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글 모음

[스크랩] 사무엘상 강해

호걸영웅 2012. 3. 22. 03:56

사무엘상 강해



인생 성공의 비결(삼상1:1)

사무엘상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뚜렷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이다.

사무엘, 사울 및 다윗에 관한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 한 개인의 성장 및 활동, 죽음까지 그 모든 과정을 주관하시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한 개인사를 주관하시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전체의 역사, 나아가 전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시기도 한다. 사무엘상은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하고 피력하고 있는 책이다.

2. 인생 성공의 비결이 하나님 제일주의에 있다

사울의 실패와 다윗의 성공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복된 삶을 사는 비결은 '신앙 유무'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을 인생의 결론으로 삼아야 한다. 사업이 무너지고 일어서고 하는 것은 참으로 순식간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런 것을 많이 보아 왔다. 어떤 사람이 순식간에 몇십억을 날렸다는 얘기를 그리 생소한 얘기가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세우는 것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작업이 인간이 보기에는 어려운 일처럼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참으로 간단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나의 인생의 결론으로 삼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는 마음에 기쁨이 자리할 수 없다. 살기는 사는데 어쩔 수 없이 사는 경우가 많이 있고, 믿기는 믿는데 관성적으로 믿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그렇게 살아서는 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살겠노라 하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삶의 패턴을 다시 재조정해야 한다. 그런 조정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때 여러분들의 삶은 복된 삶을 향한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될 것이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주님이 여러분을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나요? 그것이야말로 기복주의요,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서는 삶의 위대한 개혁을 창출할 수 없다. 진정한 영혼의 치유와 정신의 치유도 일어날 수 없다.

반대로 여러분이 주님을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나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 틀림없이 하나님은 그의 삶에 획기적인 역사를 이루어내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인생의 중심에 놓으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삶을 펼쳐 보라. '나 중심적 사고'가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로 인생의 구조조정이 될 때만 삶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정말로 순식간에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 있다. 도구나 환경이 없어도 괜찮다. 하나님은 친히 세우기도 하시고 무너지게도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잠시 크게 쓰임을 받았다가 넘어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이 30층의 빌딩을 지을 때에는 동시에 그 빌딩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겸손하게 서야 한다. 예수님 중심적인 삶이 되어지기를 바란다.



컴플렉스 극복의 길(삼상 1: 1-8)

엘가나에게 한나와 브닌나라는 두 아내가 있었다. 그 두 아내 중에서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다는 한이 있었다. 그렇지만 엘가나는 한나가 자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나를 브닌나보다 더 사랑했다. 엘가나가 매년 여호와의 법궤가 있는 실로에 가서 제사를 드릴 때, 그는 제물의 분깃을 아내와 자녀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면서 유독 한나에게만 갑절을 주었다. 한 번도 아니고 매년 그렇게 했다. 그때마다 질투가 난 브닌나는 한나를 격동시켰다. "애도 못낳는 주제에...." 한나는 그 소리만 들으면 속이 끓었고 소화가 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컴플렉스는 있다. 이 컴플렉스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문제다.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라

믿음이 커지면 컴플렉스는 반비례해서 사라집니다. 컴플렉스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그러한 태도로부터 긍정적인 영향이 하나도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굳건히 하라.

2. 약점을 인생의 승부처로 생각하라.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컴플렉스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인생의 승부처라고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자세가 없으면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 한! 그 컴플렉스! 그러한 것들이 있는 이유는 그것을 극복하여 더 귀한 것을 창조해 내라고 하나님께서 배려해 주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5)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그러한 환경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결국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 사무엘을 주셨던 것이다.

약점을 가지고 컴플렉스로 발전시키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약점에 매달리면 전체적인 인생은 실패요, 약점을 극복하면 전체적인 인생은 성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위대한 승부처로 삼으라고 여러분에게 그 약점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약점이 여러분 인생 성공의 주춧돌이 될 것입니다.

3. 자신의 장점에 대해서 감사하라.

나의 한 두가지의 약점! 다른 사람에게도 그 이상의 약점들이 다 있다. 살아가면서 수백가지의 필요한 것 중에서 한두가지가 없는 것으로 인해서 인생이 절단나지 않는다. 현재 있는 것으로 감사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8) 열 아들이 있는 것보다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위로를 주려는 엘가나의 모습을 보라.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약점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며, 자신에게 없어 한이 된 것을 극복하라. 자신에게 컴플렉스를 가져다 주었던 그것을 하나님이 '내 인생의 승부처'로 허락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라. 그 승부에서 이겨서 진정한 성공자가 되라! 없는 것으로 인해 낙심에 빠지지 말고 있는 것을 소중히 여겨라. 없는 것을 인해서 컴플렉스에 빠지지 말고 그것을 극복하라. 극복의 길은 있다.



한나의 눈물(삼상1:9-28)

엘가나가 일부일처의 법을 어김으로 복잡한 문제가 생겼으나, 그 복잡한 문제가 결국 은혜의 동기가 되었다. 하나님은 고통스런 환경을 통해서 사무엘이을 만들어 내셨다. 사무엘이 나오기까지 한 여인의 눈물이 있었다.

1. 탄식의 눈물. 아들을 낫지 못했기 때문에 설움을 받아서 생긴 눈물. 아들을 낫지 못했어도 엘가나는 그녀를 더욱 사랑해서 희생제물을 다른 사람들보다 갑절이나 주었다(1:5). 그러나 아들을 못낳는다고 둘째 브닌나를 맞이한 것 자체가 속상할 일인데, 그런 중요한 과실은 접어두고 갑절의 위로를 한들 그 위로가 무슨 소용이 있나. 게다가 둘째 브닌나가 수시로 한나를 격동시켰다. 그러므로 한나의 탄식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나도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시련도 인간의 치욕이 수반되니 참기 어려운 것이다.

2. 기도의 눈물. 한나는 탄식의 눈물을 기도의 눈물로 승화시켰다. 탄식의 눈물은 기도의 눈물로 변해야 해결의 길이 열린다.

1) 간절한 기도. 한나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소리는 나지 않고 입술만 움직이니 제사장 엘리는 한나가 술먹고 취한 줄 각할 정도로 간절한 기도.

2) 서원기도.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습니다(11절)." 하나님의 흥정하는 모습이 전혀 없다.

3) 믿음의 기도. 기도한 후에 한나의 얼굴에는 다시는 수색이 없었다(18절). 응답은 오지 않았는데 수색이 사라졌다는 것은 응답이 올 것을 믿었다는 증거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다는 증거다. 기도하기 전에 한나는 슬픔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엘가나는 "어찌하여 그대 마음이 슬프뇨"라고 했다(8절). 믿는 사람들은 잠시 슬픈 모습은 보일 수 있어도 오래도록 슬픔 가운데 젖어 있는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기도는 욕망과 슬픔을 조절하는 가장 적절한 도구다. 한나는 기도 후에 얼굴을 폈다. 이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4) 어머니의 기도. 한나가 사무엘을 낳기 전에 기도하는 여인이었듯이, 그녀는 사무엘을 낳은 후에도 역시 기도하는 어머니였다. 사무엘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도의 어머니 한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훌륭한 사람에게 있는 것은 바로 훌륭한 어머니이다.

3. 헌신의 눈물. 하나님께서 한나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녀에게 아들을 주셨다. 한나는 그 은혜를 오래 간직하기 위해서 아들 이름을 사무엘이라 지었다. "내가 하나님께 구했는데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 사무엘이란 이름에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한나의 간증이 담겨 있었다. 한나는 간신히 젖뗀 아이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에 가서 하나님께 바쳤다. 아이를 바치고 난 다음 돌아올 때의 한나의 심정. 사무엘은 어렵게 간신히 얻은 아들이었다. 한나에게 있어서 사무엘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한나는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 아들을 바치고 돌아올 때 눈물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 눈물은 헌신의 눈물이었다.

탄식의 눈물은 헌신의 눈물까지 나아가야 한다. 헌신을 준비하라. 마음의 준비가 있을 때 하나님이 고통스런 환경을 복된 환경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한나의 노래(삼상2:1-11)

한나는 하나님 앞에 찬양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 노래를 통해서 한나는 받은 은혜를 뛰어 넘어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저 선물에 집착하여 선물을 주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잊어버리고 있다. '하나님의 선물'에 집착하지 말고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에 집착하는 것이 선물을 받는 지름길이다.

