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니느웨로 가고 계십니까?(욘1:1-7)

호걸영웅 2021. 11. 19. 07:09

니느웨로 가고 계십니까?(1:1-7)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1.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2.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서론)

예수 오시기 약 800년 전 즈음에….하루는 하나님께서 요나를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야! 너는 니느웨로 가서 심판을 외칠지어다! 그 성이 심히 악하구나. 그대로 가면 내가 그들을 심판할 수밖엔 없으니 가서 온 백성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여야만 한다고 외쳐라. 그래서 그들이 회개하면 내가 그 성을 용서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멸망시키고 말리라!” 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요나는 며칠 밤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고민했습니다. 가족을 두고 고향을 떠나 꽤 먼 이방의 원수의 나라에 가서, 그것도 좋은 축복의 말도 아니고 철저하게 온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라고 외치기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시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고 수시로 북 이스라엘에 쳐들어와 약탈과 방화와 살인을 일삼았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니 늘 당하는 입장이었던 이스라엘의 백성의 한 사람이요 영적 지도자였던 선지자 요나가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았을 리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동북쪽 니느웨가 아닌 엉뚱한 서쪽 스페인 지역 항구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치게 됩니다.

 

본론)

)하나님을 피해 도망친 선지자 요나

그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3절을 보면 “여호와의 얼굴 을 피하여” 라고 두 번이나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에 유대 나라 사람들은 하나 님이 자기 나라에만 주로 역사하고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기 때문 에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고 그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지 다른 나라에는 계시 지 않는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요나가 하나님께서 계속 니느웨로 가라고 독촉하시면

너무 부담스러울까봐, 결국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것 같은 생소한 나라의 항구, 서쪽 다시스로 도망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니느웨는 지금의 이라크 북쪽에 있습니다. 반면 다시스는 스페인에 있습니다. 이라크와 스페인 은 완전히 동과 서, 반대방향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욥바로 와서 배를 타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도 아닌 하나님을 피해 도망을 치자니, 몸도 고되지만 마음도 얼마나 피곤해졌 겠습니까? 그래서 요나는 배를 타자마자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자기 좋은 배 밑창으로 내려 가서 조용한 곳에 자리잡고 누웠습니다. 그런데……얼마나 지났을까요? 강풍이 불기 시작하더니 배가 심하게 요동칩니다. 하늘이 캄캄해집니다. 예사로운 바람이 아닙니다. 점점 무서운 풍랑이 배를 마구 뒤흔들고 있습니다.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던지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선원들이 살고자 배에서 짐을 바다로 마구 던집니다. 그래도 배는 마구 요동을 칩니다. 그럴 때 선장의 뇌리에 선뜻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뱃사람으로만 수 십년을 살아왔지만 이런 풍랑은 처음 봤다. 각기 우리가 자기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며 아무리 구원을 외쳐도 도무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구나! 분명히 우리 배 안에 용서받지 못할 고약한 죄인이 탄 것 같다. 천벌을 받을 참 악한 죄인이 타지 않고서는 이런 심각한 재앙이 있을 수 없어.'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배 안에 있는 사람을 다 모아 놓고 제비를 뽑았는데 누가 걸렸습니까? 요나였죠. 여러분,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모든 대자연을 누가 다스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선장도 그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죄인 때문에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선장의 마음 속에 제비를 뽑아서 누가 죄인인지 한번 찾아보자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생각입니다.

