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강해

디도서 2장 강해(성도들을 온전케 하라)

호걸영웅 2022. 11. 10. 04:30

디도서 2장 강해(성도들을 온전케 하라)

 

서론)

디도서 2장은 디도서 1장에서 그레데 교인들을 부족함을 질책하면서 교회의 목회자인 디도에게 나이 든 남자 성도나 여성도, 젊은 남자 성도와 여성 성도들을 언급하며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양육되고 변화하며 성장해야 하는 가에 대한 사도 바울의 바른 권면과 교훈의 기록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론)

가)1.=디도에게는 매사에 언행의 일치를 요구합니다.

디도가 사람들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할례를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할례당과 같이 참된 진리를 부인하고 다른 복음(1:7)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1),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10)인 참된 진리를 전하고 가르치라고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도 그런 나쁜 영향력에 휩쓸리거나 연약해지지 말고 바울의 권면대로 합당한 삶을 살아갈 것을 요청했습니다.
(표준새번역, 7-8)=그대는 스스로 모든 점에서 선한 행실의 모범이 되십시오. 가르치는 일에는 순수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책잡힐 데가 없는 건전한 말을 하십시오 ...라고 번역했습 니다.

오늘날 한국 정치인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는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인들이 말과 행동을 달리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즘 기독교가 비난 받는 이유 중 하나가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달리 자기들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행동들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코로나 시대에 있어서도 그런 부분들이 많이 드러나고 확대되므로써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는 통계자료가 있습니다. 자녀들에게도 참 교육은 다름이 아닌 부모의 삶 그 자체입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삶은 설교에 대한 거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예배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도 거룩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2.=늙은 남자들에게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할”(2) 것을 권면합니다.

디도서 22-3절 말씀은 장로, 권사의 자격 요건이기도 합니다. 늙은 남자로 해석된 원어는 장로, 연장자 등을 의미하는데, 이를 존경받는 남자 어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 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누구나 나이가 든 어른이 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모두 다 존경받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존경받는 어른이 될까요?

첫째,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절제로 해석된 헬라어 “네팔레오스”는 “술 취하지 않는”을 의미합니다. 술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술이 센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술에 대해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물에 석회성분이 많기에 일찍부터 건강을 위해서 물 대신 도수가 약한 포도주나 과일주 또는 맥주 등을 마셨습니다. 따라서 그들 문화에서는 식탁에 약하게 희석된 과일주가 있는 것은 늘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약한 술이라 할지라도 절제하지 않고 많이 마시게 될 경우 취하게 됩니다.

 

창세기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당대의 의인이라고 택함을 받은 노아는 홍수 이후 술에 취에 자신의 치부를 자식들에게 보였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치부를 알린 자식의 후손을 저주하는 불행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대의 의인도 술을 가까이하다 보니 이런 실수를 범했는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둘째, 경건해야 합니다. 경건으로 해석된 헬라어 “셈노스”는 “공경할 만한, 거룩한”이란 뜻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인으로 구별된 삶이란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일컫습니다. 참이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갈 때, 거짓이 만연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게 되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저절로 공경 받게 됩니다.

셋째, 신중해야 합니다. “신중한”으로 해석된 헬라어 “소프론”은 “자기의 욕망과 충동을 억제하 는 신중함” 또는 “절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나님 앞에서 신실했던 다윗도 한순간의 욕망과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심복 부하의 부인과 간통을 저지르게 됩니다. 여인이 임신하게 되자 자신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부하를 치열한 적진의 최전방에서 죽게 하라는 살인 교사도 마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죄로 그의 가문엔 살인과 투기와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욕망과 충동 앞에서 조금만 더 신중했다면, 조금만 더 절제했더라면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신중하고 절제하는 사람만이 세상의 유혹으로부 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넷째,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해야 합니다.
나이 많은 남자들에게는 자제력이 있고 위엄이 있고 신중하며 건전한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갖추도록 가르치라-고 했습니다.(공동번역, 2)
건전한 (또는 건강한)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갖추어야 존경받는 어른이 됩니다. “건강한 믿음”은 신실함, 곧 믿을만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사람은 헛된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도 헛된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또한 “건강한 사랑”이란 모나지 않는 사랑입니다.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주님을 사랑하며, 나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강하게 인내한다는 것은 견고하게 서 있는 것을 의미 하는데,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소망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위에 견고히 서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을 했습니다.
(5:3-4)=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죠.

다) 3. 늙은 여자 또는 존경받는 여자 어른들이 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될“(3) 것을 권면합니다.

