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 강해

나훔 1장 강해(니느웨의 멸망과 유다의 구원)

호걸영웅 2018. 3. 4. 09:14

나훔 개론

    1. 저자와 기록 연대

  1)저자

나훔서는 선지자 나훔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나훔'으로, 칠십인역(LXX)에서는 '나움'으로, 벌게이트(Vulgate)역에서는 '나훔'으로 명명되고 있다. 그 뜻은 '위인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뜻을 지닌 '나훔'이 본 서의 저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는 이견이 없다. 왜냐하면 나1:1에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출생지가 엘고스라는 것밖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이 엘고스라는 마을은 그 위치가 있어서 학자들간에 이견이 분분하다. 

2) 기록 연대

본 서의 저작 시기는 대략 주전 663-612년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본 서의 기록(3:8)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현재의 '티벳'인 노사몬의 멸망을 주전 661년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니느웨의 멸망(1:12)을 미래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는데, 이 예언은 니느웨가 멸망당하기 이미 4년 전에 되어진 것이라고 한다.

  2. 특징과 목적

  1) 특징

본 서는 요나서와 함께 동일한 대상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지만 그 내용상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요나의 예언으로 인해 니느웨에게 내려질 심판이 유보되었지만, 나훔의 예언으로 인해 니느웨는 멸망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2) 목적

본 서의 목적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대적자들은 결국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요나서와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악인과 의인들에게 보여지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고 있다. 앗수르의 심판은 유다의 구원을 의미하고 있으며, 유다가 당하는 고통은 앗수르의 죄악된 모습을 전제로 하고 있다. 본 서의 내용으로 보아 앗수르의 압제를 받는 유다가 그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앗수르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은 유다인들에게는 기쁨의 소식이요, 희망의 소식이었다.

 3. 메시지와 주제들

 1) 메시지

나훔서의 전하고자 하는 예언은 정확한 것이다. 나훔의 메시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니느웨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심판당하는 니느웨의 모습이다.

 2) 주제들

본 서의 주제는 한 가지 통일된 주제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유다인을 억압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니느웨의 모습이 완전히 폐허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니느웨가 완전히 멸망당하였다는 흔적은 그곳을 지나던 헬라의 군인들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민주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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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훔 제 1장 강해(니느웨의 멸망과 유다의 구원)


 


오늘부터 나훔서를 공부합니다. 이 나훔서는 교만하고 사악한 앗수르에 대해 담대히 저주와 멸망을 선포하는 책입니다.

나훔이라는 이름의 뜻은 ‘위로자’인데 앗수르의 가혹한 통치와 억압 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위로를 증거하고 있습니다(1:2-8). 나훔과 비슷한 이름이 ‘느헤미야’이지요. ‘여호와께서 위로하신다’ 또는 ‘여호와의 위로’라는 뜻이지요. 이 나훔은 엘고스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엘고스는 유다 남쪽 지방의 한 성읍인 시므온 지역에 속한 마을로 추정됩니다. 그 외에는 나훔에 대해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가 예언 활동을 한 시기는 주전 633-612년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본 예언은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이 함락되었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이후에 유대 땅에서 선포되었습니다. 본 서의 대상은 물론 앗수르 나라의 백성들, 특히 니느웨 사람들 그리고 유다 백성들입니다.

주전 약 700년경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니느웨를 수도로 정하였는데 612년에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됩니다. 이 앗수르는 주전 722년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때 쓰임 받은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이 앗수르가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나훔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앗수르 군대는 매우 잔인하고 포악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서도 나훔 선지자는 전혀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 본 오바댜서와 같이 나훔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교만하고 사악한 앗수르 족속들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는 동시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확증합니다. 그러므로 이 나훔서에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 심판과 구원을 다시금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 말씀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은 서론이며 2-8절은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권능을 말씀합니다. 9-15절은 니느웨의 심판과 동시에 유다의 구원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제 좀더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 나훔은 이 서문에서 죄악으로 가득 찬 니느웨에 대해 멸망을 선포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음을 선포합니다.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살던 백성들은 나훔서가 기록되기 100년 전에는 요나의 경고를 받아들여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한 바가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다시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더욱 교만해져서 결국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 나오는 ‘경고(oracle)’라고 하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무거운 짐(burden)’이란 뜻이 있습니다. ( 23:5; 왕하 5:17) 그러니까 이 나훔의 예언은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선포가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변에 위치한 도시로 노아의 아들인 함의 손자 니므롯 ( 10:11-12)에 의해 창건된 도시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성읍이었다고 합니다.

