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과 나그네 (히 11:13-16)
1. 외국인 거주자
1) 불법이민자의 힘겨운 삶을 그린 ‘돈데 보이(Donde Voy, 난 어디로 가야합니까)'라는 애처러운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동터오는 새벽이 나를 깨우고 밝은 하루가 시작되어도, 나를 이민국에 신고하지 말아주세요. 내 마음에 느끼는 고통은 사랑으로 인하여 받은 상처랍니다. 그대를 그리워하며 그대의 입맞춤과 애정을 기다립니다. 하루 이틀 지나가면서 그대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답니다. 하지만 내가 보내 드리는 돈으로 그대가 내 곁에 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에 쫒기면서도 그대의 미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대 없이 사는 삶은 무의미합니다. 도망자처럼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어디로 가야만하나요? 희망을 찾고 싶어요. 나는 사막을 헤매는 도망자처럼 혼자가 되어버렸답니다.’
오늘날, 미국과 멕시코 사이엔 장장 3360Km 장벽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이 장벽의 규모는 남북한을 가로막고 있는 휴전선의 10배 이상 규모라 합니다. 2000년 초반엔 170만 명 이상이 불법으로 국경을 넘다가 체포되어 멕시코로 돌려보내졌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집권 이후, 근래에도, 매년 55만 명 이상이 국경을 넘다 체포되며, 높이 3m에 2중으로 둘러싸인 철벽을 넘으려하다가 수백, 수천의 이름 모를 라티노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시작도 못해 본 채 불귀의 객으로 가엾은 생을 마감한다. 과학적인 장비와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수비대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가까스로 밀입국한 라티노들이 우리 이웃으로 살고 있지만, 경제적 고통이 가중되고, 가족과의 재회가 기약은 없습니다.
또한 미국의 합법적인 이민자들이라 할지라도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 인종의 장벽 등으로, 고학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백인들의 수입이나 혜택을 제대로 받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인 것입니다.
또한 미국의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한국 분들의 수도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정부 자료는, ‘대한민국의 外國人 居住者의 수가 100만을 넘었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 50명 당 한 명이 외국인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몇 년전 안산공단에 갔었는데 안산에는 외국인들이 특히 많았습니다.
거기엔 중국교포들이 또한 많다. 안산역 건너 편에는 수십 곳의 중국식품점, 중국으로 국제전화 를 걸수 있는 가게들도 꽤 많이 눈에 뜨였습니다.
근처엔 제법 큰 "조선족 교회"도 있었고, 더 가보니 "중국어와 영어"로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백여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린다는 현수막이라던가, 큰길을 함부로 건너면 위험하다는 중국어 현수막도 대로 한가운데 쳐 있었습니다.
어떤 공무원의 차는, 그 차의 엔진룸 뚜껑에다가 -쓰레기 무단투기를 단속하는 차-라고 중국어를 써 붙이고 다녔습니다. 요즘은 한국의 다른 도시에도 외국인들이 점점 더 많이 살고 있습니다.
2) 여러분, 한국의 경우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영주권을 받고 시민권을 받았다 하지만, 역시 미국이라는 이 나라 안에서는 우리를 미국인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어디에서든지, 역시 외국인이
라는 그것입니다.
2. 이 믿음으로 산 영웅들
1) 믿음의 책 히브리서
이 서신을 받았던 "히브리 기독교인"들은, 오직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족인 유대인들
로부터 직장에서 좇겨나고, 가족들에게 외면 당하고, 친구들에겐 버림을 받고, 고향에선 살 수 없어 협박과 위협을 피해 ,타향으로 전전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정부로부터도 대대적인 구금과 구타,살해의 위협을 받음으로서 신앙을
포기해야 하는 위기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형편에 있던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증명하면서, 그 구체적인 예로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신앙의 핵심인 ‘천사'나, 출애굽의 주인공 ‘모세’
,또는 ‘대제사장’보다도 더 크고 위대하심을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구속주시며(1,2장). 나그네와 같고 아침 안개와 같은 이 세상에 비유할수 없는 무궁한 영광과 권세의 주님이심을 말합니다. 주님은 로마보다 훨씬 더 강하시고 영원하시고
더 뛰어나신 분이라는 것 입니다(5:1-10:18).