 

존경받는 여자 어른은 존경받는 남자 어른들과 유사한 자격 요건들 모두를 갖추어야 하되 다음과 같은 요건들 4가지가 더 강조되었습니다.

첫째로 행실이 거룩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를 원어의 뜻으로 해석하면 ”품행이 고와서 존경받는 여인“을 의미합니다. 품행이 고와서 존경받는 여인을 본문 말씀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4-5)는 것입니다.

이를 한자 숙어로 표현하면 어진 어머니이면서 착한 아내를 뜻하는 “현모양처”(賢 어질 현, 母 어미 모, 良 좋을 양, 妻 아내 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의미는 가정에서 남편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라는 뜻입니다. 남편으로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것은 내 남편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창조하신 유일한 배필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할 때, 남편을 남편으로 인정하고 존경하게 됩니다. 이는 곧 남편 역시 아내에 대해 같은 믿음을 지니고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요건은 모함하지 말라는 것인데, “모함하다”로 해석된 헬라어는 “디아볼로스”인데, 이는 “마귀”를 뜻합니다. 내가 남을 모함한다는 것은 내가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탄 또는 마귀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수다스러움이나 음담패설이나 도박이나 음주 나 취미생활 등으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무익한 행위들에서 나오는 나쁜 열매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많은 술(원어상으로 포도주)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하는데, 이는 당시 그레데 나이 많은 여인들이 술에 취해 절제력을 잃거나 아내의 역할을 벗어나는 행동들을 일삼았다고 볼 수 있는데, 절제력을 상실한 여인은 현모양처가 되기엔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가 될 것을 권면합니다.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로 해석된 헬라어는 성경에 본문에만 단 한번 나오는 단어로 “좋은 교사, 좋은 선생”을 의미합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젊은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은 인생의 경험을 갖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남보다 많은 경험을 했다고 해서 모두 좋은 선생이 되지 않습니다. 많은 나날들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내 가정과 이웃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좋은 선생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영향을 끼치는 무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른으로서의 권위는 그녀를 스쳐간 세월의 숫자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신실한 삶의 무게에 의해 저절로 세워집니다. 존경받는 여자 어른의 삶의 무게가 젊은 여성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은 자명합니다.

라) 6. 젊은 남자들에게는 신중한 사람이 될 것을 권면합니다.

“신중하다”로 해석된 “소프로네오”는 “정신을 차리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앞에서 언급한 대로 나이가 들어서도 존경받는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은 젊은 시절부터 하나님 말씀 안에서 바른 정신을 갖고 살아온 나날들의 결과입니다. 내가 존경받는 어른이 되겠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사람들이 나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즉 내가 신앙인으로 젊은 시절부터 어떤 족적을 남기면서 살아왔느냐에 따라 나이가 들었을 때 그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마)종들에 대해서는 9-10.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9-10)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처음부터 애굽의 총리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들의 질투로 인해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하여 애굽에 팔려가 종이 되었지만 범사에 순종했습니다.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여주인의 지속적인 유혹에도 그는 주인으로부터 그녀를 멀리했습니다. 자신을 무시한 여주인의 간계로 강간미수범이라는 파렴치한이 되어 죄인의 신분으로 감옥에 수감되었 지만, 그는 감옥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신실하게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삶의 결과로서 그는 마침내 애굽 왕의 꿈을 해몽할 수 있게 되었고, 결국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범사에 순종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신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종들은 순종하는 자세를 잘 지켜 나가야 합니다.


또 훔치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것을 훔치다 보면 큰 것도 훔치게 됩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이 됩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것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착각하여, 하나님의 것을 훔치며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로 인해 이 사회에는 정의도 윤리도 도덕도 공익도 다 무너져 버립니다. 누가 이 무너진 사회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 (14)=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의 보혈로 우리를 속량하시고 깨끗하게 하신 이유는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12)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14)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13)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존경받는 어른”으로 살아가는 삶이며, 존경받는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기절제를 통해, 자기의 이로움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이로움을 추구하는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결론)

지금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믿고 허락해주신 귀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나날들을 어떤 시간들로 채워가느냐?"에 따라, 우리는 존경받고 본받을 만한 어른이 되기도 하고, 아니면 전혀 무익하고 괴퍅하고 무절제한  늙은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 우리 주님의 은혜에 힘입어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통해, 이 땅을 향하신 주님의 구원의 역사가 아름답게 펼쳐질 것을 목표로 두고 살아야 합니다.

                              110822 안익선 목사/참고: 이창호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