한나의 노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세 가지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볼 수 있다.

1.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나의 주요,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다. 아들 예수를 대신 죽게 하심으로 인생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천국을 내 손에 쥐게 된 것이다. 기독교는 도덕군자를 만드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소망은 '천국을 쟁취하는 것'이다. 천국의 소망은 현재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준다.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살 수 있다.

2. 변화를 이끄시는 하나님: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한다. 진짜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믿기 전과 믿은 후가 차이가 있어야 한다. 믿음은 정말로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살면서 분명히 믿는 자의 축복된 표징이 드러나야 한다. 믿는 자가 단순히 천국에 가는 것만이 믿음의 처음이요 끝이 아니다.

3. 문제해결의 열쇠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다. 만약 하나님이 실제적인 열쇠가 되어 현재 부딪치는 어려운 문제의 문을 여는 능력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천국만 가려고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문제 해결의 열쇠를 활용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 구원과 변화와 열쇠: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1)

한나에게 주의 구원은 현재 그녀의 마음을 즐겁게 한 것이었다. 한나의 고백에 나오는 뿔이란 지위를 상징하는데 뿔이 높아졌다는 말은 지위가 높아진 것을 말하고 있다. 한나에게 있어서 구원은 입이 크게 열린 것이었다. 즉 실제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진정한 축복이 있었습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실제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믿기 전과 믿은 후가 다른 것이 믿음이다. 참된 믿음은 참된 변화를 수반합니다. 변화는 믿음의 생명이다.

믿음을 가졌으면 문제 극복의 능력도 커져야 한다. 가장 약점이라고 생각한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능력이기 때문에 나의 가장 부족한 약점을 가장 위대한 도구로 변화시키는 초석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천국을 소유하게 할뿐만 아니라, 삶의 실질적인 변화를 주고, 이 세상의 고민과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 구원과 변화와 열쇠! 참된 믿음을 통해 이 세 가지를 소유하자.



역전의 하나님(삼상2:1-11)

성도는 구원, 변화, 열쇠라는 복을 소유. 구원은 천국으로 가는 복, 변화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복, 열쇠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받는 복이다.

1. 구원. 예수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 구원의 소중함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로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1:10,12) 구원의 복이 얼마나 소중한가?

2. 변화. 믿음에는 예수님과 같은 성품으로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기초로 삼으면 놀라운 변화의 능력이 나타남.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2) 불변하시는 하나님이 변화의 원천이다.

3. 열쇠. 성도에게 문제를 풀어가는 열쇠가 주어진다. 열쇠를 손에 쥐었기 때문에 문제의 문을 스스로 열 수 있도록 열쇠를 활용해야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이 열쇠를 최초로 받았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이제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한나에게도 베드로에게 주어졌던 열쇠가 주어졌음이 틀림없다. 본문에는 한나의 신앙고백이 잘 표현되어 있다. 한나는 그의 노래를 통해서 하나님은 실제적인 변화를 주는 구원의 하나님(1절). 거룩하신 하나님이요 반석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2절). 3-11절에서는 하나님이 주권자 하나님임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특히 그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높이시고 겸손한 자는 낮추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행동을 달아보시며(3절), 용사의 활은 꺾고 넘어진 자는 힘주시며(4절), 하나님으로 인해 없는 자는 있게 되고, 있는 자는 없게 되며(5절),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고 고백한(6절).

하나님은 모든 문제 해결의 키를 소유하고 모든 주권을 쥐고 계신다. 하나님이 왜 성도에게 때로 가난하게 만드시고, 낮은 자리에 처하게 만드시고, 진토와 거름더미에 두시며 실패를 허용하시나? 필요하기 때문이다.

1)실패는 신앙을 가른다. 한 사람이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는 실패의 순간에 그가 반응하는 모습을 통해서 갈려집니다. 2)친구를 가릅니다. 한 사람이 진정한 친구를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는 실패의 순간에 그를 찾아오는 친구가 있느냐의 여부를 통해 갈려진. 3)축복을 가른다. 한 사람이 진정한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느냐의 여부도 그가 실패를 어떻게 창조적 내일의 초석으로 활용할 수 있는가 하는 여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4) 실패가 보다 실제적은 교훈과 구체적인 삶의 지혜를 준다. 사람은 성공할 때보다 실패 속에서 더 큰 교훈과 지혜를 얻는다. 항상 낮은 자리는 교훈을 받는 자리요, 배움의 자리다. 잘 배우면 축복의 손길이 임하게 됩니다. 잘 배운 순간, 하나님은 높은 자리에 여러분들을 이끌어 올리셔서 그 배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신다.

하나님은 낮은 것을 높이시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하시는 역전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앞세우고 인생의 긍적적이고 창조적인 변화를 엮어내시고, 놀라운 인생 역전의 드라마를 만들어 내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란다.



엘리의 아들들과 사무엘(삼상2:12-26)

육적인 삶을 추구하는 엘리의 두 아들들과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무엘.

1. 손에 쥔 시간이 차이가 있다. 엘리의 아들들은 세상이 제것인양 활개를 치고 있다. 제물을 마음대로 제 것으로 취하고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는 죄악까지 저지른다. 그처럼 마음대로 활개를 치고 다녀도 뚜렷이 제지하는 사람이 없으니 겉으로 보면 화려해 보인다. 현재라는 시간만 화려할 뿐, 미래는 암담하다. 하나님은 얼마 후에 그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다(25절). 그들은 오직 현재라는 시간만을 손에 쥐었을 뿐이다. 사무엘은 소박하다. 흰 세마포 에봇을 입고 집에도 가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섬길 뿐이었다. 현재라는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닌 것 같았다. 사무엘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은총을 받는 자가 되었다. 현재라는 시간은 쥐지 못한 것 같았지만 미래의 시간은 그의 손에 있었다. 겉 사람은 현재라는 시간만을 손에 쥔 사람이지만 속 사람은 미래의 시간을 손에 쥔 사람입니다.

2. 추구하는 방향이 차이가 있다. 엘리의 아들들은 추구하는 방향이 땅의 것이라, 땅으로 되돌아간다. 그들의 행동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영원의 장에 남을 것은 없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살다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들의 영혼은 지옥에 빠지게 될 것이다. 반면에 사무엘과 같은 속 사람은 추구하는 방향이 하늘의 것이라 결국 하나님께로 가게된다. 겉사람의 동기는 땅에 속해 있으나 속사람의 동기는 하늘에 속해 있다. 겉사람의 촛점은 자기 자신이지만 속사람의 촛점은 하나님이다. 겉사람은 사람을 죄로 인도하지만 속사람은 사람을 의로 인도한다. 우리의 방향은 항상 속사람이 추구하는 영적인 방향이 되어야 한다. 방향을 잘 잡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인생에 있어 속도도 중요한 것이지만 방향이 훨씬 중요하다. 방향을 잘 잡으면 보잘 것 없는 인생이 다이아몬드와 같은 인생이 될 것이다. 다이아몬드도 거무스름한 석탄 조각이 변한 것이. '얼마나 빨리 가느냐'보다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에 더 관심을 가지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3. 아는 것이 차이가 있다. 엘리의 아들들은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이나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사무엘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주인으로 알고 섬겼다. 겉사람은 지식의 증대를 자랑하나 속사람은 삶의 변화를 자랑한다. 삶의 변화가 중요한 것이다. 실천없는 지식은 교만이다. 바르게 알려고 하고 바르게 아는 만큼 바르게 실천하는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도가 되자.

4. 행동하는 것이 차이가 있다. 겉 사람은 정욕적이고, 몇 푼의 돈에 신경질을 내고 인격을 팔고, 성공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이성에 관심이 많고 때때로 도적질과 사기를 하며, 원한을 쉽게 품으며 평생을 냉혈 동물처럼 산다. 이처럼 추한 것은 바로 생각이 추하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은 항상 거룩한 생각을 품고 있고, 어떤 일이 있어도 언제나 잔잔한 호수와 같다. 헐벗고 추워도 마음은 항상 따뜻하다. 어떤 유혹에서도 넘어지지 않는다.

