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탕자와 아버지”(누가복음 15:11-24)

호걸영웅 2018. 6. 30. 10:51

탕자와 아버지(누가복음 15:11-24)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2)하나

어떤 사본에,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가 있음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서론)

1. 몇 년 전부터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힐링(healing)’이란 말이 있었습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힐링’은 2011년경부터 한국 사회 전 분야에 광범위하게 퍼졌습니다. 그리고 소위 ‘힐링 산업’이라는 것도 확산되었습니다. 한국관광공사는 트래킹, 휴양림 체험 등을 모아서 ‘힐링 여행’이라고 이름을 붙여 소개했고, 통상 건강식품이라 불리던 발효식품들이 이제는 ‘힐링 푸드’로 바뀌었습니다. 힐링 스포츠나 댄스라는 말도 나왔고, 백화점 문화센터들에는 힐링에 관련된 강좌들이 대거 개설되기도 했었습니다.

 

2. 그 동안 과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으로 먼저 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빨리 달리듯 사는데 바빴습니다. 물론 뻥 뚫린 고속도로를 남들보다 빨리 달리는 맛은 시원하고 상쾌했지만,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에는 날아가는 새를 바라볼 여유도 없었고 석양을 즐길 수도 없었고 길옆의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나 마을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볼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저 앞을 향해 빨리 달려가야만 했습니다. 그것만이 그때는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달리면서 사람들은 삶의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올레길이요 자전거를 타기였습니다. ‘천천히 걸어야 보인다’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완벽한 힐링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요 교회입니다. (그러면 치유를 갈망하며 참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는 세상에게 하나님과 교회는 치유의 손길을 어떻게 베풀어야 할까요?)

 

 본론)

) 둘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1.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힐링 스토리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읽은 ‘탕자의 비유’는 단연 대표적인 이야기죠.  소위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는 오늘 본문을 읽을 때, 대개 그 초점을 탕자, 즉 둘째 아들에게 맞춥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초점을 아버지에게 맞추게 되면, 이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회복과 치유로 나아가는 핵심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 먼저, 이 아버지는 무기력한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11), 둘 다 실망을 줍니다. 특히 둘째 아들은 더 심각합니다.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 했어요.

 

사실 아들이 살아 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사회에서도 결코 옳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아버지의 권위가 재산권에 주로 있었는데, 아버지가 살아 게실 때 그 재산이 자녀들에게 넘겨지는 경우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아버지가 병들어 더 이상 의식이 별로 없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나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럴 때도 아버지가 주도권을 쥐고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는 심각한 병이 들거나 죽기 직전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재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하는 불경한 일이었습니다. 고로 이 둘째 아들은 부모에 대한 생각이 조금도 없고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아주 형편없고 이기적인 인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라 했어요.

 

3.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주신 재산을 불과 “며칠이 안 되어” 정리한 후 집을 떠납니다. 자기가 이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마음이 지금 어떠할지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오직 먼 나라로 여행을 가서 돈을 신나게 쓸 생각에 너무 신이 났습니다. 그러한 그가 얼마 안되어 그 엄청난 돈을 다 쓰고 탕진하여 아주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을 때, 마침내 그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17-19).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 했어요.

 그때 둘째 아들, 곧 탕자는 아주 무거운 발걸음이었습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 가고 싶었던 작은아들이 터덜터덜 천천히 걸어 집으로 행해 가고 있을 때, 아직 먼 거리에 있는 그를 아버지는 발견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아바지는 이미 매일 아들이 언제나 혹 돌아오려나 늘 내다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탕자를 발견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환영해줍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 돌아온 아들에 대한 반가움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4. 사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집안에만 모욕을 준 게 아니라 그 마을 공동체 전체를 모욕 준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나버렸다는 것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을 매정하게 버리고 갔다는 뜻입니다. 다시는 안 돌아올 것처럼 .... 그렇다면 이제 돌아올 때, 둘째의 못된 행실에 대해 분노한 동네 사람들에게 마을의 명예를 더럽힌 것으로 여겨져 돌에 맞거나 내쫓김을 당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바로 그것도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달려가 아들을 끌어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누군가가 자기 아들에게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하고 돌을 던질 때, 그 모든 것을 아버지인 자기가 대신 감당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집으로 맞아들인 작은아들에게 아버지가 베푸는 것들이 모두 힐링입니다.

