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상품 포도나무 (사야 5: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맺기를 원하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물질적인 축복을 받고 자신이 있는 곳에서 승리하여 머리가 되는 것입니까? 한국의 기독교는 이런 면을 많이 강조합니다. 대부분 간증하는 사람을 보면 예수님 믿고 복받아서 부자가 되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이런 면은 아주 조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초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열매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고 했을 때 이 열매가 부나 성공이 아님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만약 이런 것으로 그 사람을 평가한다면 우리 가운데 구원 받지 못할 사람들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오늘 이사야 말씀에 보면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의와 사랑과 순결입니다. 혹시 이것을 알고 있습니까? 이런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한다면 우리 가운데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를 알고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제일 장 하나님은 열매 맺을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주셨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이사야는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위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합니다. 그는 자신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하나님의 포도원에 대해서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자 합니다.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깨우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로 지어서 이스라엘 전 지역에 알리고자 합니다. 노래로 여러 번 반복하여 불러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내면에 심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는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심히 기름진 땅에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심히 기름진 땅에 포도원을 만들었다는 것은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이주시킨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에게 본토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지 야곱 때에 이스라엘은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은 사백년이 지난 후에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사야는 이 두 가지 사건을 하나님이 포도원을 심히 기름진 땅에 만들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과연 가나안 땅이 심히 기름진 땅이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떠난 메소포타미아나 이스라엘이 떠난 이집트는 공통적으로 사대 문명의 발생지입니다. 이곳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나일강이 흐르는 비옥한 땅입니다. 반면에 가나안 땅은 어떻습니까? 국토의 면적은 남한의 4분의 일뿐이 되지 않는 작은 땅입니다. 북부 지방은 비가 800mm 정도 오지만 남부 지방은 200mm뿐이 오지 않는 건조한 땅입니다. 북쪽 지방만 비옥한 땅일뿐 토질도 석회암 현무암, 사암과 같은 바위가 많고 남부는 반은 사막 땅입니다. 척박한 땅입니다. 심히 기름진 땅이라고 하는데 기름도 나지 않습니다. 물론 그곳에 과일 농사는 잘 됩니다. 그곳은 일조량이 많고 건조하기 때문에 과일이 크고 맛이 있습니다. 장정 둘이 포도 한 송이를 꿰고 올 정도로 과일이 잘 됩니다. 그러나 다른 농사는 그렇게 잘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은 이스라엘이 척박한 땅이지만 옛날에는 심히 기름진 땅이 아니었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이 분쟁할 때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였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동산같고 애굽같았다고 말합니다. 이를 볼 때 가나안 땅이 소돔 고모라나 애굽보다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이 사실에 대해서 이번 말씀을 준비하며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땅을 심히 기름진 땅이라고 하였을까요? 이는 그곳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장 알맞은 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이 신앙 생활하기에 가장 알맞은 곳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심히 기름진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은 심히 기름진 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에게는 노예로 팔려간 이집트의 보디발의 집이 심히 기름진 땅입니다. 요셉이 갇힌 감옥이 심히 기름진 곳입니다. 모세에게는 사십년 양 치며 처가살이하던 광야 땅이 심히 기름진 곳이요. 애굽에서 벗어나 사십년 광야에서 떠돌던 곳이 심히 기름진 곳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천안 캠퍼스와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직장과 가정이 심히 기름진 땅입니다. 요즘 기름값이 올라가서 살기 조금 힘들어도 이곳이 우리에게는 심히 기름진 땅임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조금 못살아도 우리가 사는 곳이 심히 기름진 땅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곳을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심히 기름진 땅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하나님은 극히 기름진 땅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극상품 포도나무는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극상품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는 최상의 포도나무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에서 극상품 포도나무가 재배되었습니다. 장정 둘이 포도 한 송이를 멜 정도로 큰 포도가 열리는 포도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포도는 크기만 뛰어날 뿐 아니라 맛도 뛰어납니다. 