성도의 마음에는 겉 사람과 속 사람이 혼재해 있다. 겉 사람은 육적인 것을 추구하고 속 사람은 신령한 것을 추구한다. 언제 어디서나 육적인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치주의(삼상2:27-36)

눈에 보이는 법과 눈에 보이지 않는 법. 눈에 보이는 법은 인간이 만든 법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은 인간이 만들지 않은 법이다. 양심의 법, 은혜의 법, 사랑의 법 등이 눈에 보이지 않는 법.

1. 인간의 법치주의 및 그것의 허구성. 인간의 법치주의는 눈에 보이는 법을 기준으로 하고 있고, 하나님의 법치주의는 눈에 보이는 법과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을 동시에 기준으로 하고 있다. 사회에서 상위의 법에 대한 안목을 가져야 한다. 법으로 처벌하는 순간에도 사랑의 원리를 잊지 않는 것이 사회를 살리고, 법의 존재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법치주의 및 그것의 위대성. 하나님의 법치주의는 법조문을 중시하기도 하지만 법조문 플러스 사랑, 그리고 은혜의 원리가 배여있는 것이 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법을 주셨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조문을 들이대고 '법대로'만을 외친다면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유죄 판결을 면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이 설정한 법 조문에 의하면 도저히 무죄 판정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법 조문을 그대로 두면서도 무죄 판정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이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를 믿으면 인간은 무죄를 받을 수 있다. 그것은 법을 깨뜨린 것이 아니다. 상위법을 존재시켜서 인간 구원의 길을 여신 것이다. 하나님은 상위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인간 법치주의자'들에게는 아주 무서울 정도로 법 조문을 들이대십니다. 어느 누구도 그 길에서 피할 자가 없다.

본문의 가장 핵심적인 말씀은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30) 구약 시대는 철저히 하나님의 법이 지배하는 역사였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하나님은 조그만 흠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위법을 설정하셨다. 그 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만드신 법이다. 그 상위법의 원리를 드러내시며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우리는 하나님의 상위법이 있었기에 살아남는 존재가 되었다. '법조문대로'의 율법주의는 비판과 정죄가 난무하게 만들어 공동체의 통합을 깨뜨리고 위선자만 만들어낸다. 그러나 법과 은혜의 원리를 동시에 아는 은혜주의는 개인과 사회를 풍요롭게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그 은혜를 생각하며, 또한 이 땅에 살면서 상위법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예수믿는 사람으로 이 상위법의 원리를 적용시키지 못한다면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마치 백데나리온 빚진 자를 다그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율법은 지키려고 노력하되, 항상 주안에서, 주를 앞세워서 지키려고 하자.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은혜의 원리를 중시하며 살아가자. 나 자신은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면서 저 사람에게는 추상같은 법조문을 들이대는 사람은 결코 되지 마자.



절대 헌신(삼상 3:1-21)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절대 헌신이 필요. 헌신의 역사가 있을 때 받는 역사도 있다. 사무엘 당시 이스라엘은 상당히 혼란한 나라였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1) 말씀이 희귀함으로 생겼던 위기에 가장 큰 책임은 엘리 제사장에 있다. 엘리의 최대 잘못은 아들을 관리하는 방식이 틀렸다. 자녀에게 더욱 엄격했어야 했다.

* 말씀을 듣기 위한 방법. 그 와중에서도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평범한 그에게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 것이다. 4번이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엘리 제사장 집안에 관한 말씀을 듣는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절대 헌신"이다. 그의 절대 헌신은 "하나님께 절대 헌신"과 "윗 사람에게 절대 헌신"이다. 하나님께 헌신했다는 말은 수직관계의 헌신을 말하고 윗사람에게 헌신했다는 것은 수평관계의 헌신이다.

1. 하나님께 절대 헌신.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2,3) 엘리의 안일한 모습과 사무엘의 헌신된 모습 대비. 사무엘은 가지 처소에 가지 않고 하나님의 전 안에 누웠다. 이 장면에서 사무엘이 얼마나 기도하는 사람이었으며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적인 사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헌신적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된다. 그러나 사무엘은 다른 사람의 신앙형태와 자기의 신앙형태를 단순히 비교해서 우월감에 빠지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이 사람 앞에서의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자기에게 유리한 신앙 종목만 내세워 자기의 신앙 전체가 금메달 감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신앙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멸시한다.

2. 윗 사람에게 절대 헌신. 4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데 사무엘은 그 부르는 소리가 엘리 목사님의 소리인 줄 알았고 엘리의 침소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말하며 잠자다 일어나서 재빠르게 갔다. 6절에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사무엘의 엘리에 대한 헌신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가를 보게 된다. 부름을 받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사무엘의 헌신도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엘리 제사장의 지침을 철저히 따른다(10-11절). 즉 지도자에 대한 절대 헌신의 모습이 이 장면들에서 잘 나타나 있다. 지도자에게는 최대한 순종해야 한다는 절대 헌신의 자세가 잘 드러나 있다. 지도자가 공적으로 분명한 도덕적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생각의 차이나 열심의 차이로 인해 나 자신을 나의 지도자보다 높이려는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절대 헌신의 사람에게 음성을 들려주시고, 택하셔서 위대한 인물로 만드신다. 교회를 위해서 헌신할 때 틀림없이 갚아주신다.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21) 한나는 한 생명을 바치는 헌신을 통해서 다섯 배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게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은 헌신을 결코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냉수 한 그릇도 반드시 보상받는다(마 10:42). 바친 사람에게 후히 갚아주신다(눅 6:38).



영광을 회복하십시오(삼상4:1-22)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하고 4천명이 죽었다(2절). 패배의 근본적인 원인은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이었으나 패배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렸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3절)." 그리고 나서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오자!"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언약궤에는 십계명, 만나,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다. 언약궤를 가지지 않았을 때 4천명 죽었지만 이제는 언약궤를 가지고 3만명이 죽게 되었다(10절).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블레셋 사람에게 뺏기고야 만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고 그 모든 소식을 들은 엘리는 놀라 자빠져 문 옆에서 목이 부러저 죽고 엘리의 며느리는 아이를 낳고 죽어가면서 소리쳤다.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 이가봇!" 이 장면은 무엇을 교훈하고 있나?

1. 내면이 없는 상징은 소용없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상징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할 때 광야생활의 위대한 정신적 지주였고 광야에서 그들을 지켜준 놀라운 은혜의 상징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상징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상징을 내세우며 내면을 가꾸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2. 언약궤 대신에 회개를 앞세워야 한다. 과거의 승리가 현재에도 무조건적으로 적용되리라는 관성에 사로잡히면 안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의 관성에 사로잡혀서 언약궤를 앞세우기보다는 회개하는 마음과 믿음을 그들이 가지고 있었는지 먼저 진단했어야 한다. 전쟁 패배의 원인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직면하지 않고 다른 수단으로 승리를 쟁취하려면 더욱 비참한 재난을 맞이할 것이다.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집이 흔들린다고 비바람만 탓하면 되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앞세우기 전에 회개를 앞세웠어야 했다. 회개를 앞세우고 언약궤가 나아갔으면 전쟁의 승리는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손에 주어졌을 것이다. 언약궤는 회개가 수반되지 않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는 마술적 도구가 아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중시해야 한다. 언약궤는 드랴큘라를 쫓아내는 십자가가 아니다. 언약궤라는 상징을 신봉하는 것은 매사에 어떤 수단을 써서라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자세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와는 거리가 먼 태도이다. 하나님 입장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찾지는 않고 하나님을 내 입장에 두고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영적 이기주의를 아시는 하나님이 어찌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일어나시겠는가.

4.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빠진 상태에서 언약궤로 나아가는 것은 미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언약궤가 있기에 하나님이 도와주시는가. 아니다. 언약궤가 없어도 하나님은 도와주신다. 다만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시면 된다. 아무리 소중한 상징도 불의한 자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자세가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있어서 상징(언약궤)은 오직 미신적인 대상이 될 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내용은 없는 상태에서 상징이 판을 친다. 이미지보다 진실이 더욱 중요하다. 이미지는 항상 조작될 수 있다. 상징도 중요하지만 내용이 더욱 중요하다. 신앙생활에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내용을 채워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자.