➁ 예수님은 천들사보다 우월하시고, 영광스러운 아들 하나님이시며, 스스로 비천한 인간이 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므로써 우리 모든 죄를 사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통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알고
바로 믿는 것’임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2) 믿음의 사람들
본문 11: 4절부터 40절은 그러한 믿음으로 산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박해하고 세상의 권력이 힘으로 짓누를지라도, 그것을
끝까지 버티어 내고 이겨낸 사람들였습니다.
그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악형을 받되 구차히 피하려 들지 않았으며, 돌에 맞고, 톱으로 켜이고, 시험과, 칼에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나 잘 이겨냈던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살 데가 없어 광야와 산과 암굴과
토굴에 살기도 했습니다(히11:36-38).
예:(로마의 카타콤베, 터어키의 가파도키아)
이렇게 11장이 열거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온갖 부귀 영화를
다 누리고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견딜 수 없는 삶의 고난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영웅들을 설명하면서 ,오늘 본문은 그들의 또 다른 한 가지 삶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 분들은 그저 마지못해, 어쩔수 없어서, 그러한 믿음의 고난을 감수한 것이 아니라, 환영을 했다는 것입니다. 환영!!! 환영!!! 저는 이 단어에 전율을 느낍니다. 진정한 존경의 마음을 느낌니다. 그들은 진정한 기쁨과 희열을 느끼며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의 승리란 말입니까?현재의 고난을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노라고 탄복해 마지 않던 바울의 고백이 믿음의 선진들의 삶의 모습이였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믿음의 고난을 환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감사해 보았습니까? 감격해 본 적이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우리의 믿음은 아직도 초보의 수준일지도 모릅니다. )
오늘 본문이 말하는 믿음의 영웅들의 삶의 특징은 그들이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
~~는 것입니다.
➀ 당시 헬라사회에서 '외국인,이 어떻게 여겨졌는지 아십니까?
어떤 성경 사전은, 당시 외국인들에 대한 헬라 사회의 시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헬라 사회에서 낯선 사람이나 외국인은 적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낯선 나그네들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고, 죽임을 당하거나 내쫓기었다.”
➁ 또한 그들은 자신들을 “나그네”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 “나그네”라는 말은, 당시 ‘타국에서 다른 백성인 원주민과 함께 사는 사람’, 즉 외국인 거주자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니까 “나그네”란 단순한 여행자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혈통으로서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이 다른 나라에 잠시 머물고 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 역시 이 말을 벧전 1:1에서사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하노라고 했습니다.
➂ 그래서 오늘 본문은, 성도들을 “본향 찾는 자”,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14~16). 여기서 본향이란 “파트리스”라는 말인데요. 이 말은 ‘파테르’, 즉 ‘아버지’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따라서 “본향”이란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는 곳, 그곳이 성도의 본향이고, 성도는 그 나라에 속한 자입니다.
3)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
그러면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윌리엄 바클레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외국인은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었다. 사회적으로는 노예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외국인들은 외인세( 外人稅)를 지불해야 했고, 공공기관이 정해주는 특정한 장소에 거주
해야 했다.” 그리고 “나그네는 유숙자이며 지금 있는 땅에는 집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또한 성도들이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지 못하면 하늘의 본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
땅에서 하늘의 본향만을 향하여 사는 자는 당연히 이 땅에서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된다. 비참하기가 그지없고 노예 같은 형편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하 생략)
성도 여러분, 이 말은 성도가 이 땅에서, 가난하게, 비참하게, 괴로움과 고통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러한 말들은 성도들은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확실하게 늘 되뇌이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 시대에 얻은 로마 시민권은 미국 시민권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진정으로 자랑한 것은 무엇이였을까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역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들 이십니다.
천국 시민권자는 이 땅의 화려함에 미련을 두거나 인간적인 성공을 자랑거리를 앞세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속한 사람들 처럼 오로지 땅의 일만 생각하지않습니다.
