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글 모음

[스크랩] 믿으면 뽕나무도 순종한다.(마경훈목사)- 눅17:5-10

호걸영웅 2012. 3. 10. 10:21

 본문은 제자들의 요청으로 시작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구나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 겸손히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영국의 한 보험회사(Sheilas' Wheels)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영국 남성들은 운전을 하다가 길을 잃어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는답니다. 영국 남자 10명 중의 1명은 목적지를 안 가면 안 갔지 끝까지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묻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1년에 평균 444km를 헛 주행 한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를 헛고생 하는 셈입니다. 반면에 여성 운전자는 길을 모를 경우 3/4이 즉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본 답니다. 아마 이런 특징이 신앙생활에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의 믿음이 남자들의 믿음보다 더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남자들이었는데도 겸손히 주님에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여러분! 믿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열쇠는 믿음입니다. 구원의 조건은 믿음입니다. 치유의 조건도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도 믿음입니다. 히11:6에 보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생활의 질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믿음을 가져야 하고 또 믿음은 자라야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기 생각에 무엇이든지 안 된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곤들메기’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물고기입니다. 심리학자들이 곤들메기로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곤들메기와 작은 물고기를 수족관에 넣고 작은 물고기를 마음대로 잡아먹으며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곤들메기와 작은 물고기 사이를 얇은 유리로 가로막았습니다. 곤들메기는 눈앞의 사냥감을 향해 돌진했지만 유리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 후 유리를 치웠습니다. 그러나 곤들메기는 자기 앞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먹이 감을 보고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곤돌메기는 유리에 부딪쳐 머리 아팠던 과거의 경험을 뛰어넘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곤돌메기는 눈앞에 먹이를 두고도 먹지 못해 2주일쯤 후,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세상에는 곤돌메기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셔도 자신의 한계에 갇혀서 전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설교를 들으시고 과거의 실패, 과거의 상처의 한계를 넘어서는 한계 이상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는 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응답하신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믿음의 능력과 믿음이 성장하는 비결을 살펴보겠습니다.
 
1. 믿음은 기도로 성장합니다.
   5절에 보니 제자들이 주님에게 “우리의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3 단어로 구성된 기도입니다. 주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제자들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하고 싶다면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주십니다.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게 되면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게 됩니다.
   요 4장에 보면 주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갈릴리 가나에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왕의 신하 한 사람이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가버나움에 사는 사람인데 자기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가 주님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주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그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버나움으로 가다가 자기 종들을 만나 아들이 살았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종들에게 아이가 낫기 시작한 때를 물었습니다. 그 때가 어제 일곱 시라는 답을 듣습니다. 그 사람은 주님이 말씀하신 그 때에 아들이 낫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와 온 집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 사람은 주님을 찾아가서 아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한 후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확인하므로 믿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지난주에 광주 제일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 교회에 86세 되신 장로님이 한 분 계시는데 그 분이 집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을 하셨습니다. 장로님이 3일째 되는 날 저에게 점심식사를 대접하시면서 “저는 이번 집회에서 평생 들어보기만 하던 신비한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분이 어떤 체험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장로님에게 어떤 체험을 하셨는지 물었더니 동문서답을 하셔서 어떤 체험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물음에 “목사님, 성경을 정말 잘 쪼개내요”라고 하시더군요. 어찌 됐든 그분의 체험이 주님을 체험한 것이라면 분명히 믿음이 성장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시간을 정해놓고 지속적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기도의 응답으로 주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기도응답을 체험하면 그만큼 여러분의 믿음은 성장할 것입니다.
 