엎드러진 다곤(삼상5:1-12)

하나님은 신앙이 있는 자에게만 위대한 전능자로 나타나신다. 언약궤를 배앗은 불레셋. 이튿날 다곤 신상이 코를 쳐박고 땅에 엎드러져 있었다. 그 이튿날 다곤의 상이 언약궤 바로 앞에서 몸뚱이만 남은 채로 배를 쳐박고 엎드러져 있고 머리와 몸뚱이는 분리된 채 처참하게 문지방에 널려 있었다. 하나님은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 사람을 철저히 멸하니 그들은 공포에 질려 그 언약궤를 가드로 옮겼다. 가드 사람을 독종으로 또 치셨다. 그러자 가드 사람들이 언약궤를 에그론으로 보냈다. 그러자 에그론에도 사망과 독종이 임하게 되었다.

다곤은 인어 모습을 한 자연을 지배하는 블레셋 신. 혹은 '풍요의 농경신' 다곤은 영광과 미와 풍요의 상징. 그러나 언약궤 앞에서 코를 쳐박고 얼굴이 땅에 엎드러졌다. 본문이 주는 교훈

1. 하나님은 인간들만의 잔치를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탈취한 언약궤! 탈취한 하나님의 영광! 블레셋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위대한 전리품! 그 전리품 앞에서 승리를 만끽하는 블레셋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만의 잔치를 매섭게 심판하신다. 불의한 자에게 승리는 곧 심판의 시작이나 다름없다. 잔치가 참된 잔치가 되려면 하나님이 그 잔치의 상석에 계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잔치가 바로 심판의 자리이다.

하나님이 없는 자는 모든 것을 뺏아긴 자이고 하나님이 있는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다. 하나님이 없는 자는 곧 수치를 당할 것이고, 하나님이 있다고 하면서 없는 자는 더 큰 치욕을 당할 것이나, 진정 하나님이 있는 자는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당신의 마음의 상석에 모셔 두십시오! 항상(매 순간), 그리고 범사(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여러분의 삶의 앞에 내세우라. 그것이 진정 복된 길이다.

2. 하나님의 영광은 절대로 침해되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영광에 침해되는 길은 자멸의 길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수단화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팔아먹어도 하나님은 스스로 그 영광을 지키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법궤를 찾으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언약궤라는 상징을 복의 도구로만 이용했지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지키신다. 그리고 그 영광을 저해하는 모든 것을 엄중하게 경고하신다. 이스라엘에게도 패배를 통해서 엄중하게 경고하셨고, 블레셋에게도 독종을 통해 그렇게 경고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얻을 수 있는 복이란 절대 없다.

3. 회개없는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지 않는다. 법궤가 가는 곳마다 블레셋 지역은 독종이 창궐하게 되었고 그 성읍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다(12절). 그러나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마음에는 접수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마음에 접수되는 부르짖음은 진지하고 정직한 회개가 수반된 부르짖음이다. 범죄했을 때 다윗과 같은 간절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시 51:4) 회개함으로 부르짖자. 회개없이 언약궤만 이리 저리 움직여 보라. 그렇게 함으로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만 블레셋 사람에게 임하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오직 회개뿐이었다. 무엇인가 길이 막혔다면 회개로부터 시작하라.



주님만을 향하여(삼상6:1-12)

지나간 세월들을 살펴보라. 너무나 부족한 모양이 많았지만 그래도 지난 세월 어느 한 순간을 생각해도 다 의미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다음 4가지 원리를 잊지 마라.

1. 아무나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사가 쉬운 것 같지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를 깨달은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다. 은혜를 모르는 데 어떻게 감사가 나오나?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현재의 어그러진 환경은 꼭 불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환경 안에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최종 열매가 준비되어 있다. 하나의 꽃나무가 있다. 그런데 잎은 벌레에게 뜯기고 꿀은 나비에게 뜯긴다. 향기는 바람에게 뺏긴다. 그래서 다 잃어버린 것 같지만 사실상 잃은 것이 없다.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잃어버린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최종적 선한 열매를 위해서 그것은 필요한 것이다.

2.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한다. 차를 타고 가다 보면 가끔 무덤이 있는 곳을 지나치게 된다.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나? 살아있으면 힘든 일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힘든 일이 생기는 것은 살아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으므로 감사한 일이 다. 자신이 지금 살아있고, 그래서 자신의 인생은 변화의 가능성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3. 서로 서로 감사를 가르쳐야 한다. 감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크기가 줄어든다. 100개의 감사할 일이 1개의 원망스런 일에 덮여지는 그런 인생은 절대 복된 인생이라고 할 수 없다. "나의 사전에는 원망이란 없다!"라는 다짐을 하며 살자고 서로 격려하자.

4.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매년 추수감사절이 되면 감사와 관련한 여러 가지 행사를 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에만 감사하지 말고 추수감사절에 감사를 배워 영원히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 고통이 있을 때에도 감사하는 인생이 되자. 고통이 있기에 내 잘못된 자아가 치료된다. 고통이 없다면 인간이 겸손해질 수 있는가? 고통이 없이 인간의 이기심의 두꺼운 벽을 깰 수 있는가? 고통이 없다면 인간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돈 많은 사람이 거만하다고 너무 마음상해하며 억울해 하지 마라. 그들이 마치 악마의 화신인 것처럼 생각하지 마라. 고통이 없으면 여러분도 그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이란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

고통조차 감사하라! 그런 감사가 없는 심령은 도저히 채울 길이 없다. 어떤 환경이 그의 심령을 채우겠는가? 환경이 나에게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사함으로 환경이 변한다.

지나간 삶을 회고해 보라..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색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셨기에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하나님은 앞으로도 나의 삶에 최선의 길을 허락하실 것이다. 그것을 믿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벧세메스로 향하는 암소처럼 오직 주님만을 향해 달려나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란다.



벧세메스로 향하는 암소(삼상6:1-12)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블레셋 지역에 재앙이 일어남으로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돌려 보내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돌려보내는 계획을 면밀하게 추진했다. 이 계획은 세부적으로 다음과 같은 단계로 추진되었다(7-8절).

1) 새 수레를 만들었다. 2) 멍에 메어보지 아니한 젖 나는 암소를 두 마리를 택했다. 3) 두 마리의 암소에 수레를 메웠다. 4)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5) 언약궤를 수레에 실었다. 6) 속건제로 드릴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었다. 7) 수레를 앞으로 가도록 출발시켰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에게 임한 재앙이 끝까지 우연임을 믿고 싶어서 선언을 했다.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원래의 땅)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9) 어떻게 되었나요? 12절에 보니까 그 암소들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취했다.

1)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했다. 2) 갈 때에 울면서 갔다. 3) 대로로 가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블레셋 다섯 방백이 자신들의 재앙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을 확인하고 에그론으로 돌아갔다(16절). 이 장면이 주는 가장 위대한 교훈은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향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 블레셋 사람들이 젖나는 소를 선택했을까요. 젖나는 소라면 얼마 전에 새끼를 나았다는 말이다. 새끼를 낳지 않은 암소는 젖이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젖나는 소란 지금 막 새끼를 낳은 소, 갓난 새끼가 있는 소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의 재앙이 끝까지 우연임을 믿고 싶었다. 만약 일반 소를 선택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본능대로 갔겠지. 그것도 우연일거야." 그러나 갓난 송아지를 둔 어미소가 저절로 벧세메스로 향한다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비록 미물이라고 본능적으로 어미소는 새끼소를 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어미소는 '음메'하고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새끼가 있는 반대편 방향인 벧세메스로 향했다. 새끼를 향한 어미소의 본능으로 '음메'하고 울었다. 젖이 퉁퉁 부어서 그 고통으로 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어미소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책임진 소였기에 새끼소가 뒤에서 울부짖어도 하나님이 설정하신 길을 가야 했다. 미물에게도 모성적 본능이 있음에도 모성적 본능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결국 그 어미소는 벧세메스로 울면서 갔다. 새끼를 떠나야 하는 슬픔! 아무리 미물이지만 뒤에 새끼가 남아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런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소에게 지운 사명이 너무 막중해서 그 사명을 따라 갔던 것이다. 벧세메스로 향하는 암소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했다. 대로에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앞만 보고 갔다. 벧세메스라는 목적지에 이르러서는 정확하게 섰다. 그리고 최후에 번제로 하나님께 드려졌다. 이 암소보다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연이란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아래에서 펼쳐지고 있다. 때로 고통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길을 펴실 것이다. 순종하는 미물에게도 떠나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가 사랑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지 않겠나.



