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강해

요엘 1장 강해( 메뚜기 재앙의 의미 )

호걸영웅 2017. 9. 29. 23:54

요엘 1장 강해( 메뚜기 재앙의 의미 )

1.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말씀이라

 

 

2.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3.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

 

4.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5.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6.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수가 많으며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7.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8.

○너희는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남자(의 사망)로 말미암아 굵은 동이고 애곡함 같이 할지어다

 

9.

소제전제여호와성전에서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10.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포도원을 가꾸는 자들아 곡할지어다 이는 밀과 보리 때문이라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12.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사과나무와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사람즐거움이 말랐도다

 

13.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14.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15.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16.

먹을 것이 우리 눈 앞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17.

씨가 흙덩이 아래에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18.

가축이 울부짖고 소 떼가 소란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 떼도 피곤하도다

 

19.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목장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들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20.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서론)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를 소선지서라고 말합니다. 대선지서는 그 책의 분량이 많아 두꺼운 것이고 소선지서는 내용이 적고 책의 두께가 얇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소선지서가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분량만 적은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소선지서도 우리에게 큰 유익을 주는 책들인 것입니다. 특히 요엘서는 2장 밖에 안됩니다.성도님들 모두 요엘서를 통해 영적인 유익을 얻기 바랍니다.

. 요엘 선지자와 그 시대

 

요엘 1 1절입니다.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여호와를 통해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요엘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요엘의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The Lord is God)”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엘이 어느 시대에 활동했는지도 정확치는 않지만 유다 왕국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 학개, 스가랴, 말라기 다음으로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로 보기도 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유다왕조 말기 6세기의 예레미야와 유사한 시대의 예언자로 봅니다.왜냐하면 유다의 침공자로서 바벨론을 의미하는 북방의 침략자는 바벨론이기 때문에 그렇고 또한 메뚜기의 다중적 침입처럼 그들은 여러 차례 유다를 침공했기 때문입니다.

 

. 요엘 선지자가 증거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인가?

요엘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전대미문의 엄청난 메뚜기 재앙이 임했습니다. 본문의메뚜기는 땅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메뚜기의 온갖 종류가 쳐들어 왔습니다.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1:4)

.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메뚜기는 이방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인가?” 아니면 “문자 그대로 메뚜기인가?”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답은 요엘서 1장에는 이것이 메뚜기 재앙도 있었지만, 요엘서 2장에 가면 메뚜기 재앙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즉 요엘서 1장은 메뚜기 재앙을 군대 용어로 설명한 것이고 요엘서 2장은 군대의 침략을 메뚜기 용어로 설명을 한 것입니다.

 

실제로 세계 역사 가운데 메뚜기 재앙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벅(Pearl Sydenstricker Buck)의 책 「대지」를 아십니까? 그의 소설을 영화한 것을 제가 영화로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 보면 중국에 어마어마한 메뚜기 재앙이 와서 모든 농작물들을 싹 쓸어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1654년에는 대만에 메뚜기 재앙이 일어나 농산물을 모두 쓸어버렸습니다. 그래서 8천여 명이 굶어 죽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2004년에는 아프리카 세네갈에서 수십억 마리의 메뚜기가 침입해 국가 1년 곡식 생산량의 4분의 1을 먹어 치웠습니다.
그런데 요엘 선지자가 증거하는 메뚜기 재앙의 핵심은 그것이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요엘이 증거하고 있는 메시지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메뚜기 재앙이 경종(alarm)에 불과하고, 더 큰 국가적인 재앙이 올 것인데, 즉 유다가 국가적으로 모두 망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심판이 오게 되면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고 요엘서 1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됩니다.

 

요엘 1 9절입니다.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소제(반찬)와 전제(국물)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출애굽기 29장을 보게 되면 아침과 저녁으로 번제를 드립니다. 그래서 이것을 항상 드린다고 해서 상()번제라고 합니다. 양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고운 밀가루로 소제를 드리고 포도주를 부어 전제를 드립니다.

