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강해

요나 3장 강해(심판을 외친 요나와 회개한 니느웨)

호걸영웅 2024. 12. 5. 00:52

요나 3장 강해(심판을 외친 요나와 회개한 니느웨)

서론)

성경 요나는 선지서에 해당함에도 불구가 그 내용은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잘 아는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같은 4장으로 구성된 ‘말라기’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아주 일부분만 알고, 3장으로 구성된 ‘요엘’, ‘나훔’, ‘하박국’, ‘스바냐’의 내용 역시 아주 일부분만 알거나 거의 아는 부분이 없습니다. 사실 이런 성경이 몇 장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아는 그리스도인도 극소수일 것입니다. 반면에 요나에 대해서는 많이 압니다. 그러나 요나가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그 어떤 성경보다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대해 증거합니다.

본론)

)소명에의 순종한 요나(1-4)
1-4
절은 하나님의 두 번째 소명에 순종하는 요나 선지자에 대해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요나서 2 10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니느웨로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려고 했던 요나는 결국 사나운 바다물결 가운데 던져졌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여 보내신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머물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물고기에게 지시하셔서 요나 선지자를 토하게 하십니다. 그 큰 물고기 뱃속은 요나를 선지자답게 만든 하나님의 특별 훈련장이었습니다. 육지에 토해냄을 당한 요나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또 임했습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 선지자에게 두 번째로 임했다는 것은 요나 선지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참 크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엉뚱한 길로 가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불러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친히 다스리시는 하나님께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과 똑같이 다시 불러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말씀을 읽고 들을 수 있음도 하나님의 반복적인 부르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를 두 번째로 부르심은 하나님의 시선이 이스라엘에만 머물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사랑하신 것은 틀림없지만, 이스라엘만 사랑하신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하겠다고 하시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온 세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 할 때, 그 숫자가 장정(가장, 家長)만 해도 603,550명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잡족( 12:38)’도 함께 나왔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있었던 10가지 재앙을 보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확인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혈연공동체’가 아니라 ‘신앙공동체’였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대인’이라고도 하는데, 그들이 조상으로 여기고 있는, ‘아브라함’ 역시 가나안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 도시 갈대아 우르 출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30년간의 광야생활 후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데, 그 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이방 여인 라합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신앙고백을 함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로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조상까지 되었습니다.

 

또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과 이세벨에게 쫓겨 도망자의 삶을 살 때, 시돈 여인인 사르밧 과부가 도움을 주었습니다. 시돈은 이세벨 왕비의 고향입니다. 시돈 지방이 바알 숭배가 극에 달해 있을 때에도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시선은 이스라엘에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온 세상을 향했습니다. 거기에는 니느웨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이 말씀은 1:2 상반절의 말씀과 똑같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가 불순종하지 않은 것처럼, 처음과 동일하게 사명을 부여해 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 말씀을 받는 요나 선지자의 마음은 결코 동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말씀에 순종해서 도착한 니느웨의 규모가 어떠한지, 3절에서 증거합니다.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니느웨의 둘레는 사흘 동안 걸어야 할 만큼 큰 도시였습니다. 요나의 마지막 절에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사람이 12만여 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어린아이들입니다. 고대에 7세 미만의 아이들은 전체 인구의 약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니느웨의 인구는 약 60만 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니느웨가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는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최상급을 표현하는 히브리적 관용구입니다.

 

10:9= 니므롯이라는 사람에 대해 ‘여호와 앞에 니므롯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은 그가 굉장히 뛰어난 사냥꾼, 최고의 사냥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처럼 니느웨는 하나님께서조차 오! 크구나! 라고 인정하신 큰 도시였습니다.

(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그러나 요나 선지자는 사흘 동안 걸어 다녀야 다 돌 수 있는 니느웨 거리를 관통하여 하루만 다니며 외쳤습니다.
그 하루 동안 동쪽에서 서쪽까지 횡단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대표적인 장소에서만 외쳤다고 말하기도 하고, 하루 동안 외치니 사람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사흘 동안 다닐 필요가 없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후의 반응을 보면, 니느웨의 회개가 신속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흘 동안 다녀야 할 길을 하루만 다닌 것입니다. 즉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가 회개하지 않고, 멸망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가 외친 메시지는 그들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마치 니느웨 사람들은 사형집행 날짜가 40일 앞으로 정해진 사형수와 같았습니다.

)니느웨의 심판 연기되다(5-10)
5~10
절은 요나 선지자의 메시지로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와 연기된 심판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요나 선지자가 마음을 다해서 메시지를 전하였고 성령이 역사하셔서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를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이나 있다가 나온 사실이 알려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일을 행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금식’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데, 그것을 금하는 것은 자신의 생사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굵은 베 옷’은 장례식이나 국가적인 재난을 당할 때에 주로 입는 옷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지금이 국가가 죽는 것과 같은 재난 상태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6-8)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니느웨 왕에게 그 일이 들렸다고 하는데, ‘그 일이’의 문자적인 뜻은 ‘그 말씀이’입니다. 요나가 전한 메시지와 백성들의 회개를 겸한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니느웨에 거주 중이던 왕도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습니다. 욥이 하루아침에 10명의 자녀와 모든 재산을 잃고,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났을 때,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었습니다. 니느웨 왕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4가지를 선포했습니다.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말 것과 굵은 베옷을 입을 것,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것, 그리고 악한 행위에서 떠날 것입니다. 그들의 회개는 요나가 기대한 것 이상이었을 것임은 확실합니다.


(9)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니느웨 왕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알겠느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가 아니라 ‘정황상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죄가 크지만, 하나님께서 뜻밖에 용서의 일을 행하실지 모르니 가능성을 열어 두자’의 의미입니다.

한편 반대의 경우,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한 이야기도 성경에는 있습니다. 열왕기하 7장에,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시리아의 왕 벤하닷에게 포위를 당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하게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하지만 엘리사 선지자는 내일 이맘때쯤에 포위도 풀리고, 물가도 거의 본래대로 복귀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 장관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창을 내신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하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그것을 당신의 눈으로 볼 것이지만 먹지는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엘리사 선지자의 말대로 이루어졌을 뿐만이니라, 그 장관은 백성들에게 밟혀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10절입니다.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니느웨를 보시고, 심판을 철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심판을 즐기지 않으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신 것을 보여줍니다.

요나 선지자는 특이하고도 특별한 은총을 입어서 두 번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니느웨로 향했습니다.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그 악독함이 하나님께 상달할 만큼 잔인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가기가 두렵기도 하고 끔찍하게 싫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니느웨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결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 행사 때에 두루마리로 된 성경을 펼쳐서 읽곤 하는데, 그 중에서 ‘메길로트(오축_다섯 개의 두루마리, Five Scrolls)’라고 불리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유월절에는 아가를 읽었고, 칠칠절(오순절)에는 룻기, 예루살렘 멸망일에는 예레미야애가, 하만의 유대인 몰살 계획에서 벗어난 날을 기념하는 부림절에는 에스더,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에는 전도서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7 10일은 ‘대속죄일’인데, 그날에는 요나를 읽습니다. 일차적으로는 니느웨 사람들처럼 회개하자는 의미이겠죠?

그런데……그러면서 예수를 안 믿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요나 시대에 니느웨 사람들만큼도 아직은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가는 영원한 사망과 저주로 치러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늘 여러 번의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예수님 안에서 함께 성숙하고 지어져 감으로써, 온전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우리에게 가라고 하시는 곳은 어디든지 묵묵히 향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20324
안익선 목사/ 참조: 정한조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