분수를 아는 성도(삼상6:13-21)

블레셋 지역에서 큰 역사를 일으키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스스로 지키던 언약궤가 드디어 이스라엘 지경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돌아오는 언약궤를 보고 벧세메스 사람들이 기뻐했다. 그리고 예배를 드렸다.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15) 예배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예배란 참으로 소중한 행위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드린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피상적이고 전통적인 예배였다. 그런 상황은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호기심으로 들여다보는 장면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결국 그 일 때문에 (오만) 70명이 죽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1. 인간의 영역밖에 있는 것을 알려고 하는 지나친 호기심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29:29) 오묘하고 은밀한 일을 너무 알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다. 예) 시한부 종말론의 폐해. 400교회. 알아서 탈. 그 시간에 주님 오시면 재산 필요 없으니 그 시간 이후에 모든 재산을 교회에 헌금하는 공증을 하라고 하니 한 사람도 하지 않았다. 입으로는 믿는다 하면서 영으로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에 묶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대한 인간의 지나친 호기심을 기뻐하지 않는다.

2. 은밀한 것은 하나님께 속했다. 나타난 것은 우리에게 속했고 은밀한 것은 하나님에게 속했다. 우리의 죽을 날짜는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만약 죽을 날짜를 사람들이 안다면 이 세상은 난리가 날 것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장차 결혼할 상대자는 누구라고 가르쳐 준다면 사춘기의 설레임은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은밀한 것들을 감추어 두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재림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재림 날짜를 오직 하나님의 주관 하에 두신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인들도 오늘날의 교인들 이상으로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적인 시간은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시계가 없다. 오직 영원한 현재 속에 계신다. 우리 주님은 영원한 현재적 존재이며 시작도 끝도 없는 분이다. 우리 피조물이 시간이라는 한계 속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인간의 시간에 묶을 수 없으므로 신앙생활에서 중심은 현재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믿는 것,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현재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주님이 오시는 날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지나친 호기심은 사단의 궤휼에 빠질 수 있다. 묵묵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분량대로 분수를 알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자. 하나님께 맡길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지 신앙의 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것까지 다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모시는 자세, 즉 참 예배의 자세로 들어갈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만큼만 알려고 하는 성도가 되자. 분수를 아는 성도가 되기에 힘쓰시기를 바란다.



승리의 비결(삼상 7:1-17)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에 살던 아비나답의 집에 안치되었을 때에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 족속을 미스바에 불러서 회개운동을 일으켰다. 바로 그순간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사실을 블레셋이 알고 쳐들어왔는데 하나님이 도우셔서 블레셋을 극적으로 물리쳤다. 그 극적인 사건을 기념하여 사우엘은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웠고 그것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하셨다. 에벤에셀의 역사의 비결은?

1. 여호와만 사모하고 섬긴 것.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빼앗긴 언약궤를 찾은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이스라엘 온 족속이 더욱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었다(1절). 이러한 마음의 바탕에 사무엘이 회개를 선포했다. 백성들은 사무엘의 그 말에 순종하여 우상 신들을 제거하고 여호와 하나님만 섬겼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큰 회개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회개운동을 바탕으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은 모든 승리의 바탕이 된다. 하나님은 "생존하시는 하나님"이다. 아버지와 딸의 대화. "아빠, 하나님이 돌아가셨어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구할 것을 구하라. 가정의 평안, 지혜, 돈이 필요하면 돈이 필요하다고 솔직하게 구하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모할 때 우리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2. 은혜받는 장소에 모인 것.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 족속을 미스바로 모이라고 했다(5절). 은혜받는 장소에 모여서 같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도 중요. 가장 은혜받는 장소는 바로 교회다. 교회는 성도의 영혼의 보금자리, 영원한 안식처. 교회에 모이기를 힘써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더욱 힘있게 임하게 될 것이다.

3.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 백성들을 위해 사무엘은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중보기도를 드렸고 미스바에 모인 온 백성들도 다같이 함께 금식기도를 했다(5-6절).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게 하는 위대한 통로. 기도할 때 간절히 기도하는 자세가 있어야 변화의 역사가 나타난다. 기도는 뜨거워야 하고 간절해야 하며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부어야 한다. 기도의 불이 붙어야 한다. 뜨거운 기도가 올려지면 하늘에서는 비상벨이 울리고 긴급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짧더라도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한다. 투박하더라도 정성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야곱의 기도.

4.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린 것. 사무엘은 기도하기 전에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다(9절). 진정으로 헌신하는 한 사람만 있어도 공동체에는 놀라운 승리의 역사가 나타난다. 헌신은 성도가 취해야 할 당연한 도리다. 하나님께서 온전한 번제를 원하신다. 온전한 번제란 내 몸과 마음, 가진 것을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바치는 것이다.

5. 감사의 기념비를 세운 것.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극적으로 승리한 후 사무엘은 돌을 세워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우고 "에벤에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12절). 사무엘은 감사의 원리를 아는 지도자였고, 백성들에게 감사를 원리를 잊지 않도록 기념비를 세우는 조치를 했다. 그러한 감사의 심령이 예비되어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의 역사와 더불어 전쟁에서 승리를 주신 것이다.



기도로 문제를 푸십시오(삼상8:1-9)

이스라엘이 신정에서 왕정으로 넘어가는 첫 부분. '왕'이 10번 가량 나오기에 '왕 장'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을 볼 때 자주 반복되는 단어 및 어구를 보면 그 본문이 무슨 말을 하며 무슨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1-2). 사무엘의 두 아들이 브엘세바에서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다. 성경에 공식적으로 이름이 거명되어 나오는 마지막 사사는 사무엘의 두 아들인 요엘과 아비야이다. 사무엘의 이 두 아들은 대가성 뇌물을 받아서 그 자리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는 사무엘이라고 할 수 있다. 사사는 신정정치 시대에 신의 대리인의 역할을 하며 백성들을 다스리고 이끌고 송사를 최종적으로 판결하는 대법원장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사를 영어로 'judge'(심판관)라고 한다.

3절. 사무엘의 두 아들 사사가 돈을 받고 엉터리 판결을 한다. 비리법조인처럼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판결을 하니까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이 생각하게 되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첫 사사 옷니엘 이후로 350년만에 정권교체 한 번 이뤄보자!" 그래서 "이제는 사사 제도가 지겹다.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 그들은 신정정치에서 왕정정치로 바꾸면 나라가 잘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참으로 어리석인 태도다. 제도를 아무리 바꾸어도 단점은 나타나게 마련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소용이 없다. 제도와 법을 숭상하면 항상 낭패하게 마련이다. 오직 변하지 않는 하나님, 변하지 않는 말씀 중심으로 살아 인간이 변할 때 참된 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장로들의 요청을 듣고 사무엘이 얼마나 섭섭했겠는가? 아들 잘못된 것이 어떻게 사무엘의 전적인 책임인가? 이제는 아들을 문제삼아 제도까지 뜯어고치자고 하니까 얼마나 어이없는 노릇인가? 사무엘의 아들이 문제이지 신정정치 제도가 문제인가?

* 기도하는 편이 훨씬 낫다. 사무엘은 매우 섭섭했이나 정치인들처럼 장로들과 "네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하고 싸우겠는가? 그런 식으로 장로들하고 싸우면 백성들에게는 밥그릇 싸움으로 비칠 것이 아니겠나? 그래서 사무엘은 섭섭한 마음을 꾹 참고 그저 기도했다. 억울한 일을 만나거든 달리 풀지말라. 다른 인간적 방법으로 그 일을 풀려는 순간 부작용이 생길 것이다! 오직 기도로 문제를 푸십시오! 그러면 정말 신기하게 풀리게 될 것이다.