 

번제는 밥이고, 소제와 전제는 반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번제를 드리면 소제와 전제가 항상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소제를 드리려고 하는데 밀가루가 없고, 전제를 드리려고 하는데 포도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지옥에는 설교를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습니다. 지옥에는 설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찬송을 듣고자 해도 성가대가 없습니다. 또 기도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신음소리만 있을 뿐입니다. 지옥이 아니라 해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어도 드리지 못하는 땅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드리고 있으니 행복한 것입니다.

둘째, 인간의 희락이 말라버립니다.

요엘 1 12절 후반부입니다. “이러므로 인간의 희락이 말랐도다.” 가정에도 필요한 것이 희락입니다. 가정에 가면 “깔깔깔”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와 대화를 많이 해야 합니다. 남편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바가지부터 긁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직장에도 희락이 필요합니다. 교회에 와도 희락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오면 성도들은 모두 윗이빨을 보이고 인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희락이 없으면 다툼과 싸움, 분쟁만이 있을 것입니다. 지옥은 영원히 희락이 없는 곳입니다. 예배와 희락이 사라지면 그 곳은 바로 지옥입니다. 예레미야도 에루살렘에 대한 바벨론의 3차 침공 후 상황을 동일하게 묘사하였지요?

. 요엘 선지자는 대재앙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명령하고 있는가?
요엘서 1장에서는 네 가지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첫째, ‘깨어라(wake up)’입니다. 5절입니다. “무릇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찌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찌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라고 했어요.  술취하는 자는 밤낮을 술의 노예가 되어서 술에 의존하고 삽니다. 술에서 인생의 기쁨을 찾습니다. 대재앙은 이렇게 술 취하는 사람들을 번쩍 정신차리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애곡하라(lament)’입니다. *러멘트

8절입니다. “너희는 애곡하기를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 같이 할찌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모가 어려서부터 혼인할 사람을 짝지어 줍니다. 결혼을 안했어도 남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하고자 했는데 남편이 죽어버렸습니다. 초야도 치루지 못하고 평생 생과부로 살아야 하니 얼마나 애절하게 울겠습니까? 그런 심정으로 울라는 것입니다.


셋째, ‘부끄러워하라(be ashamed)’입니다.

11절입니다.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찌어다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아 곡할찌어다” 농부들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아도 밭에 곡식만 있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내 직장만 안정적이면 되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뭐가 중요하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가지고 주인을 못 알아보는 것은 소보다 못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먹어야 사는 듯 싶게 삽니다.


넷째, ‘부르짖으라(cry out)’입니다.

 14절입니다.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여 장로들과 이 땅 모든 거민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으로 몰수히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찌어다”라고 합니다. 전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합심하여 울면서 기도하라고 지도자들로부터 회개자복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예배만 드리지 말고 진실로 슬퍼하며 기도 하라는 것입니다.

고로 대재앙이 오면 요엘 선지자는 네 가지를 하라 했습니다. 영적으로 졸던 사람은 깨어나고, 세상을 의지하던 사람은 애곡하고, 직업이나 양식과 재물 등을 의존했던 사람은 부끄러워하고, 한 번도 하나님 앞에 진실로 기도해 보지 못한 사람은 진실한 마음으로 부르짖어 보라는 것입니다.

결론)
요엘서 1장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너희는 현세와 내세를 위해서 무엇을 의존하고 있느냐?”입니다. 또 한 가지는 “너희가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안전한 것이냐?”입니다. , 남편, 직장, 형식적인 종교를 의존하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은 메뚜기 떼만 한번 보내도 몽땅 사라져 버린다 말씀하십니다.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다고 믿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자는 요엘을 가리켜서 “오순절의 선지자(Prophet of the Pentecost)”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요엘서 2장의 내용이 사도행전 2장에 그대로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날 이스라엘 백성이 사도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2:37) 베드로가 답변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2:38)라고 했습니다.

 

 온 세계에 대재앙과 전쟁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합니까? 각각 죄를 회개하고, 예수 이름을 믿고,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현세도 행복하고, 내세에도 행복할 것입니다. 현세에도 성령으로 희락이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진정한 희락이 오는 것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현세와 내세에 인간이 의존할 반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종종 일어나는 대재앙은 인간을 근본으로 돌리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091917 안익선 목사/ 참고: 피영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