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무지(이사야 22장 1-14절 )
[사] 22:1 |
이상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찜인고 |
[사] 22:2 |
훤화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며 |
[사] 22:3 |
너의 관원들은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
[사] 22:4 |
이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멸하였음을 인하여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
[사] 22:5 |
이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이르는 분요와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치는 부르짖는 소리로다 |
[사] 22:6 |
엘람 사람은 전통을 졌고 병거 탄 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 기르 사람은 방패를 들어 내었으니 |
[사] 22:7 |
병거는 너의 아름다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고 마병은 성문에 정렬되었도다 |
[사] 22:8 |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 이 날에야 네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고 |
[사] 22:9 |
너희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도 보며 너희가 아래 못의 물로 모으며 |
[사] 22:10 |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케도 하며 |
[사] 22:11 |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 일을 하신 자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자를 존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사] 22:12 |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
[사] 22:13 |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 |
[사] 22:14 |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가라사대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새로운 도로가 만들어질 때 도로 옆에 표지판을 세워 놓고
“공사장 외 차량은 통행금지” 라고 써놓습니다. 그런데 가끔 그 표지판을 무시하고 들어갔다가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히 표지판에 적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설마 길이 아주 없으려니 하고
들어가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가면 길이 나올 것 같으니까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고집이 세거나 주관이 너무 강한 자들이
그러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수 없이 “그 길은 통행금지다” 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절대로 고집을 버리지
않고, 꿋꿋이 “나는 가리라” 하고 갑니다.
(욜02:12)도“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고 하시지만, 하나님 말씀의 통행금지 표지판을 보고도 외면하고 어둠의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첫 번째. 무지한 자들의 기쁨.
(사22:1-4) “이상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찜인고 (2) 훤화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며 (3) 너의 관원들은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4) 이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멸하였음을 인하여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이상의 골짜기는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에는 “흰놈 골짜기”, “기드론 골짜기”
같은 골짜기 들이 많이 있었는데, 선지자들은 이러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의 이상을 보곤 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가리켜 “이상의 골짜기” 라고 부른 것입니다.
본문은 앗수르의 침공
앞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는 가운데 세속적으 로 대처하고 있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먼저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과 관련된
이방 군대의 침공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주전 701년에 있었던 앗수르 왕 산헤립의 예루살렘 공격이 그 배경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히스기야 왕 14년째인 주전 701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은 대군을 이끌고 두 번씩이나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첫 번째는 엄청난 공물과 함께, 히스기야의 항복을 받고 군대를 철수시켰지만(왕하18:13-16), 두 번째는 하나님의 간섭으로 18만 대군을 모두
다 잃어버리고 패주하였습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예루살렘이 앗수르 군대의 침공을 넘긴 후에 두 번째 침공을
받는 상황에서 앗수르 군대가 철수한 것을 보고 즐거워 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지붕은 넓고
평평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에서 모임도 갖고 잔치도 하였습니다. 앗수르의 18만 군대가 하룻밤 사이에 죽고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즐거워서 소리 지르며 옥상으로 올라가 기뻐했습니다. 마치 자신들이 싸워서 승리를 이룬 것처럼 기뻐했습 니다.
이러한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책망합니다.
“훤화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며, 너의 관원들은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까지 진격해 오면서, 유다의 여러 성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 유다의 관원들과 군사들이 보여준 수치스러운 행동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결코 명예롭지
못한 치욕적인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거민들은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단지 앗수르 군대가 철수한 것만으로 기뻐하며, 승리의 잔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지금 비록 앗수르가 물러갔으나, 절대로
즐거워 할 때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예루살렘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슬피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멸하였음을 인하여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당장
눈앞에 일어난 일시적인 앗수르 군대의 철군을 넘어서서, 더 멀리 예루살렘 성의 패망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애통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눈 앞에 현실만 바라보는 무지한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선지자를 슬프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이 시대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눈 앞에 것만 이루어지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다가도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금방 낙심하고 한숨짓고 사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히5:12-14)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저희는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곧 장성한 자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범사에 면역성을 가지고 세상일에 크게 요동치 아니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눈
앞에 것에만 치우쳐서, 너무 좋아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에 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영적인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무지한 자들의 모습.
