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아의 방주는 진짜일까?
반론1. 당시 기술로 그렇게 거대한 배를?
구약성서에 의하면 노아의 방주는 총 3층이며 길이 300규빗, 폭 50규빗, 높이 30규빗이라고 기록돼 있다. 규빗(cubit)은 고대에 쓰였던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로 손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에 기준을 둔다. 1규빗은 약 45cm 정도로 추정된다.
이를 기준으로 구약성서에 기록된 방주의 크기를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35m×22.5m×13.5m가 나온다. 이는 현대의 축구장보다 폭은 다소 좁지만 길이는 더 긴 것이다. 부피 또한 4만3,200㎥에 달해 1량에 240마리의 양을 실을 수 있는 화차 522대 분량과 맞먹는 어마어마한 용량이다.(552*240=양132,480마리)
그렇다면 노아는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방주를 어떻게 건조했을까. 일단 방주의 재질은 사이프러스 나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무 사이의 틈은 역청으로 메워 물이 방주 내부로 들어오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방주는 특별한 고급 기술 없이 단순히 목재를 잘라서 이어 붙이고 비교적 단순한 작업을 통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시 기술은 현재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을 것이며 현재 선박 건조장에서 쓰는 각종 전문기구가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 다른 제조법이나 설계 도 등은 일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성서에도 방주의 제작기법을 설명하거나 암시하는 글귀가 없어 정확한 제조 방법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한 기독교계의 해답은?
반론2. 모든 동물을 다 태울 수 있을까?
현재까지 보고된 동물의 개체 수는 포유류 3,500여종을 비롯해 조류가 8,600여종, 파충류와 양서류가 5,500여종이다. 이것들이 모두 방주에 탔다면 그 숫자만도 최소 1만 7,600 마리에 이른다. 게다가 각 동물들을 한 쌍으로 태웠다면 무려 3만5,200마리의 동물이 방주에 올랐다는 얘기 가 된다.
동물들의 크기를 평균적으로 양만하다고 가정할 때 방주의 용량은 13만2,400마리의 양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다. 따라서 용적만 놓고 보면 방주는 실제 승선했던 동물보다 3배 이상 많은 동물들을 무리 없이 태울 수 있는 공간을 갖추고 있다. 다만 동물들을 포개어 놓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방주의 용량 대비 동물의 승선 숫자는 그런대로 수긍 가능한 비율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과학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렇게 하려면 방주를 지을 때 모든 동물의 종류와 개체수를 정확히 알고 있었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존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생물들이 발견되고 있는 등 이는 현대의 과학기술로도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앞서 언급한 산술적인 계산을 통해서도 이런 변수가 있기 때문에 방주가 실제로 구현 가능한지의 여부를 입증하기 어렵다.
이는 방주의 실체를 증명하려는 사람들의 애를 먹이고 있는 부분이다. 그만큼 방주를 고증하기 위한 작업도 만만 치 않다. 방주를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췄더라도 방주의 정확한 제원을 알 수 없어 이를 검증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반론3. 방주 건조 기간이 120년?
방주와 관련된 또 다른 의문은 바로 건조기간이다. 사람의 수명을 감안할 때 120년 동안 배를 만들었다는 것이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물리적으로 배를 만들기 어려운 유년기 시절을 제외한다면 노아가 적어도 130년 이상을 살았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수명은 지금보다 훨씬 긴 200~300세였다고 한다. 이를 곶이 곶대로 믿는다면 수명 대비 건조기간은 납득 가능한 범주에 들어온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이렇게 긴 수명을 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노아가 살았던 당시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의학이 발달한 지금에도 평균 수명은 100세가 채 되지 못하는데 말이다.
창조과학 연구자들은 이를 놓고 당시에는 하늘에 지구상으로 쏟아지는 유해한 광선을 막아주는 수막(水膜)이 있어서 더욱 건강하게 오랫동안 살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대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이 급격히 짧아진 것은 이 하늘에 있는 수막이 지상으로 다 쏟아졌기 때문이라고도 주장하고 있다. 성서대로 해석하자면 지금의 수명은 신 의 징벌인 셈이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기독교계 이외의 사람들을 수긍케 하려면 과학적 근거의 제시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어디에서도 그런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상이 노아의 방주에 대한 반론들이다.
답변)
1. 터키에서 발견된 노아의 방주
지난 2010년 5월27일. 외신들은 중국과 터키인들로 구성된 일명 '노아의 방주 국제전도단' 이라는 기독교 탐사대가 터키와 이란, 아르메니아의 국경에 걸쳐 있는 아라라트산 해발 4,000m 지점에서 노아의 방주로 추정되는 목재 구조물을 발견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탐사대는 발견된 목재에서 표본을 채취, 탄소연대를 측정했으며 이를 통해 목재의 제작 시기가 기원전 2,800년대로 노아가 살았던 시대와 비슷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특히 내부에 여러 개의 칸막이가 있는 점을 들어 이것이 노아가 만든 방주의 일부임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여러 칸으로 구성된 이 목재 구조물은 눈과 화산재 아래에 묻혀 있었는데, 이란에서 실시된
탄소 측정 결과 이 물체가 기원전 2,800년 의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것.