2-8
: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권능과 언약을 지키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특히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노래하면서( 18:29; 3:4-7)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2), 오래 참으시고 (3), 전능하시며 (3-6), 선하시며 (7), 거룩하신 분 (8)으로 묘사하면서 니느웨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원인과 그 필연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이 부분은 부분적인 답관체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2
: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인간의 죄에 대해 질투하시며 보복하십니다. 여기서 질투(투기)한다는 것은 대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열심 또는 강력한 감정을 뜻합니다.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본 절에서는 반복적이며 점증법적인 표현을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는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도 담겨 있습니다. 즉 바로 그 죄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용서의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자들, 하나님의 사랑과 그 법을 무시하는 자들에게는 확실하고도 철저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보수하신다는 의미는 곧 그 백성의 대적들 앞에서 그 백성의 권익을 옹호해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분이 자기 백성에 대해 질투하시는 분이시며, 자기 백성을 보호해 주시려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
: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칫 이 세상의 악한 자들이 즉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아니할 때 실망하기 쉽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김일성을 그렇게 호위 호식하도록 허락하셨을까, 김정일을 왜 당장 심판하시지 않을까 의심할 수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때에 분명히 그 공의는 드러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권능이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회오리바람과 폭풍이 얼마나 위협적인지는 요즈음 카리브 해 연안에 부는 허리케인을 보면 잘 알 수 있겠지요. 이제 니느웨를 심판하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황폐케 하는 회오리바람과 폭풍처럼 파괴해 버리시는 분이 되실 것입니다.

4
: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가에 대해 여러 가지 자연 현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하심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바다를 꾸짖어 말리우심은 홍해 사건을 암시하고 강을 말리우심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던 사건을 암시합니다. ‘바산’은 팔레스틴 동북쪽에 위치한 산으로서 비옥한 토양과 방대한 목장으로 유명합니다( 4:1). 갈멜은 팔레스틴의 서쪽에 있어 포도 재배로 유명합니다. 레바논은 북쪽에 있어 꽃과 나무로 유명했습니다. 이 세 지역은 이스라엘 전 국토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지역이었는데 이들이 쇠한다는 것은 곧 팔레스틴의 모든 영광이 쇠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앗수르의 심판을 선포하던 나훔 선지자가 팔레스틴을 갑자기 언급하는 것은 이 팔레스틴을 하나의 모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6
: 수사학적인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자가 없을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왕하 18:35을 보시면 산헤립의 군대장관은 다음과 같이 히스기야를 모욕합니다. “여러 민족의 신들 가운데서, 그 어느 신이 내 손에서 자기 땅을 구원한 일이 있기에, 주 너희의 하나님이 내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원해 낸다는 말이냐?” 그러나 앗수르는 최후의 승리자가 앗수르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제 머지않아 배우게 될 것입니다.

7
: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는 선하시므로, 환난을 당할 때에 피할 피난처가 되신다. 주께 피하는 사람은 주께서 보살펴 주”신다고 말씀하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동시에 그를 의뢰하는 자에게 선하시며 신실하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자기들이 요새 안에 있으니 아주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시는 그 위로와 안전함에 비한다면 그들의 안전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잠시잠깐의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8
: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는 범람하는 홍수로 쓸어버리시고, 원수들을 흑암 속으로 던지신다.”고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범람하는 홍수’는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를 침략하려고 오는 바사, 즉 페르시아를 가리킵니다. 이와 동시에 니느웨가 멸망할 때 실제로 티그리스 강과 고스르 강이 범람하여 니느웨 성벽의 일부가 유실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겠다는 말씀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들의 영적 상태, 그들의 피할 수 없는 패배, 그리고 궁극적인 영원한 심판 등에 대한 상징입니다.

