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 10장 강해(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변증)

호걸영웅 2021. 11. 19. 07:25

고린도후서 10장 강해(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변증)

 

서론)

연보의 문제를 언급한한 바울은 다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도직 변증에 대한 주제로 편지를 써 내려 갑니다. 이유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후, 유대교 교리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그곳에 흘러 와서 인기나 덕망을 얻은 후, 바울에 사도직을 의심하거나 부인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생겨 났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는 크게 1-9장까지가 전반부이고, 10-13장까지가 후반부에 속합니다. 전반부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려했던 계획이 틀어진 것에 대한 해명과 복음이 가진 우월성, 그리고 연보에 대한 조언들로 채워집니다.

 

그런데 10장부터는 부드럽던 어조가 강력하고 책망조의 분위기로 바뀝니다. 이것은 아직도 그들 가운데 바울을 공격하고 잘못된 가르침에서 돌이키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인 듯 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은 바울의 사적인 내용에 대한 기록이 많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1-6절 교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간절한 부탁

2. 7-11절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한 사도적 권위에 대한 정당성을 위한 설명

3. 12-18절 자기 자랑이 심하다는 대적자들의 비난에 대한 해명-입니다.

 

본론)

 

) 교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간절한 부탁(1-6)

 

아마 바울처럼 많은 유대파 기독교인들에게 비난을 받은 사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비난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바울의 열정 때문입니다. 가끔 말도 안되는 이유 때문에 비방을 받은 경우도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바울은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이라고 소개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앞에서 권위적이거나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고 유하게 행동했었습 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온유했던 것은 그만큼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열심으로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오히려 오해를 사서 권위도 없고 무기력하다는 소리를 듣게 했습니다. 10절 말씀에 의하면 바울은 글에는 강한 힘이 느껴 지지만 실제로 만나 말을 들어보면 힘이 없고 무기력해 보일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참된 기독교 지도자의 성품적 특징을 말한다면, 온유함입니다. 이는 성령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1.     구약에서는 지극히 온유한 자로 성경이 증언한 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온유함은 지도자가 갖춰야 할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스스로 당신은 온유하고 겸손하다 하셨습니다.

  1. 11: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했죠?

오늘날 좋은 교회의 지도자를 구별하는 방법이 많이 있지만.온유하지 않으면 그런 분은 아직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아니며 참된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아닙니다. 사납고 성내길 잘하고 난폭한 교회 지도자는 반드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성도 간에 문제를 심각한 일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신도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납고 고집세고 자기 주장만 하고 남을 비방하길 잘하는 성품을 가지면 성도 간에 트러블이 매우 빈번하고 심각해 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온유하십 니까?

 

이제 3절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비방에 대해 뜻밖의 이야기로 대응합니다. 3절에서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육신적 혈기로 싸우면 똑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히려 자신의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능력(δυνατός)’이란 단어는 사도행전 1:8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을 받고’라고 말할 때 바로 그 단어와 어원이 동일합니다. 사도행전 2:22에서 사용된 ‘권능’이란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고 했어요.

 

사도 바울의 무기는 하나님의 강력한 힘(그분의 역사하심과 일하심을 의지함)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약해 보인다고 하지만, 바울이 사용하는 무기는 육체적이인 강력한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인 힘이라는 것입니다. (이영희 씨 경우, 겉다르고 속다름 ㅎㅎ).

바울은 하나님의 힘이 얼마나 강하신지,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에게 복종하게 만들 정도라고 했습니다.

 

)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한 사도적 권위 설명(7-11)

 확실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육신에 치중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7절에서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라고 비판합니다. 외모, 즉 겉으로 드러난 것에 가치를 두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명령형으로 ‘여러분은 드러난 것을 똑바로 보십시오! 외모나 보면 안됩니다’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7절 중후반부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무슨 뜻일까요?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똑똑히 보아라. 만약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한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에게 속했다. 너희들은 이것을 다시 깊이 생각하라.

 

그리고 분명하게 드러난 증거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왜 그리 분별하지 못하느냐는 책망입니다.

 

누가 사도 바울과 감히 비교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극적으로 체험했고, 수많은 영적 경험과 고난과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선명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운 적도 없습니다. 수없이 목숨의 위협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도무지 아무런 고난이나 희생의 피를 흘린 적 없는 거짓 교사들이 바울을 비판하는 것에 너무나 쉽게 동조하는 성도들을 볼 때, 바울의 마음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글, 곧 편지는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가 아닌 것에는 바울은 강해고 담대하게 변증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형제 자매들 앞에선 한없이 유순하더라도, 원수 사단의 궤계 앞에선 강하고 담대해야 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 바울은 자기 자랑이 심하다는 비난에 대한 해명(12-18)

 3:1에 의하면 바울을 비방했던 대적자들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가지고 다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다른 이방 교회의 어머니와 같고, 아버지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추천서가 어떤 것이며, 누구에게 받았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세상에는 잘못된 추천서도 많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사도 출신이 아닌 바울로서는 그들의 추천서를 확신하기엔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확고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밝힌 것처럼 자신의 복음은 그들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 직접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받은 추천장은 무엇입니까? 물론 일차적으론 은사입니다. 그가 받은 풍성한 은사는 그리스도 외엔 주실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차적으론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세번째는 부활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증거 네번째는 = 십자가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치열하게 고난에 참여했습니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당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음 주에 공부할 고후 11장엔 그 사실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 주를 기대하시라! ㅎㅎ

 

중국 교회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먼저는 삼자교회입니다. 삼자교회는 공산당의 정책을 많이 수용하여 공산당을 기쁘게 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 지도자들에겐 핍박과 고난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부류의 교회가 있는데.가정교회, 혹은 지하교회입니다. 그들이 모이다 들키면 공산당들이 쳐들어와 바로 체포해 갑니다. 감옥에서 온갖 고문과 회유와 체벌을 받습니다. 심지어는 사망하기도 합니다. 가정교회에서는 참다운 지도자를 어떻게 인정해 줍니까? 붙잡혀 들어 갔다 와야 합니다. 그럼 그 사람이 가정 교회의 지도자가 됩니다. 십자가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어요.

 

오늘 본문의 가짜 지도자 교사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추천서 하나를 달랑 의지하여 자기자신을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자기의 파벌을 만들기에 힘썼습니다. 대접받는 일을 즐겨했습니다.

이익을 취하기에 힘썼습니다. 우리가 봐도 누가 진짜 사도며 지도자겠습니까?  맛을 보면 알쟎아요? 누가 진짜 성도입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수고와 위험을 무릅쓰는 자들입니다.  결국 고린도 교인들이 맛을 보고 , ! 바울이 진짜네 라고 결론 얻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거짓 교사들을 교회에서 좇아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17)고 말했습니다.


결론)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입니까? 참된 성도입니까? 참된 지도자입니까? 그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십시다. 남은 고난,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 하십시다. 그래야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111621 안익선 목사/참조: [Pensées]& 유기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