탐사팀은 성서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 건조 시기를 근거로, 이 목재 구조물이 '노아의 방주'로
추정된다는 의견을 최근 언론을 통해 밝혔다. "100%는 아니지만, 99.9% 노아의 방주가 맞다
고 확신한다'는 것이 관계자의 주장이다.
아라라트산에서 발견되었다는 이 목재 구조물은 여러 칸으로 되어 있었으며, 목재 기둥 및
널빤지도 있었다고 탐사팀은 밝혔다.
칸막이의 형태로 볼 때 '동물 우리'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탐사팀의 설명이다.
성서에 따르면, '노아의 방주'는 길이 137m, 폭 23m, 높이 14m로 테니스장 36개를 합친 것과
같은 크기다. 한편, '노아의 방주 발굴' 소식은 해외 주요 언론들을 통해 소개되고 있는데, 언론 및 과학자들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탐사팀이 공개한 자료 및 연구 결과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 구조물이 발견되기 이전에도 아라라트 산에서 노아 의 방주를 본 사람은 또 여럿이 있다.
2. 영국의 브라이스 경이 그 주인 공. 유명 학자이자 여행가인 그는 1897년 아라라트산 해발 3,500m 지점에서 사람이 손으로 다듬은 나무 조각을 찾아 냈다. 이것이 방주의 일부분이라고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노아의 방주 찾기에 가속도를 붙이는 사건이 됐다.
이후 20세기에 들어서며 노아의 방주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증거들도 나오고 있는 추세다.
3. 지난 1960년에는 터키 공군의 커어티스 소령이 아라라트산을 촬영하던 중 해발 2,000m 지점에서 달걀 모양의 한 물체를 촬영했다. 여러 차례의 화산 폭발로 분화구에서 흘러나온 용암 속에 묻힌 기묘한 형태였다. 사진측량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브런 덴부르거 박사는 사진 속의 물체가 거대한 배가 틀림없다고 단언했다.
4. 이로부터 6년 뒤 미국의 고고학 탐험대는 노아의 방주를 찾기 위해 대규모 조사단을 조직해 아라라트산에 올랐다. 이들의 조사 결과 산의 북서부 지점, 깊이 6m 아래에 150m 크기의 거대한 물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나무 조각을 채취해 탄소연대를 측정해보니 4,000년~5,000년 전의 것이라고 판명됐다고 알려진다.
참고로 이곳은 1년내내 눈과 빙하로 덮여 있는 거대한 아호라 협곡이고 테러리스트들이 출몰하는 지역이라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아호라 협곡의 깊이는 그랜드 캐년의 1.5배에 이른다고 한다
그나마 가끔 발견되는 이유는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해에 빙하가 녹아 방주의 일부가 발견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5. 방주관련 주요 기록들 종합
NO |
년도 |
발견자 |
사진 |
1 |
BC 475년 |
갈대아의 대제사장과 역사가 베로수스 |
얼음 위의 방주를 식별하기 쉬웠다고 기록함 |
2 |
93년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기록 |
방주는 아르메니아의 어떤 산꼭대기에 머물렀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은 이 장소를 혈통의 장소라고 부르는데이 도시는 방주가 머무른 산의 발치에 세워진 홍수 후의 첫번째 도시였다, 모세 코레넨시스는 전승에 의하면 세론,분산의 장소라고 불리우는 마을도 이 노아의 방주와 연관이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방주의 유물은 지금도 그 곳 주민들에 의해 곧잘 발견되곤 한다 야만인들의 모든 역사 기록 속에서 이 홍수와 방주에 대한 언급을 찾아 볼 수가 있다 그 중에는 갈대아인 베로수스(Berosus)의 홍수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아르메니아의 코르디아에안스 산맥에 가면 아직도 배의 일부를 볼 수 있는데 사람들이 역청 조각을 떼어다가 주로 화를 물리치는 부적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페니키아 고대사(Phoenician Antiquities)를 쓴 애굽인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와 므나세아스(Mnaseas), 다마스커스의 니콜라우스(Nicolaus of Damascus)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같은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