이스라엘 지방의 포도는 한국의 포도에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맛이 있습니다. 이곳에 다녀 온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이곳의 포도는 거봉이나 머루 포도나 킴벨 포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맛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처럼 극상품 포도나무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황인종도 섞여 있지만 대체로 백인종입니다.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잘 난 민족은 아닙니다. 그들의 IQ가 높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미남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은혜와 사랑에 기초하여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는 데 이의가 없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인구는 전 세계에 흩어진 모든 민족을 합쳐도 1800만이고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는 민족은 600만입니다. 그들은 세계 인구의 0.3%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1995년 기준으로 유대인이 노벨상을 140명이나 타서 전체 수상자의 21%를 차지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뛰어난 민족이 될 수 있었을까요? 가장 뛰어나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극상품 포도나무인 예수님이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극상품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우리가 포도나부 되신 예수님 안에 붙어 있으면 우리도 극상품 포도나무로 변화됩니다. 우리는 들포도 나무입니다. 하지만 극상품 포도 나무인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으면 우리도 극상품 포도나무로 변화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극상품 포도 나무이신 예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점차 예수님에게서 생명력을 공급 받아어 우리도 극상품 포도나무로 변화됩니다. 실제 IQ도 EQ도 높아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지 복을 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종자가 바뀌게 됩니다. 들포도가 극상품 포도로 변화됩니다. 우리 자신이 극상품 포도나무입니다. 우리 한 번 말해보겠습니다. “나는 심히 기름진 땅에 사는 극상품 포도나무다.”
하나님은 심히 기름진 땅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울타리를 만들고 망대를 만들었습니다. 짐승이나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보호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방패와 산성이 되셔서 지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술틀도 만들었습니다. 포도를 가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포도를 가공하여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극상품 포도를 맺을 수 있는 환경을 더할 것이 없게 완벽히 만들어 주셨습니다.
제이장 이스라엘은 들포도 열매를 맺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하나님은 환경 조건을 완벽하게 만들었습니다. 극상품 포도나무에서 극상품 열매가 맺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들포도 열매를 맺었습니다. 여기서 극상품 포도와 들포도 열매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사야서에 보면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정의의 열매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은 극상품 포도 열매인 공의와 정의의 열매를 맺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포도인 포악과 부르짖음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정의는 바르고 옳게 사는 것입니다. 경제 정의가 있는 사회는 뇌물을 받지 않고 정당한 방법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 잘 사는 사회입니다. 정치 정의는 탐욕을 따라서 정치하지 않고 공의를 따라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평등과 자유가 있는 정치입니다. 사회 정의는 사회에서 인권을 존중하고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시는 정의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투기로 돈을 벌어서 경제 정의를 망가뜨렸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권력자에게 아부하며 불의를 책망하지 못하였습니다. 재판관은 뇌물을 받고 돈 있는 자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런 정의의 대표적인 기관이 가톨릭의 정의 구현 사제단입니다. 이들은 정의가 땅에 떨어졌을 때마다 들고 일어났습니다. 박정희 시절 오랜 유신 독재로 인권이 유린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할 말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전두환 시절 힘으로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독재에 항거하는 박종철군을 물고문으로 죽였습니다. 이때 정의 구현 사제단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씨가 되어서 육십 항쟁을 이끌었고 간접투표를 직접투표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정치 정의를 실현시긴 사건입니다. 요즘에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세금 포탈과 자식에게 경영권을 불법 승계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검찰은 이건희 회장에게 징역 칠년, 벌금 삼천 오백억원을 구형하였습니다. 이것을 이끌어낸 것도 정의사제 구현단입니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의 비리를 정의사제구현단에서 이야기 했고 정의사제구현단이 특검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찬들은 그때 무엇을 했습니까?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 예수 믿으면 변호사된다. 예수 믿으면 회장된다. 이런 것만을 외치지 않았습니까? 무슨 게이트다 하여 조사를 하고 보면 그곳에 크리스찬들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부정부패가 만연하였습니다. 많은 교회가 예수 믿으면 정의롭게 살아야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면 하나님의 복 받은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회개하고 정의를 구현할 수 있어야합니다. 