2. 주님은 생명 있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믿음은 크기가 있습니다. 작은 믿음이 있는가 하면 큰 믿음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이 작다는 말이 6번 나오고, 믿음이 크다는 말이 1번 나옵니다. 작은 믿음이 있고 큰 믿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크기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믿음의 크기가 아닙니다. 큰 믿음의 크기보다 생명이 있는 믿음을 더 중요하게 다룹니다.
   제자들은 주님에게 믿음을 더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6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주님은 믿음의 크기보다 생명이 있는 믿음인가 아닌가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가 지난 6월에 이스라엘을 다녀와서 여러분들에게 겨자씨를 나눠드렸습니다. 제가 나눠드린 겨자씨의 크기가 얼만했습니까? 마치 들깨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씨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이 겨자씨를 자라게 합니다. 그 작은 씨가 살아있기 때문에 심으면 자라고 열매를 맺고 새들이 와서 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리 새끼와 꿩 새끼가 함께 부화했습니다. 부화하고 얼마 지나면 신기하게도 오리는 물을 찾아가고 꿩은 산으로 갑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종자가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마음에 예수님을 확실하게 모셨다면 여러분은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요 14:6에서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3장에 보면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거듭남이란 예수님을 믿으므로 성령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의 생명을 내 안에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거듭나게 되면 희한하게 믿음이 생깁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천국이 있다고 믿어지고, 자기가 그곳에 가게 될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또 한 번도 만나본적이 없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믿어지고,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믿어집니다.
   제가 집회를 했던 교회에서 어떤 장로님은 장로님인데 천국이 안 믿어진답니다. 가봐야 안 다고 합니다. 미안하지만 그분은 거듭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 분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없어서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 생명을 받지 않으면, 믿으려고 노력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거듭나면, 예수님의 생명을 받고나면, 믿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믿어집니다. 이것이 믿음의 비밀입니다. 신비인 것입니다.
   제가 약 10년 전에 전주에서 열린 청소년 집회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청소년들에게 믿음을 설명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이에게는 1만원을 준다” 아무도 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저는 아저씨는 될 수 있어도 아버지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본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직접 들은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을 손으로 만져본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모인 여러분들 중에 거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아버지로 믿어집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들어와서 성령께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생명 있는 믿음 즉 생명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믿음을 원하십니다.
 
3.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본문을 앞 뒤 문맥으로 볼 때 믿음은 두 가지를 가능하게 합니다.
 
   첫째, 불가능했던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주님에게 갑자기 생뚱맞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앞의 본문과 연결시켜서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본문 바로 앞에서 주님은 실족케 하는 것과 용서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4절에 보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일곱 번이라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일곱 번의 용서를 하는데 평생 일곱 번도 아니고 하루에 일곱 번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때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용서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 믿음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자들처럼 “내게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간혹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용서할 수 없는 용서의 기적에 관한 간증을 듣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 하겠습니다.
   김장환 목사님이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58년 4월 25일에 한국 출신 유학생 한 명이 살해되었다고 하는 사건이 신문지상에 보도되었습니다.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다니는 오인호라고 하는 학생이, 부산에 살고 있는 부모님들에게 쓴 편지를 부치고 돌아오는 밤길에 깡패 열한 명을 만났습니다. 그 깡패들은 오인호가 가지고 있는 돈을 뺏기 위해서 쇠파이프와 야구 방망이로 때리고 구둣발로 마구 걷어차서 실신시킨 다음에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을 빼앗아 달아났습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하여 오인호 학생을 발견했을 때, 이미 그는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 소식을 접한 전 미국 국민들은 그 열한 명은 나이가 어리지만 관용을 베풀면 안 된다, 그 깡패들을 어른으로 취급하고 사형에 처해야 된다고 난리였습니다. 사건을 맡은[빅토르 블랭크]라고 하는 검사도 범인 모두에게 사형을 구형했습니다.
   그 때 마침 한국 부산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 왔습니다. 오인호의 가족들이 필라델피아 법정에 낸 진정서였습니다.
   그 진정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의 법률이 허락한다면, 그 열한 명에게 가장 적은 형벌이나, 무죄로 판결 지어 주시기를 진정으로 호소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장래를 위한 참된 교육을 위해서 적으나마 우리 가족들이 모여서 거둔 사랑의 표시, 약간의 현금을 보내드립니다. 이것은 다만 우리가 기독교인이요,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용서를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인격으로는 불가능한 용서입니다. 믿음의 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용서입니다. 믿음은 불가능한 용서를 가능하게 합니다.
 
