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 11장 강해(사도 바울의 자기 변론 2)

호걸영웅 2021. 12. 19. 08:48

고린도후서 11장 강해(사도 바울의 자기 변론 2)

서론)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 11장 말씀은, 고린도후서를 크게 셋으로 나누었을 때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며, 특히,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주장함과 동시에, 거짓 사도들에 대해 단호히 권징 할 것을 경고한 10 1절에서 13 10절까지의 말씀 안에서도 후반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0장에 들어서면서 목소리 톤?이 갑자기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단호해지기 시작하였고, 한 절 한 절 써 내려가면 갈수록, 그의 격양된 어조와 거친 호흡은 지금도 매우 강렬하게 여겨집니다. 바울이 그토록 강경하고 비장하기까지 한 어투로 시종일관 이야기하는 대상은 두 그룹에 대한 것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자신의 영적 유산과도 같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었고, 또 한 그룹은 그들을 참 복음과 괴리시켜 놓고 고린도 성도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거짓 사도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과 거짓 사도들에게 바울이 취한 태도는, 우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춘 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16절과 17절입니다.

본론)

)어리석게 여져지더라도 자랑해야 했던 바울

16.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바울은 지금, 전혀 하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자신을 자랑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이 일을 그처럼 꺼렸던 이유는 자신을 자랑한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철저히 두 가지 사실을 사전에 못 박아 놓습니다. 첫째는 ‘이제부터 자랑을 하는 자신을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새번역성경으로 다시 보면 ‘주님의 지시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적으로만 볼 때의 자랑이 있다면이란 뜻입니다.

아시다시피, 사울로 불리웠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운명? 혹은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그에게 있어서 주님은 그의 전부였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20:24).

그러한 바울이 지금은 주님이 원하지 않는 일일지 모를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당시의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거짓 사도들에 의해 그들의 언어는 잠식당했고, 생각은 점령당했으며 그로 인해 그들의 신앙은 예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낯선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통한의 눈물을 머금은 채, 바울은 일단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2천 년 전에 고린도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깨어 있지 않으면, 현재에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18절을 읽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결국 어리석은 자랑의 정점은 바로 “육신을 따라, 육신의 일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과 우리의 심령이 맞닿아 있기 위해서는 육신의 일에 우리의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거짓 사도들에 의해 육신의 일에 관심을 빼앗기고 영혼을 잠식 당하고만 있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모습은, 참으로 불안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습니다. 19절입니다.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어리석은 자들’은 바로 거짓 사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 앞에서 행한 일은 ‘어리석은 일’ 바로, 자기 자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헛된 자랑으로 교인들을 현혹시켰고 그들 위에 군림하면서 주님의 교회를 망가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거짓 사도들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기쁘게’ 용납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쁘게’로 쓰인 헬라어 ‘헤데오스’는 ‘쾌히, 기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로, 우리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문미에 오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맨 앞, 문두에 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에 대해 열렬히 환영하는 태도를 취했음을 강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제가 ‘바울의 언어를 고린도 교인들이 이해하지 못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이야기를 전개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한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상태를 바로 이 ‘헤데오스’, 쾌히 기쁘게 라는 단어가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의 심각성은 20절을 통해 더욱 명확해집니다. 새번역성경으로 읽겠습니다.

누가 여러분을 종으로 부려도, 누가 여러분을 잡아먹어도, 누가 여러분을 골려도, 누가 여러분을 얕보아도, 누가 여러분의 뺨을 때려도, 여러분은 가만히 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당시, 종으로 부림을 당해도, 잡아 먹혀도, 골림을 당해도, 얕보임을 당해도, 뺨을 맞아도 ‘가만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코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를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인식하지 못한 체, 오히려 사도 바울을 공격하는 일을 긍정하거나 방치했던 것입니다. 22절을 읽겠습니다.

)바울의 구체적인 자랑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드디어 바울이 어리석은 자기 자랑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자랑은 주를 따라 하는 자랑이 아니라, 이제는 바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고린도 교인들의 눈높이에 맞춘 자랑이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나도’라는 단어를 3번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윗절에 ‘누가’에 해당하는 거짓 사도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비해 결코 세상적으로 뒤쳐지지 않은 자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헬라어는 동사의 인칭에 따라 어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굳이 주어를 적지 않아도 주어의 인칭을 알 수 있는 언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를 3번이나 그것도 연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 만큼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바울의 심정을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히브리인’은 팔레스티나에 기원하는 가문의 출신자, , 혈통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인’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자로, 종교적인 측면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율법적인 전통의 할례를 의미하며, 약속의 상속자임을 밝혀줍니다.

이러한 바울이 드디어 다음 절인 23절의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단어를 기점으로 어리석지 않은 자랑, 진정한 자랑에 대해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23절 하반절에서 30절까지 입니다.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1.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3.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4.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5.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방금 읽은 본문처럼, 이렇게 숫자까지 거론하면서 기록했다는 것은 사실적인 경험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바울, 본인으로서는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 본문을 통해 우리들에게 진정한 자랑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했다. ‘이런 극심한 고난 당한 것이 바로 나만의 자랑이다’는 것입니다. 혹시 요즘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러분들은 자랑스러운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보고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두 번째 자랑입니다.

28절입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것. 그 염려 때문에 내 마음이 눌리는 것, 그것을 두 번째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세 번째 자랑이 이어집니다. 30절입니다.

)약한 것도 자랑이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드디어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은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곧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 약함은 어디서 왔습니까? 고린도 성도들을 자비와 인자와 인내로 대우 한 것 때문입니다. 반면 거짓 교사들은 그들 자신을 높이는 사람들이요, 자신을 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다른 영을 받게 하는 사람들이요, 다른 예수를, 다른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정말로 약한 사람입니까? 우리가 22절에서도 보았지만 당시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는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연약하고 추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연약한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크심을 드러내신 일들을 그는 사도행전의 매 순간 순간, 목격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거짓 사도들처럼 자신들의 강함을 의지하는 교만에 빠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이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것으로 더욱 채울 수 있는 질그릇임을 그는 깨달았기 때문에 약해진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은 다릅니다. 오늘 행여 우리 삶 속에 고난의 순간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면 자랑스러워 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염려했던 바울처럼, 우리 가운데에도 그러한 모습이 드러나기를 기도하십시오. 끝으로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언약함 역시 하나님의 귀한 통로로 사용될 수 있음을 기대하며 우리의 약함을, 아니 하나님의 강하고 크심을 자랑하는 하루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여호와의 손은 결코 짧지 않으십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세 가지 자랑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라기는 바울의 자랑이 우리의 자랑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받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게 하시고,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우리를 동일시하며 염려하게 하시고, 우리의 약함을 오히려 자랑으로 고백할 수 있는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교만하지 않은 주의 백성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12321 안익선 목사/ 참고: 김영준 & 100church.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