재산, 권력, 명예나, 멋진 자동차, 으리으리한 저택, 날렵한 요트, 최신 전자제품, 값진 골동품, 번쩍이는 보석...따위에 골몰하지 않습입니다.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얻은 것으로 어떻게 내일을 즐기며 편안함을 누릴까?’ ‘내가 얻은 것들을 어떻게 계속 움켜쥐면서 살아갈까?’ 에 골몰하지 않습니다.
세계 오지 여행가 한비야 씨라는 분이 계십니다.
, 한비야 씨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구호활동을 하던 한비야 씨가 ‘미리암’이라는 소녀와 서로 옷을 바꿔입고 시장을 가 보기로 했습니다.
한비야 씨는 -모자가 달린 원피스로서 눈만 내놓고 온 몸을 감싸고 다니는 이슬람 여인들의 =‘부르카’를
입었습니다.
그랬더니 다 벗고 살아도 더워죽을 지경인 그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 부르카는, 사람을 삶아 죽이는 찜통과도 같았다고 합니다.
그와 달리 어릴 때부터 부르카를 입고 살았던 미리암은, 부르카를 벗고 스카프로 머리만 가린 채 시장을 봤는데도, 가볍고 시원해 하는 것이 아니라, 정작 본인은 도무지 불편하여 견딜 수 없었다면서
‘다시는 부르카를 벗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편하여 보이고 좋아 보인다 할지라도 내 것이 아니면 그것은 결코 편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 특히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곳이 살기 좋다 하여도 그곳의 생활습관
이나 음식이나 문화 따위가 불편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타향에서 사는 나그네는 임시 거처에 머물기 때문에 평생 살 것처럼 꾸미고 살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 기본적으로 생활할 비품들만 갖추고 임시로 살다가 떠나는 것이 나그네 생활입니다. 잠시 동안만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여행 가방에 필요한 것만 싸서 가지, 결코 여러개의 콘테이너에, 엄청나게 많은 이삿짐을 꾸려 가지는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잠시 한 기간 동안 이 땅에 머물다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이, 여기가, 여러분이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의 본향은 하늘 아버지(파테르께서)가 계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을 향한 외국인이자 나그네로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우리나라 복음성가곡 중에는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 길 나는 다만 나그네 나의 집은 저 하늘 저 너머 있고
천사들은 하늘에서 날 오라고 부르니 나는요 이 땅에 있을 맘 없어요
이 세상 이 세상 나의 집은 아니요 우리 구주 머지않아 다시 오실때
천사들은 하늘에서 날 오라고 부르니 나는요 이 땅에 있을 맘 없어요
이 세상은 고독 불안 슬픔 괴롬된 세상 나의 주님 의지할 것 밖에 없어요
앞에 가신 성도들의 순교정신 따라서 천한 몸 이나마 싸워서 가리라
이 세상 이 세상 나의 집은 아니요 우리 구주 머지않아 다시 오실때
천사들은 하늘에서 날 오라고 부르니 나는요 이땅에 있을 맘 없어요
(3절 생략) 요즘도 이런 찬양을 자주 불러야 할 줄 믿습니다.
3.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
성도들은 외국인과 나그네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
그들은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장막에 거주했습니다. 그들은 만리장성을 짓지도 아니했고 궁궐이나 화려한 맨션을 짓지도 아니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거하는 그곳이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 또 다른 본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대해서, 그리고 땅의 것에 대해서 너무 정을 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더 힘들여 공들이고 투자할 곳은 하늘나라입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언제든지 아버지께서 부르실 때, 떠날 준비를 하고, 보따리 싸놓고 사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을 절반 즈음 잃었다고 절망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당신 가장 소중히 여겼던 사람이나 성공을 잃어버려 이 세상을 포기하려하진 않았습니까?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나그네 의식으로 살아가야, 성경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며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나누면서 삽시다. 하늘에 투자하십시오. 복음전도에 투자하십시오. 하늘 상급을 바라보십시오.
땅에 있는 것을 의지하고 자랑하기보다는 하늘의 것을 기대하고 사모하는 바르고 건강한 나그네의 영성을 가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1.2.24 익선
기도:오늘도 세상의 고단함과 슬픔과 분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며 힘 주시며 은혜를 더 하셔서,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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