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화목케 하는 소금(막 9:50)

호걸영웅 2017. 3. 5. 10:16

화목케 하는 소금( 9:50)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서론) 

1. 한국에는 구정과 추석이라는 민족적 명절이 있습니다. 명절이 되면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끼리 화목하고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명절을 잘 지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별로 기분이 좋지 못한 모습으로 명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즐거워야 할 명절을 통해 서로 화목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절을 지내고 나서 불화가 더 깊어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명절이 지나면 이혼률이 급증한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왜 명절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화목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화가 더 깊어지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서로가 소금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50) . 예전에 유대 사회에서는 소금을 두고 언약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것을 일명 소금언약이라고 합니다.

다른 것이 아니고 소금을 두고 언약을 하는 이유는 소금은 불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언약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변치말자는 의미입니다.

 

3. 또 소금은 우리 삶에서 너무나 중요합니다.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예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상의 소금으로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소금은 무려 1,400여 가지의 용도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소금이 인간 삶에서 이렇게 중요한 것처럼 우리의 언약도 중요하고 결코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금을 두고 언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소금을 두고 주님은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금이 중요한 것처럼 성도들이 서로 화목 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4. 그럼 왜 화목해야 합니까?

  먼저 화목 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화목 하는 삶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구원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 화목하신 하나님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우리 성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화목의 직책을 어떻게 잘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본론)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38절에선, 요한이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함으로 금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낯선 기적 수행자들이 누구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이들이 누구이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서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제자들을 따르지 않았는지 궁금한 대목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들이 누구인지는 잘 모릅니다.

여기에서 마가는 그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금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금했다고 하는 함이 잘못된 일이라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한은 자기중심적인데 비해 주님은 자기중심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를 따르지 아니하면 다 원수고 적이라는 편협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따르지 않아도 예수를 인정한다면 적이 아니고 원수가 아니고 우리를 위하는 자들이라고 넓고 관용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분명 자기중심적인 사고 때문입니다.

자기한테 잘해야 그것이 좋은 것이고 자기 마음에 들어야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자기한테 잘하지 못하면 그것은 나쁜 것이고 원수고 적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사람한테 잘해도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고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실제로 느끼는 이야기입니다만 장모님이 시집간 딸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녁밥을 먹고 난 후에 사위가 얼마나 잘하는지 앞치마를 두르더니 설거지를 하고 딸은 과일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설거지를 하고 난 후 빨래까지도 사위가 하고 있고 딸은 계속 텔레비전만 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참 사위가 잘한다, 이렇게 착한 사위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면서 칭찬을 합니다.

며칠 후 이 어머니가 아들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가서 보니 똑같은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자기 아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화가 치밀었습니다.

며느리 앞에서는 뭐라고 할 수가 없어서 나중에 아들을 조용히 불러서 야단칩니다.

‘야 이놈아 너는 자존심도 없냐? 남자가 무슨 설거지를 하냐? 빨래가 남자가 할 일이냐? 정신 좀 차리고 살아라.’똑같은 상황이지만 왜 이렇게 기분이 다른 것일까요?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든지 내가 기준이 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남을 이해할 수 없고, 마음을 넓힐 수 없고, 자기 집착에 빠져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따르지 않아도 얼마든지 주의 일을 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일 수 있습니다.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하고 내 중심이 아니라 주님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살아갈 때 화목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작은 자 한 사람이라도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42절에서 주님은 엄하고 강한 어조로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그렇게 실족하게 하는 죄를 손이 범하였다면 손을 찍어 버리고, 발이 범하였다면 발을 찍어 버리고, 눈이 범하였다면 그 눈을 빼어 버리라고 아주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는 손이 없고 발이 없고 눈이 없는 장애자들만 가득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만큼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이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에게 가장 작은 자 하나가 누구입니까?

가장 작은 자 하나라고 무시하여 실족시키는 사람은 없습니까?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 그리고 집을 나간 탕자와 같은 가장 보잘것없는 작은 자들을 실족시키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그들을 구원하였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어떤 유명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일 상황에 처해 있었을 때 이 선비는 큰 나라에서 지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왕이 그에게 전쟁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마침 그 날이 보름달이 돋았던 모양입니다.

선비가 달을 가리키면서 “이 나라는 저 만월 같고 다른 나라는 초승달에 불과한데 굳이 작은 나라를 칠게 무엇입니까?” 하면서 전쟁을 하지 말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은 흐뭇하여 군대를 거두었습니다.

후에 선비가 작은 나라로 건너가자 그곳의 왕이 우리가 초승달밖에 안되느냐고 그 선비에게 따졌습니다. 그러자 선비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름달은 기울기 시작하지만 초승달은 지금부터 점점 커져갑니다. 왕의 나라가 앞으로 크게 성장할 것입니다. 그러니 싸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왕도 역시 흐뭇하여 전쟁을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지 않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과 화목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소금의 맛을 내야합니다.

  50절 말씀에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고 했습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는 말씀은 소금처럼 살아가므로 화목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소금이 그 중요한 역할을 다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녹아서 조용히 말없이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맛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화목 하는 것도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소금이 되어, 조용히 녹아 줄 때에만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고로(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수고하고 희생이 될 때 우리 가정이 화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맛을 내고 섬기는 생활을 할 때 우리 직장이 우리 교회가 화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겸손하고 내가 십자가를 지고 내가 손해 볼 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론) 

화목하게 하는 책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화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너무나 중요한 책임입니다. 이 책임을 다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중심으로 살지 마시고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 중심으로 살아갈 때 화목의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시키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이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익선 022317/참조:창골산 봉서방& barnab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