7-8절. 하나님께서 "사무엘아! 까짓꺼 그들의 말을 들어 주라!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다! 그들은 애굽에서 인도하던 날부터 400년 동안 계속 그래왔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무엘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는가? 하나님이 사무엘의 입장에 대신 서 주심으로 사무엘의 아픔을 대신 나눠지시는 것이야말로 그게 가장 큰 위로가 되지 않았겠나? "너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거부하는 것이야!" 싸우지 않고 기도하니까 이런 위로가 찾아온다. 이 원리에 담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누가 약속을 어기고 사기를 쳤다. 얼마나 속이 상한가? 누가 나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웁니다. 얼마나 속이 상합니까. 치고받고 싸우는 편보다 아무래도 기도하는 편이 훨씬 낫다. 기도로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을 개입시키라.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어주시면, 우리의 심정을 이해해 주시면 이 고통 많은 세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왕이냐, 하나님이냐(삼상8:10-22)

장로들이 찾아와서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라고 요구했을 때 사무엘은 섭섭했지만 장로들과 다투지 않고 기도했다. 사무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력은 그의 기도에서 나왔다. 기도가 끝난 후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위로의 음성을 들려주신 후 그들의 말을 들어주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왕을 구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탓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했던 그들의 자세를 탓한 것이었다. 한마디 덧붙여 "왕을 세워달라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되 그들에게 왕의 제도의 실상만을 정확하게 알려줘라!"고 하셨다.

* 지도자와 지배자. 그래서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왕의 제도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11-18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자기'요, 전체 요점은 왕은 자기 중심주의로 나라를 이끌게 될 것이고 백성들은 왕의 충실한 도구가 될 것이다. 즉 왕이 나라를 이끌게 되면 너희는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가 될 것이란 말이다. 그렇게 된 다음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사무엘의 충고를 거절했다. 그들은 사무엘과 같은 겸손한 지도자를 원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다스리는 지배자를 원한 것이다.

지도자는 자기를 부정하고 양을 위해서 자기를 기꺼이 희생하는데 지배자는 자기 영광만을 추구하고 양떼를 자기 도구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지배자를 더 매력있게 보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진정한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습성을 갖고 있다. 자율적으로 무엇을 하기보다는 타율적인 것을 더 원한다. 앞에서 이끄는 목자보다는 뒤에서는 모는 목자를 더 원한다. 뒤에서 모는 것은 참된 지도력이 아니다. 지도자는 앞에 있어야지 뒤에 있어서는 안된다. 지도자는 앞에서 피리를 불고 이끄는 사람이 되어야지 뒤에서 휘슬을 불며 여기 저기 몰아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도들은 뒤에서 모든 지도자가 더 지도력이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 그러한 경향으로 지도자는 모범을 보이기에 힘을 쏟기보다는 어떻게 성도들을 각종 프로그램으로 몰아갈까에 힘을 쏟게 된다. 그래서 당연히 타락된 모습이 나올 수밖에 없다.

* 순교자의 영성이 필요하다. 오늘날 교회가 타락하는 상당부분 책임은 성도들에게도 있다. 성도들이 '진실된 목회자'보다 '카리스마적 목회자'를 더 찾는다면, 그리고 진실된 교회보다 외형적인 교회를 더 찾는다면 교회와 지도자의 타락은 피할 수가 없다. 오늘날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이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왕'을 찾고 있다. 교회가 진정 바른 길로 가기는 원하십니까. 지도자 탓을 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이 바른 자세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 보십시오. 내가 '왕'을 찾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이런 자세가 확산되어 모든 성도들이 '왕'을 찾지 않고 진정 '하나님'을 찾는 진정한 신앙을 회복할 때 교회도 따라서 회복될 것이다.

* 세 부류의 영적 지도자: 부흥사, 목자, 순교자. 누가 훌륭해 보이나? 육신적 본능을 중심으로 한 사고체계에서는 화려한 지도력이 요구되지만 진정 하나님의 영적 원리를 중심으로 한 사고체계에서는 '순교자의 영성'이 가장 위대한 영성으로 평가받는다.



사울의 첫 인상(삼상9:1-10)

사울의 첫 인상은 대단히 긍정적이고 인상적이었다.

1. 유력한 집안의 사람.(1) 사울은 가문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족보를 중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울이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호감을 가질만한 충분한 요소가 될 수 있었다.

2. 준수한 사람. 사울은 준수한 소년이었다(2절). 준수하다는 말은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인상도 좋다는 말이다. 준수하다는 말에는 사울에게 교양도 있었고 인격도 나무랄데 없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성도 훌륭했다. 왜냐하면 사람의 인간성은 그 얼굴에 부분적으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얼굴에는 그 사람의 인간성 뿐만 아니라 신앙까지 적혀 있다는 사실이므로 성도는 자기의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3. 탁월한 외모를 가진 사람. 사울은 키도 컸다(2절). 당시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남자에게 있어서 키가 크다는 사실은 얼굴이 준수하다는 사실보다 더 의미가 있다. 키는 남성미를 나타내는 중요한 포인트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울은 얼굴보다는 큰 키로 인해서 탁월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4. 사려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 사울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려깊은 마음도 있었다. 그것은 암나귀들을 잃어버린 아버지를 위해서 그것들을 사방으로 찾다가 더 찾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염려할 것 같아 찾는 것을 단념하려는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5절). 그가 암나귀 찾는 일을 단념하려는 것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었다. 외모에 걸맞는 굳건한 의지를 뽐내고도 싶었으나 아버지가 염려하는 것을 더 신경썼다.

5. 헌신의 원리를 아는 사람. 사울이 아버지를 염려하여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사환이 말했다. "이 근처에 훌륭한 선견자가 있으니 그분에게 물어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그 말이 그럴듯하게 들려서 바로 실천에 옮기고 싶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바가 있어 "그분에게 드릴 물건이 있느냐?" 그는 무엇을 취하려고 생각하기 전에 드릴 생각부터 먼저 했다. 진정한 축복은 바로 이 자세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는데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수시로 시험에 빠지나 하나님께 먼저 드리려는 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절대 시험이 없다. 시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곧 하나님이 나를 왕의 지위로 올려주실 것이다. 내가 그 지위에 올라갔을 때 사울처럼 타락하느냐 아니냐는 그 다음의 문제다. 드린다고 할 때 많이 드린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취하려는 자세보다 드리려는 자세가 먼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실상 사환의 손에 있었던 은 한 세겔의 4분의 일은 많은 돈이 아니다(8절). 한 세겔은 요즘 시세로 약 1만원 남짓하는 돈입니다. 결코 많은 돈이라고 할 수 없는 돈이나 적은 돈이라도 드리려는 자세와 드리는 자의 정성을 하나님은 평가하는 것이다.

6.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 사울은 누구에게라도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사환이 선견자에게 가서 묻자고 제의했을 때 사울은 노예나 다름없는 사환의 말에 대해서 "네 말이 옳다!"라고 할 줄 알았다. 연령과 환경, 나의 이익관계, 지연 및 학연과 같은 연줄과 상관없이 우리는 진리에 순응할 줄 아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네 말이 옳다!(삼상9:1-10)

사울과 사무엘의 역사적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사환의 제의에 "네 말이 옳다!"라고 했던 사울의 자세였다.

* 인생의 가장 위대한 전환점. 인생이 축복된 존재가 되는 가장 위대한 전환점은 "네 말이 옳다!"라는 의식의 문이 열릴 때다. '철이 든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에 있다. 예수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철이 들어야 한다. 정신병 환자들의 치명적인 공통점은 "내 말이 옳다!" 혹은 '내 생각과 판단이 옳다!"라는 의식의 좁은 문에서 결코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내 생각이 있다는 것은 중요하나 내 생각이 고집으로 발전해서는 안된다. 내 생각만을 고집하는 것은 정신이 병드는 지름길이다. 내 생각이 다른 생각에 의해 철회될 수도 있고, 때로는 거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의견이 거부되어도 나 자신의 인격이 거부된 것이 아니라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정신이 병들기 전에 오는 적신호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나를 거북하게 생각하고 나를 멀리하기 시작하는 신호다. 그런 의미에서 한과 상처는 정신이 병드는 가장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다. 한과 상처, 그리고 모든 정신적으로 아픔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하면 항상 이런 태도를 가지고 사십시오. "네 말이 옳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하면서도 충분히 하나님의 바른 원리를 찾아갈 수 있고 나의 뚜렷한 주관을 가질 수 있다.