마침내! 요나에게 제비가 떨어지자마자 드디어 요나는 자기의 죄를 시인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큰 죄를 지은 것이 맞소 라고요. 그러자 선원들이 요나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나? 그러자 요나가 나를 바다에 던지시오. 나 하나 죽으면 당신들도 살고 풍랑도 조용해 질겁니다.라고 했습니다.  선원들은 산 사람을 바다에 던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 지만, 도무지 다른 방법이 없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바다 빠지는 순간, 그 배 밑에는 이미 하나님이 준비하신 큰 물고기 있었습니 다. 그리고 그를 날름 집어 삼켰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산 채로 그 큰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가서 삼일을 있었다 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 앞에 깊이 깊이 간절히 회개했습니다. 2장에 보면 기도 내용이 나옵니다. 그는 마음을 고쳐 먹습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이 자기를 물고기 뱃속에다 집어 넣을 정도로 징계하시는 것을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명해서 니느웨가 가까운 육지에다 토해내게 하셨습니다(쿠웨이트 바다 근처가 아닐까?).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또 동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걸 누가 믿어?' 하고 생각하실 분들이 틀림없이 계실 것입니다. '좀 과학적인 이야기를 해라.' 하는 생각이겠죠.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과학자보다도 굉장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만약 하나님께서 비과학적으로 아무렇게나 만물을 만들어 놓았다면 지구가 지금처럼 멀쩡히 남아있겠습니까? 천문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이 온 우주가 그 법칙대로 조금도 착오 없이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에 하나님이 기록한 말씀이 참 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자료에 의하면, 고래의 종류 가운데 스펌 고래가 있답니다. 아주 덩치가

큰 것인데, 그 스펌 고래의 생김새와 버릇을 연구해 보니 사람을 통째로 삼켰다가 토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일단 사람이 통째로 뱃속을 들어가면 그 뱃속에는 어느 정도의 공기도 남아있다 고 합니다. 그 위 속에서 그 공기를 마시고 이틀이나 삼일을 견딘다고 합니다. 온도는 섭씨 42도 정도 라고 하니까 찜통 더위일 것입니다. 그리고 고래의 강력한 소화액도 살아있는 생물체에는 별 해를 못 끼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례도 있습니다. 1892, 지금부터 약 백 삼십년 전, 2, 포크랜드 근해(남대서양, 아르헨티나 근역)에 포경선 하나가 고래를 잡기 위해서 출항을 했습니다. 배 이름은 동방의 별이었습니다. 대양으로 나가서 한참 있다가 스펌 고래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고래가 출몰하자 배에서 보트 두 대가 내려졌습니다. 각 보트에는 창 사수들이 타고 있습니다. 첫 번 보트에서 쏜 창이 고래를 명중시켰습니다. 고래가 상처를 입자마자 막 뒤틀면서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두 번째 보트가 그만 뒤집혀서 거기에 탔던 버틀러라는 청년이 행방불명 되어 버렸습니다. 몇 시간의 사투 끝에 고래는 쭉 뻗었습니다. 그 고래를 끌어다가 육지에 올려 놓고 하루 종일 껍질을 벗겼습니다. 그 다음에 배를 쪼개고 위를 갈라서 그 속에 있는 것들을 전부 끌어내다가 보니 놀랍게도 버틀러라는 청년이 그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의식은 없었지만 숨은 쉬고 있었습니다. 급히 끌어내서 병원에 싣고 가 치료를 했는데 그가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그 포경 선을 타고 또 고래잡이를 나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거짓말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요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지금도 니느웨에 가면 요나의 언덕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럼 '이천 팔백 여년 전에 있었던 요나의 이야기가 오늘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요?


)요나의 메시지 1

 요나가 주는 메시지= 하나님이 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거역하면 큰 고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순종할 때 우리에게 복이 되지 그것을 거역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우리는 그와 같이 명령 받는 것을 일컬어서 흔히 소명 혹은 콜링(calling)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도 요나와 같은 소명이 있습니까? 흔히들 소명 이야기를 하면 자기와 일반 평신도들에겐 관계 없는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착각입니다. 요나나 우리가 똑같이 우리 모두가 소명자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 해야 할 일을 명령 받은 사람이요 순종해야 될 의무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받은 소명이 무엇입니까? 먼저 일차적인 소명이 무엇입니까? 먼저 구원이 소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저주받은 죄의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셔서 자기의 백성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 구원 자체가 소명입니다. 무엇 하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천국 가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까? 물론 그렇겠지만 그 동안 여유시간이 있습니다. 천국 가기 전에 할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성도가 죽으면 자연스럽게 갈 수 있습니다. 금방 갈 천국도 아닌데 왜 미리 구원해 주셔서 이 세상에 상당한 기간을 살게 해 주실까요? 거긴 어떤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전도와 선교입니다.