불의에 대항하여 싸워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극상품 열매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초청하는 최아브라함 목자님은 이런 면에서 본이되시는 분입니다. 그는 금융감독원에 근무하는데 어느날 선물을 받고 집에 와보니 어떤 분이 금두꺼비를 주었다고 합니다. 하룻저녀 고민하다 그분은 그것을 돌여주었다고합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둘째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사야 3장 15절입니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냐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도다” 이들은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고아나 과부와 같은 약자들에 대해서 사랑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들의 것을 착취하고 괴롭혀서 맷돌질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서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성령의 열매도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랑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합니다. 먼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해야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사랑스러워 보여야합니다. 미워보여서는 안됩니다. 죄악에 대서서는 미워할지라도 죄를 지은 사람은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합니다. 크리스찬이 미워하고 싸워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과 원수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십자가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사랑은 값싼 동정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척하며 하나님께 불신을 심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십지가의 사랑으로 사랑해야합니다. 우리를 건강하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살립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정에서 교회에서 싸우는 것은 역설입니다. 기독교사를 공부하면 기독교인들이 반인간적인 잔학한 행위를 한 것에 놀라게 됩니다. 그들은 세례를 다시 받는 재세례파를 무자비하게 죽이고 성찬이 예수님의 피와 살의 상징이라고 한다고 사람을 죽이고 성경책을 본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덜 중요한 교리 때문에 가장 중요한 사랑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합니다. 우리 천안 유비에프는 지금까지 안서초교와 장애우들을 돌보는 교회를 지원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원하는 곳이 그렇게 필요로 하지 않는 곳이어서 구제를 얼마간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월드 비전을 통하여 다시 구제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열매임을 믿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도 사랑이 넘쳐야합니다. 허진영자매는 부모님이 이혼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병으로 입원하셨습니다. 진영 자매는 할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간호를 하였습니다. 이분은 사랑의 열매를 맺은 훌륭한 분이십니다. 우리 천안 유비에프의 자랑입니다.
셋째는 순결의 열매를 맺어야합니다. 이사야 1장 21절입니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하나님은 신실하던 성읍이 창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도덕적인 타락입니다. 그들은 순결한 자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친족간에 부끄러운 일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짐승과도 부끄러운 짓을 하였습니다. 남자끼지 여자까지 동성애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함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순결의 열매를 맺어야합니다. 거룩함의 열매를 맺어야합니다. 성적으로 깨끗해야합니다. 하나님을 떠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성적인 타락입니다. 노아시대나 소돔과 고모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즘의 크리스찬은 어떻습니까? 크리스찬이라고 하면 순결을 보증합니까? 크리스찬의 가정은 이혼을 하지 않습니까?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이것도 오히려 개신교보다는 가톨릭이 이혼율이 더 적다는 점이 충격적입니다. 이 시대는 소돔 고모라와 유사합니다. 향락 산업이 번창하고 있습니다. 순결의 둑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동거하는 것을 묵인합니다. 장로님 집사님이 아내를 두고 바람 피우는 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적어도 바람 피우지 않는다는 보중 수표가 되어야합니다.
제삼장 열매를 맺지 않는 자는 심판이 있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들포도를 맺자 담을 헐고 울타리를 걷습니다. 이곳에 이민족이 침략하게 합니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의해서 침략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은 황폐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도끼로 쩍어버립니다.
왜 우리가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어야합니까? 왜 우리가 정의와 사랑과 거룩함의 열매를 맺어야합니까? 왜 반드시 맺어야합니까? 열매를 맺지 않으면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지 않으면 한 번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면 사랑과 공의와 순결의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열매를 맺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극상품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님께 붙어서 생명력을 공급받을 때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정의와 사랑과 순결의 열매를 맺도록 도우실 줄을 믿습니다. 아멘!
[출처] 이사야 5장 일부 극상품 포도나무 |작성자 onoin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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