3 |
360년 |
살라미스의 주교 에피파니우스 |
방주의 유물을 목격함 |
4 |
1254년 |
아르메니아의 역사가 히파프 |
자신이 직접 방주를 봤다고 기록 아라랏산 정상에서 거대하고 검은 물체를 보았다 |
5 |
1269년 |
탐험가 마르코 폴로 |
동방견문록에 "노아의 방주가 눈 덮인 아라랏산 정상에서 쉬고 있다" 기록 |
6 |
1829년 |
독일 물리학자 프레드리히 패롯 |
아르메니아의 한 성당에서 318년에 노아방주의 나무로 만들었다는 십자가 보았음 해발 2000m에 위치한 아호라 마을 방문 그곳은 성 야곱 수도원에서 방주에서 나왔다는 고본과 유물들을 보았음 1840년 6월 아라랏산 지역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마을과 수도원이 모두 파괴됨 이 지진으로 방주가 두개의 조각으로 분리되엇다고 함 |
7 |
1916년 |
러시아 비행사 로스코비카 중위 |
아라랏 정상에서 거대한 배를 목격했다고 증언 이 소식은 니콜라스 황제에게 전해졌고 1917년 황제는 2개 중대를 보내어 방주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고 크기를 측량하여 기록으로 남겼으나 공산당 볼세비키 혁명으로 자료가 소실됨, 황제의 딸이라고 주장했던 아나스타샤는 사진과 보고서를 어렸을 때 보았다고 증언함? |
8 |
2차대전 |
미공군 조종사 밴스윌 |
동료 장교들이 아라랏산의 노아방주를 찍은 3장의 사진을 목격함 |
9 |
2차대전 |
터키 주둔 군인 에드 데이비스
|
터키에서 사귄 친구의 도움을 받아 방주의 끝부분을 발견, 어떤 거대한 존재의 힘을 느낌 |
10 |
1955년 7월 |
프랑스의 폭파전문가 페르낭 나바라와 아들 라파엘
|
1.6m 목재를 떼어냄, 최초 물리적 증거 공개 나무의 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3000년경으로 나옴(동영상 촬영한 필름있음,유투부에도 게재됨) |
11 |
1973년 |
에드 베흘링 터키군인 친구 무스타파 증조부의 안내를 받아 방주 목격 |
길이 50m, 폭은 30m정도가 보였고 끝에서 보면 사각형이라 햇음 |
12 |
1989년 |
터키인 아흐멧 알리 아슬란 박사
|
아라랏산의 북쪽 아호라 협곡 상부 나무로 만든 건물 같은 물체 발견 |
13 |
1902년 |
8세 소년 조지 하고피안과 그의 삼촌
|
방주지붕에 올라가봄 자신이 본 것을 고고학 삽화가 엘프레드 리가 그림 |
14 |
1990년? |
우주 비행사 제임스 어윈과 |
네델란드 TV방송국 직원 얀 반덴 보쉬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찍은 사진 |
15 |
2010년 |
터키와 중국의 연합 탐사대 12000 Feet(3636m)에서 방주발견 |
이미 언급함 |
발견자들의 공통점: 아호라 협곡이라는 위치적 일치가 공통된 내용이다.
6. 노아의 닻이 발견된 아라랏 산 카잔 마을
카잔 마을은 노아의 가족이 방주에서 내려 처음 거주했던 곳이라고 알려진 곳이다
이 마을에서는 특이하게 배를 묶어두는 닻 모양의 돌이 발견된다
닻에는 이곳을 거쳐간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새겨 놓았지만 이것이 닻이라는 증거도 없고 닻이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지만 미스테리이다
고대인들은 지혜도 매우 많았고 장수하였기 때문에 노아방주가 건조될 당시에 이런 거대한 배를 건조할 만한 기술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고대에 지어진 피라미드라던가 바벨론의 공중정원, 잉카 유적 마추픽추 등은 현대에도 흉내내기 어려운 건축 기술이 아닌가?
또한 노아가 살던 훨씬 이전 시대부터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를 이용하여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들었다(창4:22). 고로 방주를 만드는 공구 따위도 상당히 발전 되었을 것이다.
참고: 안젤로 빨레고의 사진: 아호라 협곡의 빙하 속에서 네모난 두 개의 방주 모습이 촬영되었다. 이는 1840년에 있었던 아라랏과 아르메니아 일대 지진 때문에 빙하가 무너지면서 묻혀있던 방주가 파손되어 양분된 최근의 모습이라고 보도되었다. 이 지역은 1988년 12월 7일에도 진도 6.8~7의 세계적 대지진이 있었는데, 당시 아르메니아 인구의 70~80%가 사망했다.
아라랏산 빙원 속 노아방주는 무더위가 극성을 부릴 무렵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 탐험가 안젤로 빨레고는 1998년 8월 30일에 지금까지 노아방주 사진 중 가장 선명한 장면을 촬영했다.
참고: 인터넷 다수의 사이트 /편집:익선 09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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