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강해

디도서 3장 강해( 성도답게 살되 이단은 경계하라 )

호걸영웅 2022. 11. 10. 04:31

디도서 3장 강해(  성도답게 살되 이단은 경계하라 )

서론)

디도는 ‘그레데(크레타)’ 섬의 목회자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은 오순절에 성령님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온 이방의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통하여 복음을 전했는데, 신비하게도 사람들은 자기 나라 언어로 들었습니다. 그때 말씀을 들었던 사람 중에 ‘그레데인’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레데 교회의 시초라고 보곤합니다.

,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는 중에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해서 그 섬에 들른 것이 나옵니다. 바울 자신은 그레데 섬을 떠나면서도, 디도를 남겨둔 이유가 이러하였습니다.
( 1: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라 했죠.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 섬에 남겨 둔 이유는 두 가지, 남은 일을 바로잡고(세워진 그레데 여러 지역의 교회들을 굳게 잘 세우고), 장로들을 세우는 것(지도자들을 ㅔ워 잘 가르치고 다스리도록)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레데 사람들의 특징을 바울 그 섬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1:12)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라고요.

당시 그레데  사람들이 얼마나 진실하지 못했던지 ‘그레데 사람처럼 말하다’라는 말은 바로 거짓말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그레데인의 삶’은 ‘거짓말’로 통했습니다. 당시 그레데 사람들을 풍자하는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그레데 사람들은 말한다. 그레데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그렇다면 그 말 또한 거짓말이 아닌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말만은 진실이다.”라고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거짓된 삶으로 일관하고 있다면, 바로 우리가 그레데 사람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디도서 2:1-3:11까지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는데, . 그 중에서 오늘 본문 1-8절은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사회생활 지침과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본론)

) 그리스도인의 선한 삶(1-8)
(1-2)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했어요.

‘통치자들(시작하는 사람들)’은 ‘왕을 비롯한 최고위 관리들’을 지칭하고, ‘권세 잡은 사람 들’은 ‘통치자들 아래에서 실제적으로 다스리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로마서 13:1-7의 말씀과 비슷합니다.

 

이 말씀은 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이 단지 성경을 열심히 읽고, 규칙적으로 기도를 드리며, 예배를 빠지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일에 성실하고 신실한 것들이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구체적으로는 네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아무도 비방하지 않는 것인데, 다른 사람을 폄하하거나 폄훼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투지 않는 것인데, 다툼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관용하는 것인데, 법과 규범 등 사회적인 약속을 지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지킴을 포함해서 사람을 품고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넷째는 범사에 온유한 것인데, 잘 훈련되고 교육되는 것입니다. 특히 ‘온유’는 본래 야생마를 길들일 때 사용하던 용어였습니다. 야생마는 힘을 굉장히 좋을지라도, 굉장히 거칠어서 거기에 사람이 탈 수도 없고, 짐을 실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야생마가 잘 훈련되면, 아무렇게나 사용하던 거친 힘을 주인을 위해서 사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잘 훈련되었을 때, ‘온유해졌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주님의 말씀으로 훈련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1절과 2절에서 마음에 새겨야 할 말은 ‘모든 사람에게’입니다. 위에 있는 권세에 순종하는 것뿐만 아니라 비방하지 않음, 다투지 아니함, 관용함, 온유함 등을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악한 사람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깨닫게 되는 중요한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뜻 앞에서 나의 이익이나 개인적 주장은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로마는 바울을 당시 핍박하고 가두고 결국은 처형했던 제국이었습니다. 그런 제국의 세력에 저항해 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순종하고 순응하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통치섭리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로마는 하나님이 예정한 제국이었습니 다. 이는 마치 예레미야 때에 바벨론에게 순응하고 항복하라는 말과 똑같은 상황입니다. 결국 유대나라는 그들의 쌓인 죄로 인해 로마의 지배를 받아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로 바울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자기 개인의 유불리를 떠나 순복함이 당시 성도들의 바른 자세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3절로 옵니다. 그럼 바울이 그레데 사람처럼 악하고,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었겠습니까?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라 했어요.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이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도 과거에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자기의 뜻과 자기의 열심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었지만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레데 사람 들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지금은 비록 자신의 욕망을 따라서 형편없는 삶을 살고 거짓된 삶으로 일관하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4-7)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했죠?

.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얻은 것은 결국 주님의 사람 사랑하심, 주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우리 같은 용서받기 어려운 죄인들까지 포함시켜 주셨습니 다.


‘신데렐라’ 동화에서 신데렐라가 왕자비가 된 것은 그녀가 본래 최고의 귀족이었기 때문이거나 무슨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5절의 표현으로 하면, 왕자가 그를 긍휼히 여겨 주었고, 그녀를 사랑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왕자비가 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바른 왕족의 관습과 행실이 몸에 배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교육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하나님 자녀 되기는 쉽지만 자녀답게 행동하는 것은 시간이 걸립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교리적인 용어로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점점 완성해 가는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6절에 의하면 주님 예수께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영원한 삶을 살아가기에 걸맞은 상속자가 되게 만드실 것이라 했습니다.

(8)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바울이 디도에게 지금 말하는 것을 굳세게 말하라고 하는 것은 강조해서 증거하라는 의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은총을 부어 주시는 것은 선한 일을 힘쓰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 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의 증거는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선한 일을 많이 하느냐로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즉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성경을 읽고, 오래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그 삶이 얼마나 더 아름다워졌는지, 신실해졌는지로 나타 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단에 대한 경계(9-11)
9-11절은 이단에 속한 사람에 대한 경계와 대처 방안에 대해 권면합니다.
(9-11)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종교에 대한 논쟁은 ‘피하라’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종교나 가치관이 논쟁을 통해서 변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단(異端_다를 이, 끝 단)’은 끝이 다르다고 해서, 처음과 과정은 같고, 끝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말단직원(末端職員), ‘단말기(端末 機)’처럼, 처음부터 끝에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처음부터 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단에 속한 사람을 멀리하라고 교훈합니다.

)
끝맺음 인사(12-15)
12-15절은 여러 사역자에 대한 배치와 마지막 문안 인사입니다.
(12-14)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노라 율법교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그들로 부족함이 없게 하고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고 했습니다.

아데마와 율법교사 세나는 디도서 본문에만 등장하는 인물이기에,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 길이 없습니다. 두기고는 바울의 동역자로 바울의 옥중서신을 전달한 사람입니다. 또한 아볼로는 알렉산 드리아 출신으로 성경에 능통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 하나님의 도를 자세히 들었으며,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훌륭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하(21)에서도 살핀 바, 다윗이 다윗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함께했던 정의롭고 용맹한 부하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에는 독불장군이 없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깊이 명심하고 있었습니다.

디도서의 종결 부분입니다.
(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문안 인사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디도에게도 문안 인사를 전하라고 권합니다.

그것이 형제 자매 사랑을 돈독히 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서로의 형편을 알아야 서로 기도해 주고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결론)

이전의 자연인으로서의 우리는 그레데인처럼 살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지 않게 된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지켜 주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 말씀과 섭리에 순복하여  예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한 주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10922 안익선 목사/ 참조:
 정한조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