   둘째, 불가능했던 초자연적인 기적이 가능해집니다.
   6절에 보니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말을 하면 그 말이 능력이 있어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뽕나무조차 순종하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팔레스타인 뽕나무는 자라면 10-15m나 됩니다. 뿌리는 땅에 박히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한 번 심겨지면 그 뿌리를 뽑기가 너무나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뽕나무는 무려 600년 까지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이 뽕나무를 뽑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뽕나무를 개천한 가운데 심는 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바다 한 가운데 심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이것은 어려운 일 정도가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갖고 말을 하면 그대로 된다고 하니 이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일부러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는데 우리에게 돈이 없거나, 환경이 허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본문을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가능하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에게 불가능은 없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확신하는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저는 여러분이 막 10:27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무엇이든지 가능합니다.
   우리는 3년 전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기적을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교회의 명의가 우리교회를 떠나신 최일범 장로님 이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4년간 명의를 변경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의 감동에 순종해서 저는 금식을 하고 여러분은 기도해서 명의가 변경되지 않았습니까? 제 40일 금식이 토요일에 끝났는데 월요일에 명의가 변경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후에 하남시의 담당 직원이 저에게 “이런 경우는 전국에서 처음입니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최초의 역사를 믿음으로 일으킨 것입니다. 역사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4. 믿음은 말로서 증명 됩니다.
   누가 뽕나무에게 “뿌리가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미친 사람이거나 바보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쓰십니다. 우리의 말에 열매 맺게 하십니다.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보고를 요약하면 간단합니다. 10명은 “우리는 약하고 그들은 강하니 우리는 못들어갑니다”라는 애용입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이 믿는 신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강하시니 우리는 들어갈 수 있습니다”라는 보고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8) 하나님은 그들이 말한 대로 역사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지고 승리를 말하시고, 성공을 말하십시오.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하십시오.
   [찰스 캡스]라는 사람은 믿음의 선포를 깨달은 후에 98만평을 경작하는 대농이 되었습니다. 그가 믿음의 언어를 깨닫기 전에 그는 기도도 하고 헌금도 믿음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농사를 실패했습니다.
   어느 날 [찰스 캡스]가 기독교 신앙도서를 읽다가 자신의 말이 그의 농사를 망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화를 심어놓고 “이거 비가 오면 심어도 농사를 망칠 수 있는데 비가 올까 걱정이네” 과연 비가 내렸고 목화는 싹이 나지 않았습니다. “추위가 일찍 오면 싹이 나오기 전에 죽을 것인데 걱정 되네” 과연 추위가 일찍 와서 그가 말한 대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의 고백이 기도를 망치고 있었습니다. 그가 헌금을 드려도 그가 입으로 부정적인 말을 하므로 다 수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부정적인 말로 인하여 하나님이 복을 주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을 잃고 그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도하고 있었지만 불안함과 불평을 이야기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헌금을 심어놓고도 그는 부정적인 말로 축복을 갈아엎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는 기도할 때 문제를 말하지 말고 말씀을 믿고 이루어질 것을 말해야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들이 형통하기를 원하지만 우리들이 고백을 바꾸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의 고백을 하지 않으면 축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2주일간 TV시청도 하지 않고 나가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을 훈련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빌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가 부족할 때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시인했습니다.
   그는 의심이 일어나기도 하였지만 성경이 사실이며 성경은 진리라고 하는 것을 계속 입으로 시인하였더니 의심은 사라지고 놀라운 일들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과연 그 때부터 부족함이 없는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땅을 주신다고 시인하기 시작했습니다. 돈은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시인하면서 입으로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기적같이 큰 땅을 구입하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잠언12:14 말씀대로 입술의 열매로 인하여 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98만평이라는 어마어마한 땅에 농사를 짓는 대농가가 되었습니다.
   KBS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생노병사]라는 프로에 나온 내용입니다. 췌장암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걸리는 암중에 9번째지만, 일단 췌장암이 생기면 95%정도가 5년 안에 사망하고 나머지 5%정도만 5년 이상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췌장암이 생긴지 1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 건강을 유지하는 분들 가운데 [전산옥]씨라는 분이 방송에 출연하여 말했습니다. 2003년에 췌장암3~4기라는 판정을 받고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장례식장에 걸어둘 영정사진을 찍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 암과 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입으로 이렇게 시인하였다고 합니다. “야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 그러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야 나는 행복해 정말 행복해 나는 건강한 행복자야” 이분은 암이 간에 전이되어 췌장 뿐 아니라 온통 주변에 암이 퍼져 나가 살아날 확률은 전혀 없었는데 놀랍게 치료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입술의 고백으로 암을 이겨냈던 것입니다.
   마 26:73에 보면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던 장소에서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네 말이 너를 분명하게 보여준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말이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긍정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부디 믿음의 말을 하시고, 성경적인 말을 하시고, 긍정적인 말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로 증명됩니다.
 