* 나의 멍에를 매라! "네 말이 옳다!"라고 말할 줄 아는 평범한 자세가 바로 십자가를 지는 자세다. 십자가를 져야 진정한 정신적 자유를 누리게 된다. 내 생각과 판단에 방어벽을 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다 오라고 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다 쉬게 하겠다고 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쉬게 하시겠다고 우리를 초청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무엇 하나를 매라고 하시더니 또 무엇을 배우라고 하고 있다. 예수님의 멍에를 매라고 한다. 예수님 그분을 배우라고 한다. 예수님의 멍에는 십자가이므로 십자가를 매고 그분의 삶을 따르라는 것이다.

* 십자가의 위대한 능력.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 발생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한가지 짐을 더 얹으니 그의 삶이 더욱 무거워질 줄 알았는데 그의 삶에 진정한 안식과 평화가 그때서야 찾아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위대한 능력이다. 지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은가.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것 같아서 어깨가 고통스러운가? 그러면 한가지 짐을 여러분의 어깨에 하나 더 져 보라. 오직 이 한가지 짐만을 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다. 십자가는 나의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를 인정하는 것이다. '내 말이 옳다'라는 주장을 포기하고 '네 말이 옳다'라고 기꺼이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내가 흘리는 땀을 의미한다. 이렇게 십자가를 지는 삶이 펼쳐질 때 여러분의 심령에는 다시한번 진정한 기쁨과 평안이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괜히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우리가 기쁨을 찾는 비결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 짐은 스트레스를 만들어내지만 십자가의 짐은 참 기쁨을 만들어낸다.



하나님과 함께 먹읍시다(삼상9:11-14)

드디어 사울은 사환과 함께 선견자를 찾아 나섰고 선견자가 살고 있는 성을 향해 비탈길로 올라가고 있는데 성으로부터 물길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게 되어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물었다. 소녀들은 매우 친절하고 자세히 사울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 화목제의 원리. 이 소녀들의 자세한 설명에서 '화목제의 원리'를 발견한다.

12절은 백성들이 산당에 제사를 드리러 갔고 13절은 사무엘이 산당에 먹으러 간다고 했다. 산당은 제사하고 먹는 두가지를 모두 하는 곳이다. 제사를 드리기도 하고, 그 제물을 먹기도 하는 제사가 바로 화목제다. 화목제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먹는 것'에 있다. 그 제사를 통해서 단순히 사람들이 함께 모여 먹고 노는 것만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화목제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즐겁게 먹고 논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음식을 대하고 교제하는 풍습!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장 진정한 교제는 음식을 앞에 두고 나누는 '음식 교제'라고 생각했었다. 그 원리가 하나님과의 원리에서도 그대로 통용되어 그들에게는 화목제라는 의식이 매우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잡았다. 바로 이 화목제의 원리를 통해서 주님의 만찬이 있게 되었고, 성만찬의 가장 중요한 의미 중에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해'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 하나님과 겸상할 수 있는 존재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음식! 이 음식 나눔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겸상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므로 화해의 만찬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 식사! 그 만찬! 그 화목제!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엔 생수가 넘쳐 흐르게 됩니다. 그것 이외에 무엇으로 인생의 잔이 채워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라는 인생의 잔을 너무 크게 만드셨다. 그 잔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이 지상에는 하나도 없다. 우주 전체를 다 소유하고 쏟아 부어도 인생에게는 만족이 없다. 어떤 바라던 것을 소유했을 때 하루 이틀 만족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우리 심령은 채워지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으로 우리의 잔이 넘칠 수 있습니까.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라는 말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으면 내 잔이 넘친다는 말이라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내 잔이 넘치기 위해서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라는 말을 잊는다. 여기서 상이란 밥 먹을 때 대하는 밥상을 말한다. 즉 원수가 아무리 둘러싸 나를 해치려 해도 하나님의 밥상을 받고 하나님과 겸상을 하는 존재가 될 때 진정 나의 인생의 잔은 넘친다는 진정한 만족을 고백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함께 먹자! 매일 식사를 하면서 이런 기도를 하자! "하나님! 이 밥상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인줄 믿습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과 겸상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이 밥상에 임재하여 주셔서 이 하나님이 베푸신 밥상으로 인해 감사하면서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어떤 가정에 가 보면 '그리스도는 이 가정의 주인이시오!' 그러나 그 문구만큼 중요한 문구가 바로 '그리스도는 이 밥상의 주인이시오!'라는 말이다. 밥상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생각하자.



작은지파의 역전 주자(삼상9:15-21)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어버린 것, 사울이 그 암나귀들을 사흘 동안 찾다가 찾지 못하고 심지어 베냐민 지파 경내를 벗어나 에브라임 지파 경내 산지까지 가게 된 것, 암나귀들의 행방을 묻기 위해 선견자를 찾으러 성으로 올라가다가 사울과 사환이 소녀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자세히 안내를 받게 된 것, 사울과 사환이 성읍으로 올라가서 성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바로 그 순간 사무엘이 산당으로 가기 위해 성문을 향해 마주 나오는 것, 사울이 성으로 오기 전날 저녁 즈음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사울에 대해 미리 말씀하신 것도 이 만남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 기름을 붓는 의식의 의미

사울을 만나기 전날 "내일 저녁에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너에게 보낼 것이다. 그러면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지도자를 삼으라." "이 물건은 하나님 앞에 성별된 물건이다"라는 의미로 기름을 붓는다. 제사장에게도 기름을 붓는다. 그때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하나님의 성별된 존재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성별된 사람을 지도자로 삼을 때 꼭 기름을 붓는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대개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었다. 기름부음을 받는 축복은 축복 중의 축복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고 성별된 존재에게는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이 사울에게 있게 될 것이란 말이다.

* 반복해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 하님께서 사울에 대해 계속 말씀하셨다. "그가 내 백성들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할 것이다. 내 백성의 부르짖음을 듣고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다(16절)." "어제 내가 네게 말한 그 사람이다! 그가 백성을 통치할 것이다(17절)." 하나님은 철저히 그들의 만남을 계획하시고 그 만남에 개입하셨다.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이미 찾았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와 네 집을 사모한다."

* 역전타를 날리게 하시는 하나님. 사무엘의 말이 사울이 너무 깜짝 놀라서 "나는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인데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나요?" 사울의 겸손해서 자신을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실질적으로 베냐민 지파는 그 당시 가장 작은 지파였다. 사사기 19-21장에 나오는 기브아 깡패들에 의한 레위인 첩 강간살인사건으로 말미암아 배냐민 지파와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 사이에 동족상잔이 벌어졌다. 이 동족상잔으로 이스라엘 나머지 11지파에 의해서 베냐민 지파가 대부분 멸족되었다. 베냐민 지파는 오직 6백명의 남자만 살아남아서 간신히 지파의 명맥을 잇게 되었지만, 가장 작은 지파가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얼마나 오묘한가. 얼마 전까지는 멸족의 화를 당해서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가장 작은 지파가 되었는데, 이제는 그 가장 작은 지파에서 이스라엘 12지파를 모두 다스리는 초대 왕이 탄생하게 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다! 자신에 대해 비하된 생각을 하고 있지 않나? 자신을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 학력에서, 외모에서, 물질, 출신지역에서 스스로를 폄하시키고 있는가? 외적 모습이 아무리 연약해 보여도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다면 틀림없이 지도자의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역전의 하나님은 그분을 지하는 자기 백성에게 그분의 속성대로 멋있는 인생의 역전타를 날리는 역전 주자가 되게 하실 것이다.



때가 이를 때까지 고하지 마십시오(삼상10:9-16)

사무엘은 떠나는 사울에게 세가지 징조와 행동지침을 알려주었는데 그 세가지 징조가 다 그대로 이루어졌다.(9) 이 장면은 사울의 부르심이 철저히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다른 두가지 징조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면서 세 번째 징조는 보다 구체적으로 부연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세 번째 징조가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사무엘상 10장의 핵심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사무엘의 말대로 사울과 사환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를 만났고, 그 순간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했고, 사울도 선지자의 무리 중에서 예언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사울의 모습을 보고 전에 사울을 알던 사람들이 궁금해 했다. 성령이 임하면 사람이 이렇게 변하게 된다.

