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 1장 강해 제1부 (예수님은 곧 아들 하나님이시다,1~5절)

호걸영웅 2025. 1. 16. 06:05

요한복음 1장 강해 제1 (예수님은 곧 아들 하나님이시다,1~5)  

< 1: 1-5>

 요한 복음은 다른 세 개의 공관 복음서(공관복음 또는 공관복음서란? 고대 그리스어의 syn opsis 이 합쳐진 낱말 Synopsis를 한자어로 직역한 말. 구체적으로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를 일컫는다. 그 이유는 이 세 복음서의 관점이나 진술이 거의 일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복음서를 해석하는 데 서로 대조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와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1)예를 들면,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무대가 주로 갈릴리 지역으로 나타나지만,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주변에서 주로 명절에 활동하신 것으로 나옵니다.

2)또한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딱 한 번만 유월절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적어도 3 번 이상 유월절을 보내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3년 이상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바로 요한복음 때문입니다.

3)또한 공관복음서에 자주 나타나는 '비유'가 요한복음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 대신에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8가지의 '표적들'(signs)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4)기록시기도 공관복음보다는 뒤쳐진 후기로 보고 있습니다.

5)또한 초대교회 교부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요한복음을 '영적인 복음서'(the spiritual Gospel)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이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나 어떤 정보보다 예수님을 어떻게 영적으로, 신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요한복음을 공관복음서와는 다른 ' 4의 복음서'(the Fourth Gospel)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 1-18은 요한복음의 서론(prologue)부입니다. 하나의 찬송시와 같이 아름다운 문체로써 앞으로 펼쳐질 요한복음의 모든 내용을 축약해 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주목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당시 유행하고 있었던 'LOGOS,' '말씀'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로고스 기독론 때문에 요한복음은 시작에서부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복음서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쓴 주석책들을 읽어보면 한결같이, 이 서론 부분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이 부분을 잘 이해하면 요한복음 전체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론)

  1: 1-18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1) 1-5절은 태초에 우주만물이 창조될 때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2)6-13절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에 어떻게 한 줄기 빛과 생명으로 오셨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14-18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성육신(成肉身)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먼저 요한복음의 서론 중에서 첫 번째 부분에 속하는 1-5절의 내용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말씀(로고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말씀을 분석해 보기 위해서는, 왜 요한복음 기자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무척 어려운 추상명사 'LOGOS,' '말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유대인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아주 몇 군데, 이를테면 두로나 시돈, 데가볼리 등의 이방 지역을 잠깐 들리셨을 뿐, 팔레스타인 지역을 거의 벗어난 적이 없으십니다. 이렇게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자라나셨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은 주로 유대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 선포 과정에서 중대한 문제가 하나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30년 정도 지나자, 기독교가 유대 지경을 넘어서 소아시아와 그리스, 로마에까지 널리 전파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까지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주후 60년경에 이미 10만 명 이상의 헬라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중대한 문제란 바로 예수님의 유대교적 가르침이 희랍문명권에서 자라난 사람들, 즉 이방계 기독교인들에게는 쉽게 전달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가령 희랍인들은 '메시아,' '구세주'라는 개념 자체를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심각하게 고민한 것들 중에 하나는 '예수의 메시아되심'을 희랍인들, 혹은 이방계 기독교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석하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해석학적 과제를 예민하게 느낀 사람이 에베소 지역에서 활동하던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하면 유대계 기독교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희랍인들과 같은 이방계 기독교인들도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예수의 그리스도되심, 즉 메시아되심을 설명할 수 있을까를 두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진지한 심사숙고 끝에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바로 '로고스'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말씀은 언제나 창조력과 생명력, 그리고 지혜의 표혀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로 '다바르(dabar),'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생명을 만들고 살리는 놀라운 힘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는 말을 아끼는 언어로 유명합니다. 인간의 언어로서 다 설명할 수 없는 말의 참 능력을 십분 깨달았기 때문에 어휘수가 아주 제한되어 있습니다. 가령 희랍어의 어휘수가 20만개 정도 된다고 할 때 히브리어의 어휘는 겨우 1만개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헬라어의 1/20정도) 

 유대인들에게 말씀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창세기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하면 이 세상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또 창 27장에 보면 이삭이 하는 말 한마디의 축복을 차지하기 위하여 에서와 야곱이 서로 다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말 한 마디의 축복에 한 사람의 장래 운명이 판이하게 좌우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 33: 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고 했습니다.(이하 생략)

그런데, 희랍어 '로고스'는 유대인들에게 '말씀'(word)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지혜'(wisdom)라는 뜻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히브리적 지혜는 어떤 철학적이고 수사적인 지혜가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 얻게되는 실천적인 지혜를 말합니다.

