교만한 자들이 가지고 있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어떤 무지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너무 괴롭혔습니다. (6)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들 손에 붙인 것은 단순히 징계 차원이었는데, 바벨론은 마치 자기들이 심판자요 하나님인양 제멋대로 권세를 휘둘렀던 것입니다. 늙은 자에게까지 멍에를 메게 할 정도로 긍휼함이 없었습니다.

  교만하면 긍휼함이 없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그들이 곧 하나님이 되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월권행위)

  둘째로 영원히 권세를 누리며 살 줄 알았습니다. (7)

  특히 바벨론은 “내가 영영이 주모가 되리라” 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닥칠 일들을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나라에 대한 종말도 생각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권세와 부귀 영화가 영원할 줄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교만한 자들의 공통적인 모습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교만한 자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이 땅에서 한 오백년 살 줄로 생각하나 봅니다. 얼마나 무지한 자들의 불쌍한 모습입니까?

  자신들에게 닥칠 일도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삽니다. 자신들의 종말이 오늘밤에 올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무지한 자들이 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어리석은 한 부자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 하셨는데 이 부자는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12:19)“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12:20)

  교만한 부자의 모습처럼 바벨론도 자신의 앞날에 대해 생각하지 아니하고 살았던 것처럼, 오늘날도 교만한 자들은 자신들의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바벨론에게 흑암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던 것처럼 교만한 자들이 가야 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흑암의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며 살 것입니다.

  셋째로 교만한 자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자들입니다. (8-11)

  8절에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한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왕이 부와 사치 속에서 교만한 자가 되어 버렸듯이 오늘날 교만한 자들도 부와 사치 속에서 교만한 자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또 그들은 10절에 보니,“네 악을 의지하고”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고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무지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내리실 것을 선언하십니다. 9절에 “한 날에 홀연히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네가 무수한 사술과 많은 진언을 베풀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

  다시 말해서 네가 아무리 힘을 쓰고 지혜를 쓴다 할지라도 반드시 비참한 심판을 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며 사치와 쾌락 속에서 영원히 권세를 부릴 것 같은 바벨론은 겨우 86년 이라는 짧은 역사를 남기고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세 번째. 교만한 자들의 영적 상태와 심판

(47:12-15) “이제 너는 젊어서부터 힘쓰던 진언과 많은 사술을 가지고 서서 시험하여 보라 혹시 유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 혹시 원수를 이길 수 있을는지, (13) 네가 많은 모략을 인하여 피곤케 되었도다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월삭에 예고하는 자들로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케 하여 보라 (14) 보라 그들은 초개 같아서 불에 타리니 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치 못할 것이라 이 불은 더웁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니라 (15) 너의 근로하던 것들이 네게 이같이 되리니 너 어려서부터 너와 함께 무역하던 자들이 각기 소향대로(자기들의 갈 길로) 유리하고(흩어져버리고) 너를 구원할 자 없으리라”

  본문에서 인간들이 왜 교만한 자가 되었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들이 의지한 것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진언과 많은 사술” 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에는 마법사, 진언가, 사술가, 사제 등이 있었는데 학식 있는 자들은 사술과 진언을 연구하였습니다. (길흉을 알리고자)

 점성술사들은 세 가지 직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13절에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하늘을 살피는 자” “별을 보는 자” “월삭에 예고하는 자” 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늘을 여러 부분으로 나눈 후에 별들의 이동 상황을 관찰함으로써 땅 위에 되어 질 일들을 판단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별들을 숭배하며 별의 상태를 통해 인간의 운명과 국가의 장래를 예견하였습니다.

  14절에서 불이라는 말씀이 5번 기록되고 있습니다. 철저한 불 심판으로 교만한 자들을 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망령된 지식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부와 권세가 그들을 구원하여 주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만한 영은 곧 사탄의 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세상 지식을 배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그 지식이 나를 교만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세상 속에는 알게 모르게 하나님께 속한 자와 사탄에게 속한 자들이 공존하며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탄의 유혹은 그 어떤 다른 것으로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을 통해서 “너를 위해 살아라” 고 “너뿐이다” 라고 미혹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해 사는 자는 이미 사탄에 속해 있는 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자는 모두가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를 위해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있습니다.

(고전10:31)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먹던지, 그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저는 하찮은 종이오니, 하나님 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013.10.8.익선/참고 :곽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