5. 믿음은 사역으로 성장합니다(7-10절).
   사도들이 주님에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믿음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곧 바로 주인에게 충성하는 종에 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종이 하루 종일 밭을 갈고 집으로 들어오면 주인이 “수고했다. 와서 밥 먹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주인은 수고한 그에게 “나의 먹을 것을 준비해라. 그리고 내가 밥을 먹는 동안 내 옆에서 수종들고 너는 내가 다 먹은 후에 먹어라”고 말합니다. 종은 주인이 명한대로 했습니다. 그렇다고 종에게 감사하는 주인이 없습니다. 또 종은 주인의 명령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한 사도들에게 왜 일하는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까? 믿음이 성장하는 비결이 바로 주의 일 즉 사역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역은 우리의 믿음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보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믿음이 성장하면 사역에 헌신합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든 믿음이 떨어지면 사역에서 멀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신분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사람이 신분의식을 분명히 하면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믿음 하나가 우리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와 계십니다. 이 믿음 때문에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 공중에 들림 받아서 공중 혼인잔치를 하게 될 것이고 주님의 신부로 영원토록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 때문에 천국의 소망 내세의 소망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가져야 할 신분의식 중에 중요한 것 하나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신분입니다. 밭에 나가서 수고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쉬거나 밥을 먹지도 못하고 먼저 주인을 수종듭니다. 그리고도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도 듣지 못합니다. 그리고도 종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종의 신분의식이 필요합니다.
   작은 일 하나 해 놓고도 생색내고, 자랑하고,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인정받지 못하고, 조금만 무시당하면 섭섭한 마음에 시험이 들고 토라집니다. 어느 부흥사목사님이 “누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입니까? 누가 봉사를 잘하는 사람입니까? 누가 최고의 봉사자입니까? 삐지지 않고 예수 믿는 사람, 삐지지 않고 봉사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현실을 말한 것이지만 사실 부끄러운 현실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삐질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종이 왜 삐집니까? 종은 삐질 자격도 없어요. 주제 넘는 짓입니다. 종의 신분의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꾸준히, 묵묵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하면 되는 것입니다.
   고신일목사님은 요즘은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기만 하면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는데 이게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곳곳에 자기 일에 불성실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성실한 사람이 칭찬 받고 대단하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성실한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고신일 목사님은 효자상, 효부상을 주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랍니다. 모든 사람은 효도해야 하는데 너도 나도 효도하지 않으니까 특별한 사람을 택해서 효자상, 효부상을 주는 것이랍니다. 이게 비정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전도 많이 했다고 상 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 잘 했다고 상 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훌륭한 많은 장로님들이 계셨지만 특히 외정시대에 황해도 재령에 계셨던 정찬유 장로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수리조합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버셨고, 그 시대에 그 지역에서 가장 갑부였습니다.
   장로님은 자기 집을 지으려고 재목과 모든 것을 준비해 두시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비몽사몽간에 어떤 분이 나타나서 한쪽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르치며 “저기 동쪽을 보아라. 허물어진 성전이 보이지 아니하냐”라는 음성이 들려 그 순간 잠이 깼습니다.
   장로님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 하나님의 성전보다 내 집을 먼저 지으려고 하니 이렇게 보여 주시는군요”라고 하며 그 재목을 다 바쳐서 성전을 짓고, 그 당시 돈으로 3만 원, 현재 돈으로 20억 원 정도를 들여 예배당을 잘 지었습니다.
   교회를 다 짓고 나서 교회에서는 [정찬유 장로 기념예배당]이라고 교회 벽에 붙여 놓아서 이 장로님이 그 다음 주일부터 교회를 나오시지 않고 시골교회로 출석하셨습니다.
   목사님과 교인들이 왜 교회에 오시지 않느냐고 묻자 장로님은 “나는 주님의 교회에 나가지 사람교회 안 나간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나를 알아달라고, 나를 높여 달라고 하면 안 됩니다. 종의 신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성장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서 자기를 보면 그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 줄 압니까?
   저는 요즘 부르는 찬양도 좋지만 찬송가가 더 가슴에 와 닿을 때가 많습니다. 찬 355장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입니다. 3절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가오리다”
 
   오늘 믿음의 능력과 믿음의 성장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봤습니다.
   1. 믿음은 기도로 성장합니다.
   2. 주님은 생명 있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3.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첫째, 불가능했던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둘째, 불가능했던 초자연적인 기적이 가능해집니다.
   4. 믿음은 말로서 증명 됩니다.
   5. 믿음은 사역으로 성장합니다(7-10절).

출처 : 세계화 목회연구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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