)요나의 메시지2

두 번째로 우리의 신분과 이름이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 성도, 증인, 예수의 제자'라는 아주 아름다운 이름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 자체를 생각해 보십시오. 증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 이름 자체가 이미 소명자로서의 신분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제자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서 한평생 사셨습니까?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제자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라는 그 이름 자체가 소명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요나의 메시지3

마지막으로 우리의 삶 자체가 소명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는 더 이상 필요 없어서 내버릴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경험하는 모든 생활의 전체를 거룩한 제사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리는 거룩한 제사가 내 삶이어야 하고 또 우리의 삶 자체가 벌써 소명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일차적인 소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예외가 있습니까? 이런 일차적인

소명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받는 '너희' 속에 저와 여러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했습니다.

바로 ' '증인' 속에 저와 여러분이 있는 것입니다.

(6:33)= '너희는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하나님)의 의를 구하라-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해야 될 의무를 갖고 있는 사람 속에 저와 여러분이 포함된 것입니다.


)이차적 소명

이차적인 소명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먹고 살기 위해, 그저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하는 많은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일들이 소명이 되는 것입니다. 내 신분이 소명자이기 때문에 내가 손을 대는 모든 일들이 소명의 성격을 띱니다.

 

내가 돈을 벌고 있습니 까? 돈 버는 그 자체가 소명입니다. 내가 자녀를 키우고 있습니까? 자녀를 키우는 그 자체가 소명입니다. 나의 전공이나 기술을 살려서 일생동안 어떤 전문 영역을 개척합니까? 그 자체가 소명입니다. 소명이 아닌 생활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의 젊음도 소명에 해당되고 나의 시간도 소명에 해당되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명예가 있다면 명예도 소명에 들어가고 나에게 물질을 주셨으면 물질이 소명입니다. 이것이 이차적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중세기에는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경건하 게 살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기를 원하는 젊은이들은 전부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 결혼하지 아니하고 모든 영화와 물욕과 쾌락을 다 멀리하고 고행하면서 일평생 하나님께 자기를 드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나왔습니다. 그는 교회의 바벨론 감금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는데 그 당시의 잘못된 것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간 성직자들이 고행을 하면서 거룩하게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이나, 저 들녘에 나가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의 노동이나, 가정에서 자녀를 키우고 가정의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을 하는 부인들의 가사일이나 하나님 앞에는 똑같이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거룩하고 소명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람의 믿음을 가지고 측정할 것이지 수도원에 사느냐 수도원 밖에 사느냐를 가지고 측정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제야 성경의 의미를 바로 찾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나는 하나님의 소명 하고는 관계가 없다는 생각을 마음에서 뿌리째 뽑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믿음이 어려서 그럴 수도 있고 성경을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구원받은 여러분 모두가 소명자입니다. 고로 소명을 뿌리치면 고난이 옵니다. 풍랑을 만납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이 이 소명을 가볍게 여기고 요나처럼 다시스로 도망을 간다고 합시다. '먹고 살기 바쁜 세상에 소명이 다 뭐야.' 하면서 예수를 안 믿고 죽어가는 사람이 내 주변에 있어도 전도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어쩌다가 돈을 벌어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소명자답게 쓰겠다 는 생각 한번 가지지 못하고, 시간이 남아도 내가 즐기기에 바쁘거나 처자식 행복하게 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 우리 가정에 주신 소명이 무엇인가 생각하지 못하고 산다면 그것은? 곧 다시스로 가는 생활입니다.

 

결론)

1)오늘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불러서 '너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 명령이 우리가 도망칠 말씀입니까? 흥분하고 너무 감사해서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고 이런 놀라운 사명을 맡기심에 대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2)이런 복음송 가사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라는 노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쉬지 않으시는데 내가 어떻게 쉽니까? 가슴이 찡하지 않습니까?

이 노래는 이어서 '세상 모든 육체가 그의 영광 보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이라고 햇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지금 니느웨로 가고 계신가요? 아니면 다시스로 가는 배 아래에서 잠을 자고 계신가요? 여러분의 요즈음의 삶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102621 안익선 목사/ 참고: 옥한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