(사22:5-14) “이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이르는, 분요와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치는
부르짖는 소리로다 (6) 엘람 사람은 전통을 졌고 병거 탄 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 기르 사람은 방패를 들어 내었으니 (7) 병거는 너의 아름다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고 ,마병은 성문에 정렬 되었도다. (8)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 이 날에야 네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 보았고 (9) 너희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도 보며, 너희가 아래 못의 물로 모으며 (10)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케도 하며
(11)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 일을 하신 자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자를 존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2)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13)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 (14)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가라사대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 무지함 속에 살면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깨닫도록 하십니다. 깨닫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몇 번이고 더 강도를 강하게 해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게 함에도 깨닫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손을 놓아버리십니 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무지한 백성들이 깨닫지 못하고, 앗수르가 물러가자
그들은 얼씨구나 좋다 하고 더 세상적으로 먹고 마시고 즐겼습니다. 그런데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대로 놓아두셨습니까?
8절의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
하나님이 무엇을 벗기셨습니까? 그들의 무지함입니다. 그 무지함을
무엇으로 벗기셨습니까?
이방의 세력, 즉 바벨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초토화 시켜버렸습니다. 그들은 기나긴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런 앞 일을 모르는
이스라엘은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요?
첫째. 그들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습니다.(8절)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더 의지하였습니다.
둘째.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였습니다. (9절)
지금 전쟁을 일으키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전쟁을 이겨보겠다고 성을 보수하고 전쟁에 준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미련하고 무지한
자들 아닙니까?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전쟁을 인간이 막아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이런
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그 고난을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하는 자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난인데 어떻게 그 고난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해결 하려면 할수록 더욱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생길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고난이 왜 왔는지 깊이 생각하고 내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만이 해결 받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해결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아래 못의 물도 모았습니다. (9절)
전쟁 때 물은 무기만큼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전쟁에 대비한 것입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잠깐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단과 방법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이 아무리 특출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무지한 자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항상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내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께 묻는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넷째.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였습니다. (10절)
전쟁 시에 특수한 용도로 사용하려고 계수(개조)하였을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습니다. (11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군의
침공에 대비해서 예루살렘 방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는 것 자체는 결코 잘못된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전적으로 인간의 노력에만 의존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을 망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죄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같은 예루살렘의 죄를 두 가지로 지적하였습니다.
(1)하나님을 앙망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앙망하다”는 말은 호감을 가지고 주의력을 집중해서 골똘히 바라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앙망하기 보다는 세상 권력을 더 앙망하였습니다.
(2)하나님을 존경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존경하다” 는 “앙망하다”
와 유사한 말로 주의를 기울여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의견과 뜻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주목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나님께 이 같은 마음 자세를 가졌더라면 그들은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섯째. 회개할 줄 모르는 예루살렘 백성들입니다. (12-14절)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울며 불며 가슴을 치며 회개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 반대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소를 잡고, 양을 잡으며, 먹고
마시며 즐기면서 하는 말이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면서 교만 방자한 태도와 불신앙적인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분노에 찬 심판이 선언됩니다. 14절에“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가라사대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만군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칭호가 두 번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즉 반드시 너희를 심판으로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주전 586년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당함으로 써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은
유보될 수는 있어도, 회개치 않으면 반드시 죄에 대한 보응을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암03:02)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그러므로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는 회개하고자 해도 회개할 수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습관이 되어야 하듯이, 회개도 우리의 신앙 속에서 몸에 배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습관처럼 하는 죄에 대한 뉘우침만 해서는 안됩니다. 진실로
마음을 찢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욜2:13)엔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회개를 한 자에게
하나님은 무지에서 깨어나게 하시고 하늘의 지혜와 명철로 함께하여 주실 것입니다.
=== 오직 예수 ===
편집;안익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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