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4장 강해(잘못된 요나의 불평과 분노)
찬송가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서론)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의 본분은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인생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가하거나 감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자기 생각의 틀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심판은 외쳤지만 니느웨의 죄가 너무 커서 심판을 피하진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과 빗나가자 요나는 분노하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론)
가) 분노와 불만에 휩싸인 요나(1-4)
매우 감정적이고 독자적인 요나의 상태를 본문은 이렇게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요나의 반응은 싫어함과 분노였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회개를 받아 주시며 용서해주신 것에 대해 지극히 불공정하다고 여겨 매우 분노했습니다.
(2-3)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여기서 요나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기에 다시스로 도망갔었고, 그대로 두었다면, 니느웨는 심판을 당했을텐데, 자신을 불러 사용하심으로써 심판을 피하게 되었다고 불만을 섞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며 요나는 하나님께 죽음을 구합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나는 민족의 원수, 니느웨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이 상황이 죽는 것보다 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독립투사형 선지자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를 보며 아이러니한 것은 요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나는 출애굽기 34장 6~7절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성품처럼, 인애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요나였지만, 원수를 향한 분노에 감정에 휩쓸려 냉정을 잃었습니다. 그저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이 자기의 뜻과는 같지 않으며, 이러한 상황이 죽도록 싫다고 하나님께 항의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답변은 외마디의 질문으로 돌아왔습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는 자기가 분노한 지금의 상황으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했고,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질문에 상세한 설명을 곁들인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그저 그의 분노가 옳은 것인지를 질문하십니다.
니느웨의 악독함과 요나의 분냄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요나 역시, 니느웨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완악한 상태였습니다. 요나의 메시지를 들은 니느웨는 하나님 앞에 회개했지만, 요나는 그것마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악을 행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도리어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 당시의 요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요나를 보며 우리의 모습을 또한 발견합니다. 먼저는 우리의 상당수가 요나가 원수된 사람이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인을 미워하듯!)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는커녕, 원수의 회개마저도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 죄 된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교훈은 회개와 용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를 한없이 베푸시는 사랑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또한 요나의 모습 속에서 보게 되는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은 자기 중심적인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램프의 요정처럼 생각하며, 필요할 때 찾으나, 필요 없을 때에는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떼를 쓰듯 계속해서 기도를 합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나아가겠다고 했으나, 정작 내가 서 있는 곳은 내 뜻에 닿은 곳일 때가 많이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자기 중심적인 신앙을 걷고 있는 우리를 향해 “네가 옳으냐?”고 하나님을 말씀하시곤 합니다.
나)긍휼하신 하나님(5-11)
이제 할 말을 잃은 요나는 니느웨 성읍 동편 밖으로 나가 자기를 위한 초막을 지어 거기에 앉았습니다. 요나는 그저 하나님이 그 성읍에 무슨 심판을 행하시는지 여전히 궁금해 하며 관찰자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불만을 어느 정도라도 무마해 주시진 않을까? 마음을 조금이라도 바꾸지 아니 하실까? 얼마간이라도 죽게 하시거나 얼마간의 성을 무너 뜨리시지 않으실까? 하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니느웨보다는 요나에게 새로운 행동을 취하게 되셨습니다. 6-8절에 ‘예비하사’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이 요나에게 향하고 있으며, 그 사역의 도구로 ‘박넝쿨’(6절), ‘벌레’(7절), ‘동풍’(8절)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나서에는 참 다양한 하나님 사역의 도구들이 발견이 됩니다. 1장에서는 ‘폭풍’과 ‘큰 물고기’가 사용되었는데, 4장에서는 또 다른 세가지 사역의 도구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돌이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역의 도구들을 사용하심을 깨닫게 되며, 생명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참으로 은혜롭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을 요나서는 알게 해 줍니다.
6절은 요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역의 첫번째 사건이었습니다.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박넝쿨로 그늘을 순식간에 만들어 주셨습니다. 박넝쿨의 은혜를 입은 요나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7-8절을 통해 이제 두번째와 세번째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7-8)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벌레를 통해 어제에 베푸셨던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셨습니다. 1장에서 잔잔한 바다 가운데 바람을 던져 풍랑을 일으키고 요나를 공격했던 것처럼, 박넝쿨 가운데 벌레를 통해 그것을 마르게 하셨습니다. 두 사건은 방법에 있어 차이가 있었으나, 모두 초점은 요나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박넝쿨이 말라버리자, 그늘을 잃은 요나에게는 설상가상 뜨거운 동풍까지 불어오고 뙤약볕이 내리쪼였습니다.
‘쪼이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카’는 ‘치다, 때리다, 공격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사역의 세번째 도구는 분명히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공격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응답합니다. 3절의 고백과 같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낫다는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이제 다시금 하나님은 요나를 향하여 질문하십니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박넝쿨로 분노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냐?”는 하나님의 이 질문은 요나가 분노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옳다고 주장합니다.
(10-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10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는‘너’(요나)가 사랑한 ‘박넝쿨’과 ‘나’(여호와)가 사랑한 ‘니느웨의 12만여명의 사람들’이라는 두 대상을 통해 대칭적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하룻밤에 말란 버린 무력한 박넝쿨의 사라짐을 안타까워했던 요나 이상으로, 하나님께서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한 니느웨의 백성을 안타까워하심이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말씀합니다. 박넝쿨의 가치와 수십 만명의 목숨이 어찌 비교가 되겠습니까?
여기서 요나는 하나님께 자신의 부족을 회개 자복하며 항복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결론)
단순히 인간적으로 볼 때는, 요나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는 자기 민족의 원수였던 니느웨에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무겁고 합당치 아니하다며 자기의 감정과 생각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는 달리 도망쳤고, 또 요나서의 마지막 부분까지도 하나님을 향해 분노와 불평을 표출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뿐 아니라, 그러한 요나를 끝까지 사랑하시기에 그를 여러 모양으로 이해시키고 하나님이 더 옳으심을 설득해 주셨습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를 향하여 사랑과 용서와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함으로써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과 은혜를 더욱 널리 알리는 선지자적 삶, 혹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121024 안익선 목사/참조: 정인철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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