 

5. 그리고 (22-23)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하십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습니다. 그리고 신발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워줌으로써 주인의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줍니다. 이제 주인의 모든 권한이 그에게 다시 주어졌습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녀를 향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진정한 회개를 하게 됩니다.

 

사실 탕자는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 (19)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는 아무리 과거가 복잡하고 허랑방탕했어도, 아무리 과거가 복잡하고 더럽고 추한 짓을 했더라도......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여전히 나쁜 짓을 하고 살면서, 하나님이 하라는 것은 하지 못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니까 '...이래가지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 혹은 딸이라고 할 수 있겠나?'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너는 내 아들이야. 내 딸이야."라고 봐주십니다.

  ) 맏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1. 그런데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하고 불순종한 것은 작은 아들만이 아니었습니다. 큰아들도 생각이 짧고 불경한 아들이었습니다.

  이제 큰아들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29-30) 라며 몹시 화를 냅니다.  

 

2. 여기에 나타난 아버지는 역시 무기력하고 무능한 분 처럼 보입니다. 버릇없이 대드는 큰아들에게 화를 내고 큰 벌을 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하나님도 무기력하게 느껴집니다. 그분은 전능자이신데도 왜 그토록 무기력하게 보이실까요?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무력함이나 무능함이 아니라, 놀랍게도 그것은 크나 큰 사랑입니다.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우리를 향해 ‘오래 참아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본문의 아버지는 그러한 큰아들의 패역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다정스레 말합니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본문에서 “얘야(My son)!= 아들의 가슴을 흔드는 엄청난 울림의 다정한 호칭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는가?’ 하며 실망하고 분노하면서 하나님에게 대들고 나아오기를 거부하는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은 너무나 다정하게 부르십니다. “얘야!

 

3. 이 시대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 무례하게 대하면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4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 외에, 자기가 만들어낸 제 5 복음서인 ‘내가복음’(My Gospel)을 가지고 자기 편한 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례한 우리에게 똑같이 무례히 행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아버지도 비록 자기 자식일지라도 그들에게 무례히 행치 않았습니다.

  그러한 사랑의 아버지는 맏아들을 타이릅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32)

 그리고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십니다.

 4. 소위 ‘착한 아이 증후군(Good Child Syndrome)’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증후군의 6가지 특성들이 있습니다.

 첫째,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칭찬받고 싶어서, 자기의 진짜 감정을 억제합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을 때가 많습니다. 둘째, 다른 사람을 무조건 따르고 배려합니다. 자기가 손해 보고 희생하는 게 나은 겁니다. 셋째, 자기주장이 없습니다. 그냥 좋은 게 좋고, 모든 사람과 평화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넷째, 연기를 할 때가 많습니다(표리부동). 다섯째, 감정을 억제하기 때문에 말수가 적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 빠져 살 때가 많은데, 그 세계를 들킬까봐 마음을 감추고 삽니다. 여섯째, 한 번 상처를 입으면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착한 아이들은 끝까지 착하지 않고 언젠가 폭발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의 큰아들도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와 맞붙어 싸우거나 야단치거나 훈계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따뜻하게 그를 대해줍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혹시 나 자신이 큰아들과 비슷하다고 느껴지진 않으십니까?

  

[결론]

 1. 둘째 아들은 건방지고 무례하고 당돌한 아이가 아니라 똑똑한 아이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둘째 아들의 욕구는 인간의 발달 단계에 맞는 욕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아버지가 왜 둘째에게 그토록 무기력했고 그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들어주었는가에 대한 답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그 경험을 하도록 허락했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힐링 방법은 ‘허락’이었습니다.

 

2. 큰아들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기다림’이라는 힐링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바꾸고 바르게 돌아와 아우를 용서하고 안아주기를 기다려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훌륭한 치유자의 모습이며, 하나님이 바로 우리에게 그런 치유자이시며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해주셨습니까?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랑을 입은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먼저 내 가족과 형제 자매를 향해, 다 알면서도 허락해주고, 다 알면서도 기다려주는 겁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그들을 예수 아니에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 이웃에게도 그러한 용서와 사랑으로 기다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의 치유를 체험하며, 또 치유의 도구로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야만 하겠습니다.

 

061918 안익선 목사/ 참고: 이준원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