9-15
: 니느웨에 대한 심판과 유다의 구원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동안 유다를 괴롭혀 왔던 앗수르가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멸망함과 동시에 유다에 평화의 소식이 전하여집니다. 이 아름다운 시적 표현은 사도 바울에게서 구원의 복음으로 인용되었습니다( 10:15). 물론 이 예언의 성취는 주전 612년 앗수르가 멸망( 2:13-15)하고 유다 왕 요시야의 종교 개혁(왕하 22:3-23: 27)으로 나타났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될 구원의 복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샬롬(‘화평’)의 선포는 이사야서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보여 주면서 ( 9:6, 7; 32:17; 53:5; 54:10, 13; 55:12; 57:19) 구속의 약속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9
: ‘두 번까지 수고하지도 않으실 것이다’는 표현은 비록 앗수르가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시켰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는 남왕국 유다는 멸망시킬 수 없을 것임을 뜻합니다. 사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려던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후 앗수르는 예루살렘을 재공격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습니다.

10
: ‘가시덤불처럼 엉클어지고’라는 표현은 앗수르인(니느웨인)들이 서로를 해치며,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게 더욱 성가신 존재였다는 말입니다.

11
: ‘음모를 꾸미는 자’는 앗수르의 산헤립 왕을 가리킵니다. (재위 주전 705-681) 그는 주전 701년에 유다를 위협하였으나 함락은 하지 못했습니다. ( 36-37)

12-13
: 이제 여호와를 대적하는 무리들이 멸망당한 후 하나님의 백성들은 위로와 위안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말씀은 ‘나 주가 말한다.’라는 문구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어느 누구의 침략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초강대국 앗수르와 그 수도 니느웨에 대해 선포하신 이 경고의 메시지가 반드시 성취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13
: 앗수르의 마지막 왕이었던 앗수르바니팔(주전669-627)은 이집트를 정복한 후 유다 왕 므낫세에게 조공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멍에를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 깨뜨리시며 그 결박을 끊으시겠다고 선포합니다.

14
: 산헤립이 섬기는 신들의 집은 이제 산헤립의 죽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왕하 19:37).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니느웨의 여신 이스달의 신상이 니느웨의 파괴된 잔해들 속에 머리가 잘린 채로 나뒹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예언은 겔 32:22-23에 성취됨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시지요. “그 곳에는 앗시리아가 묻혀 있고, 그의 군대가 함께 묻혀 있다. 사방에 그들의 무덤이 있다. 그들은 모두 칼에 찔려 죽은 전사자들이요, 칼에 쓰러진 자들이다. 앗시리아의 무덤은 구덩이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 마련되었고, 그 무덤의 둘레에는 앗시리아의 군대가 묻혀 있는데, 그들은 모두가 칼을 맞고 쓰러진 자들, 칼에 찔려 죽은 전사자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겁을 주던 자들이다.

15
: 여기서 ‘좋은 소식’은 무려 백 여 년 간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앗수르의 멸망에 관한 소식입니다. 나훔 선지자는 이것이 마치 이미 일어난 일처럼 예언을 합니다. (예언자적 완료시제) 한편 이사야 선지자는 사 52:7에서 같은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이것을 바벨론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돌아오는 것으로도 사용합니다. 동시에 이는 또한 신약의 복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즉 롬 10:15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마귀의 쇠사슬에서 건지시고 영원한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 아름다운 소식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그를 의뢰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시지만 동시에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사랑과 공의에 입각한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지만 앗수르와 같이 사악함과 폭정에 의해 세워진 나라는 결국 패망하고 맙니다. 11:22에 보시면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넘어진 사람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에게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사람도 잘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더 영적으로 각성하면서 우리의 삶이 주님 보시기에 온전하면서 거룩한 주의 백성답게 경건을 연습하고 주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의지하면서 아직도 믿지 않는 많은 심령들에게 복음 들고 가서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참조:브뤼셀 한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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