* 꿈을 소중히 간직하십시오

이후에 사울이 자신의 숙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숙부가 물었다. "어디 갔었느냐?" "암나귀들을 찾다가 찾지 못해서 사무엘에게 갔었나이다." "사무엘이 뭐라고 하느냐?"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형식적 인사말을 주고 받으면서 사무엘로부터 받은 국가적 사명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숙부에게 언급하지 않았다(16절). 그 꿈을 혼자만 간직한 것이다. 아직 손에 붙잡히지 않은 찬란한 청사진을 구체화시키지도 않은 채 너무 지나치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그러한 자세는 결코 유익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마음속에 있는 꿈을 너무 쉽게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어 버리면 이간자가 틈타면서 일이 더 꼬이는 경우가 많으므로 가까운 사람으로서 나의 기도부탁에 진지하게 반응할 사람에게만 꿈과 기도를 나누라. 함부로 꿈을 발설해 기도부탁을 하면 그 꿈은 '기도거리'가 되기보다는 '가십거리'가 될 가능성이 많다.

* 때가 되면 말하십시오

좋은 일일수록 그것이 끝까지 좋은 일로 구체화될 때까지 언급하는 것을 가급적이면 삼가하라! 언급하지 않으면 좋은 일이 될 수 있는 것도 언급함으로 이간자가 끼어들어 좋은 일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런 케이스를 상당히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때가 되어 탁 터뜨리라. 그것이 스릴 만점이요, 더욱 통쾌한 삶이다. 좋은 꿈일수록, 큰 비젼일수록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은밀히 준비하는 과정을 닦아나갈 때 더욱 보람이 있고, 만약 그 꿈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면 그 순간에 더 큰 감격을 누리게 될 것이다. 때가 이를 때까지 함부로 고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꿈을 이간자들이 농락하지 않도록 하는 사려깊은 자세가 필요하다. 만약 여러분의 꿈을 길가에 마구 뿌려 여러분의 꿈을 천하게 만든다면 여러분들은 결코 꿈이 주는 즐거움과 기쁨을 만끽하지 못할 것이다.



숨었다! 잠잠하였다!(삼상10:17-27)

성령이 크게 임했을 때 사울은 선지자의 무리와 함께 예언을 했다. 언변이 없는 사람이 언변이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도 놀라운 성령충만한 증거가 될 수 있으나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성령이 충만하면 입술을 붙잡아버리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능력은 많아지지만 순간적으로 내뱉는 세상적인 언변은 오히려 줄어들게 된다. 말씀의 능력은 강화되고 세상적인 언변은 줄어드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다.

* 지혜로운 언어생활. 짧고 히트치는 유머, 적재적소의 말, 남을 세우는 말, 말의 절제와 같은 것들도 성령충만의 큰 외적 표징 중의 하나. 사울이 입을 열어 예언한 것도 성령충만의 증거지만, 숙부가 물었을 때 입을 닫고 사무엘의 말하던 나라의 일을 고하지 않은 것도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크게 임한 증거 중의 하나다. 입을 열 때 열줄 알고 닫을 때 닫을 줄 아는 지혜로운 언어생활이 중요하다.

* 사울이 왕으로 제비뽑히다! 사무엘이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한 후 애굽에서 인도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상기시키고(18절) "너희들이 그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구하기 때문에 왕을 세우겠다"고 하며 각 지파마다 천명씩 나오라고 명령을 내려 제비로 왕을 뽑는 과정에서 베냐민 지파가 뽑히게 되었고, 베냐민 지파 사람 중에서 또 제비를 뽑는데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마드리의 가족 중에서 또 제비를 뽑는데 기스의 아들 사울이 제비뽑혔다.

* 행구 사이에 숨은 사울. 제비뽑기를 해서 사울이 뽑혔을 때 사울은 행구 사이에 숨어 있었(22절). 사울이 초창기에는 이처럼 겸손하고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행구 사이에 숨어 있는 사울을 사람들 앞에 데려 왔다. 그래서 사울이 백성 중에 서니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훤칠하고 장부답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그때 모인 백성들은 뿌듯한 마음을 가지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 순간 사무엘이 백성들 앞에서 소리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택하셨다. 누가 비교가 되겠는가?" 외모만 봐서도 백성들은 그런 느낌을 강하게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왕 만세!"를 외쳤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사울도 기브아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마음이 감동된 유력한 자들은 사울과 함께 간 반면 어떤 교양없는 사람들은 "웃기고 있네. 저런 젊은 친구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어!"라고 야지했으나 사무엘은 이번에도 그런 멸시의 소리가 간접적으로 들렸지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잠잠하게 행했다(27절).

* 잠잠하여 참아 기다리십시오! 아직 힘과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하나님께 의지하며 조금만 더 잠잠하여 참아 기다리라. 기다림의 지혜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자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능력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잠잠하여 참아 기다릴 때 하나님은 바삐 움직이시며 그를 위해서 일하실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비류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역사는 결국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이 후퇴하는 듯한 자세가 배울만하다. "고하지 아니하니라"(16), "숨었느니라"(22), "잠잠하였더라"(26) 그 후퇴는 결국 위대한 승리의 산실이었다. 전진, 후퇴할 때도 있어야 하나 주의 은혜 안에서 후퇴하는 것은 사실상 전진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잠잠하여 참아 기다리는 자세 속에서 진정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한 발 후퇴, 열 발 전진(삼상:11:1-15)

불량배들의 야지에 온유하게 대처하는 사울. 기다림의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다. 내 감정대로 일하면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잠잠하여 참아 기다릴 때 하나님은 바삐 움직이시며 일하실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비류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신비하게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 나하스를 물리친 사울. 어느 날 암몬 사람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공격하자 야베스 사람은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그들에게 화친을 청했다.(1) 그러나 나하스는 막무가내였다. 그 소식을 길르앗 야베스의 사자가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 전달하자 모든 백성들이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사울이 소를 몰고 오다가 백성들이 우는 것을 보고 자초지종을 묻다가 나하스의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 순간 사울에게 성령이 충만하여 거룩한 분노가 일어나 한 겨리의 소를 취하여 각을 떠서 이스라엘 전역에 사자를 보내며 말했다. "나와 사무엘을 따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소들도 이렇게 될 것이다." 온 백성은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같이 모였다. 사울은 그 백성들을 이끌고 다음날 새벽 암몬을 철저하게 무너뜨렸다. 그 다음에 백성들이 일어나서 사울을 비웃었던 비류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 비류들을 끌어내라! 죽여버리자!" 그때 그들의 들끓는 분노를 사울이 막아 주었다. 그리고 비로소 사울의 왕권이 확고하게 확립되었다. 그 전쟁이 끝나고 사무엘의 인도로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았다. 이제서야 비로소 사울이 정식으로 백성들의 왕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 신앙생활의 36계. 손자병법에 전쟁에 이기는 36개의 계책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한 계책 중의 하나가 마지막 36계인 '도망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이기기 위해서 도망치는 것이다. 신앙 생활에서도 36계가 있어야 한다. 때로 퇴각할 때가 필요하다. 퇴각하면서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겁이 없다'는 말과 '용기가 있다'는 같은 말 같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다. '겁이 없다'는 적을 모르는 상태에서 나가는 것이고 '용기가 있다'는 말은 적을 아는 상태에서 나가는 것이다. 겁이 없이 나가도 일시적인 성과는 있는 것처럼 보인. 예를 들어 고스톱을 쳐도 초보자가 겁이 없이 치기 때문에 처음에는 따는 경우가 많다. 영적인 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 퇴각할 줄도 알아야 한다. 퇴각하는 그 순간은 비참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다. 창13장의 아브라함과 롯. 그 두 목자들이 다투니까 삼촌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한 발 물러선다. 롯은 주책스럽게 보기에 좋은 곳을 덥석 선택해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떠났다. 롯은 한발 전진한 것 같았고 아브라함은 한 발 후퇴한 것 같았으나 롯이 떠나자마자 하나님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다. "눈을 들어 동서남북 바라보라! 네 자손에게 다 주고 영원히 이르리라! 네 자손을 티끌처럼 많게 하겠다." 내가 한 발 후퇴하지만 하나님은 열 발 전진시키신다. 양보해 보라.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스

출처 :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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