3: 18-19=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라고 했고, 8: 1-9: 2=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 온통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로 유대인들이 '로고스' 개념을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로 이해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생명과 빛을 주어서 살리고 새롭게 하는 위대한 능력을 가진 생명력이었습니다. 또한 '로고스'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지혜였습니다. 어둠과 죄악을 몰아내고 빛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선물이 바로 지혜였던 것입니다.

이런 히브리적 '로고스' 개념을 가졌던 이방 문명, 혹은 헬라 문명에 익숙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로고스,' 즉 하나님의 '말씀' '지혜'로 가르칠 때,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어쨌든 <희랍인들에게 로고스는 만물을 질서있고 생동감 있게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원리요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희랍인들의 사고 방식 가운데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말씀'이나 '지혜,' '다바르'에 꼭 상응하는 개념이 바로 '로고스'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요한복음을 에베소에서 썼다고 학자들은 보는데, 바로 이 에베소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희랍 철학자 한 사람이 바로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였습니다.

이 사람이 주전 560년경부터 '로고스'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헤라클리투스는 온 세상 만물이 끝없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사용한 유명한 예화가 있습니다.

, 사람이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빠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는 말입니다. 한 사람이 강물에 빠졌다가 다시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번째로 빠졌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빠진 강물은 첫 번째 강물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강물에 들어갔다 나온 후 강물은 계속 흘러 다른 곳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두 번째 빠질 때에는 똑같은 강물이 아닌 다른 강물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만물이 왜 이와 같이 끝없는 변화와 순환 속에 있는 것일까요? 헤라클리투스는 만물이 끝없는 유동성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 배후에서 조절하는 어떤 궁극적 원리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바로 이 원리를 헤라클리투스는 '로고스'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헤라클리투스 이후, 희랍 사람들은 이 '로고스' 때문에 정의와 불의, 선과 악, 미와 추함을 가릴 수 있는 이성과 분별력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으며, 또 로고스가 만물의 에너지와 생명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고로 요한은  '로고스'를 하나님 말씀과 적용하여 말했습니다. 그래서 로고스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희랍인들이 예수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희랍인들에게 예수님을 그냥 '로고스'라고 말하지 않고 '로고스가,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 성육신을 했다는 말입니다.

) 그러면 오늘 봉독한 말씀의 요점은 무엇인가?(4가지)

 1. 예수님은 태초로부터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셨다<1-2>.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말씀으로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이미 태초부터 하나님과 동행하셨습니다.

 2.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다<3>.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하나 둘 계속 창조해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에서 유()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버릇과 행동을 바꾸시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 이런 창조와 변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3)"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물질은 악하다고 믿었던 영지주의자들과 달리, 요한은 이 세상이 선하시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물질을 창조하셨으며,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좋으신 분이시며, 좋으신 하나님에 창조하신 이 세상 역시 좋은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타협할 수 없는 세계관이요, 창조관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이 생명은 세상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4>.  앞으로 요한복음에서 우리가 자주 만나게 될 두 가지 기본적인 용어는 '생명' ''입니다. 먼저 요한복음은 '생명'에서 시작해서 '생명'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만 '영원한 생명'(zoe)이라는 명사가 적어도 35회 이상, 그리고 '생명을 갖다' 혹은 '산다'(zen)라는 동사가 15회 이상 나옵니다. 그러면 생명은 무엇입니까? 파괴와 저주와 죽음의 정반대가 생명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파괴가 사라지고 창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생명되신 예수님께서 임하시는 곳마다 저주와 죽음의 세력이 정복됩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거하시는 곳마다 영생이 주어짐을 말합니다.

그러면 빛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에 모두 21회 이상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요 8: 12 9: 5에서 두 차례나 당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당신이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곳마다 혼돈과 무질서가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어둠과 죄악이 소멸됩니다. 어둠은 빛을 이겨 본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마다 빛의 자녀가 되어 어둠의 세력을 능히 이길 수 있게 됩니다. 

 4. 그런데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이 이 세상 어두움을 비추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5>.

 요한복음에 '어둠'(skotos, skotia)이란 말은 모두 7차례 나옵니다. 빛 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은 온통 칠흙같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둠은 무지와 죄악과 죽음과 절망을 상징합니다. 모든 죄악들, 모든 부끄러운 일들이 어둠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줄기 생명의 빛이 비추어졌지만 그들은 이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완전히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빛이 어둠을 완전히 몰아낼 때가 올 것입니다.

 

결론)

 첫째로, 말씀이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영생이 그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 5: 24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요.

 둘째로, 빛되신 예수님을 붙들고 그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 12: 46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고 하셨습니다. 또한 요일 1: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고로 우리는 빛되신 예수 안에 살고, 늘 그 빛을 반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123124 안익선 목사/참조:내리교회(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