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야 강해

혹독한 묵시를 보다(이사야21장1-17절 )

호걸영웅 2013. 5. 30. 09:58

                           혹독한 묵시를 보다(이사야211-17 )

 

바벨론 멸망에 관한 묵시

[] 21:1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 적병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남방 회리바람같이 몰려왔도다

[] 21:2

혹독한 묵시가 내게 보였도다 주께서 가라사대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바벨론)는 약탈하도다 엘람(이란)이여 올라가고 메대(이란 변방족)여 에워싸라 그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하였노라 하시도다

[] 21:3

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임산한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내게 임하였으므로 고통으로 인하여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

[] 21:4

내 마음이 진동하며 두려움이 나를 놀래며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

[] 21:5

그들이 식탁을 베풀고 파수꾼을 세우고 먹고 마시도다 너희 방백들아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바를지어다

[] 21:6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가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 보는 것을 고하게 하되

[] 21:7

마병대가 쌍쌍이 오는 것과 나귀 떼와 약대 떼를 보거든 자세히, 유심히 들으라 하셨더니

[] 21:8

파수꾼이 사자같이 부르짖기를 주여 내가 낮에 늘 망대에 섰었고 밤이 맞도록 파수하는 곳에 있었더니

[] 21:9

마병대가 쌍쌍이 오나이다 그가 대답하여 가라사대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 신들의 조각한 형상이 다 부서져 땅에 떨어졌도다 하시도다

[] 21:10

너 나의 타작한 것이여 나의 마당의 곡식이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너희에게 고하였노라

두마에 관한

[] 21:11

두마(에돔)에 관한 경고라 사람이 세일(에돔의 산)에서 나를 부르되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 21:12

파수꾼이 가로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아라비아에 관한

[] 21:13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라 드단 (구스인)대상이여 너희가 아라비아 수풀에서 유숙하리라

[] 21:14

데마(아라비아 일부지역) 땅의 거민들아 물을 가져다가 목마른 자에게 주고 떡을 가지고 도피하는 자를 영접하라

[] 21:15

그들이 칼날을 피하며 뺀 칼과 당긴 활과 전쟁의 어려움에서 도망하였음이니라

[] 21:16

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기한같이 일 년 내에 게달(이스마엘 자손들)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 21:17

게달 자손 중 활 가진 용사의 남은 수가 적으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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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는 경쟁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이웨이에서 차를 운전하고 갈 때,옆 차가 갑자기 빨리가면 나도 빨리 가려는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그 차를 앞지를 때 상쾌함을 느낍니다. 그러다 경찰차를 보면 까무라칠 정도로 놀라기도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해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애국자가 도기도 합니다.

세상 나라들도 경쟁심이 큽니다. 자기네가 더 잘살기위해 다른 나라의 자본을 강탈하다시피 빼앗기도 하고 나쁜 비신사적인 방법으로 무역정책을 만들어 힘으로 밀어부치기도 합니다.

미국에 대항하여 유럽 여러 나라들이 연합국가를 만들었는데, 이름하여 이유입니다. 이유를 그냥 만든게 아닙니다. 미국이나 다른 몇몇 강대국에 대항하려고 힘을 합친 것이 이유입니다.

이와 같이, 근래 EU 국가들이 미국을 견제하는 것처럼, 유다 주변 국가들은 그 당시 막강한 앗수르 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서로 동맹을 맺었고, 유다 역시 그 동맹에 가입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유다는 잘못된 선택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인가를 이미 경험했었기에, 더욱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반 앗수르 동맹에 가입하려고 결정 했는데 그 이유는 앗수르 나라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큰 애굽 나라가 그 동맹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 이사야는 애굽의 실체를 소개하면서 곧 망하고 말 그 나라를 의지하면 같이 망하고 말 것을 경고했었습니다.

고로 유다 나라는 애굽과 손을 잡는 대신, 바벨론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아직은 바벨론 나라가 가장 강하지는 못했지만, 앗수르 나라와는 달리 너무나 신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39장에 보면, 유다 왕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을 때, 그 소식을 들은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사신을 통해 글과 예물을 보내주었던 사실은 그들의 관계가 가까웠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가 취한 행동을 392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사자를 인하여 기뻐하여 그에게 궁중 보물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다 보였으니 궁중의 소유와 전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은지라” 말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급히 히스기야에게 찾아오더니, 그의 행동에 대해 심한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분명 이사야의 책망은 다소 심한 것이었다고 히스기야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국제 사회의 긴장된 위기 속에서도 애굽을 의지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었기 때문에, 앗수르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을 손 하나 움직이지 않고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죽을 병에 걸렸던 히스기야 본인의 목숨을 십 오년이나 연장을 받았었건만,  멀리서 축하해주러 온 사신들에게 모든 소유를 보여준 것은 극진한 대접의 일부라고생각하지 아니었을까요?

그만큼 유다 나라는 바벨론 나라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바벨론의 감추어진 모습이 공개되면서 충격을 안겨 다 주고 있습니다.

본문2절에 보면 이사야는 혹독한 묵시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이 앞으로 유다 나라에 행할 끔찍한 일들을 이사야에게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이사야 역시 늘 불안한 국제 사회에서 바벨론과의 관계가 유다에게 큰 득이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4절에서 “희망의 서광”이란 말을 하는 걸 보면 확실히 유다 백성들의 생각과 이사야 선지자의 바람은 같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겉 모습과는 달리 숨겨진 바벨론 나라의 실체는 앗수르 나라보다 더 포학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사야 선지자는 극심한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본문3-4절을 같이 봅시다, “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임산한 여인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내게 임하였으므로, 고통으로 인하여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 내 마음이 진동하며 두려움이 나를 놀래며,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라고 하엿습니다.

. 왜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임산한 여인의 고통과 같은 그 고통에 괴로워하고 있을까요?

그는 바벨론 나라가 장차 유다 나라에게 상상할 수도 없는 큰 고통을 안겨 다 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도시가 허물어지고 성전이 불타며 모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 것이, 바로 유다 나라가 그토록 신뢰하려 했던 신사?의 나라인 바벨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앗수르 나라가 무너졌기 때문에 그 땅엔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친절한 바벨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평화가 계속될 것만 같습니다. 그러한 때에 이사야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유다 백성에게 전한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믿지도 않을 뿐 아니라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해산의 고통을 산모 혼자 겪는 것처럼 자기 백성에게 닥칠 무서운 일로 인해 혼자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1절에 ‘해변 광야’라는 말은 바벨론 나라를 말하는데, 물이 많은 곳에 광야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보면 겉과 속이 정반대임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남방 회리 바람같이 몰려 왔다고 말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때에 갑자기 불어 닥치는 바람인데 얼마나 난폭한지 한번 불면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고 맙니다. 지난 주의 오클라호마에 불었던 토네이도 같이 된다는 의미가 이니었을까요?

겉과 속이 다를 뿐 아니라 음흉한 바벨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본문2절에 보면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한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잠깐은 숨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본성은 얼마 있지 않아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바벨론 나라는 식탁을 베풀고 파숫군을 세우고 먹고 마시는 삶을 누릴 것입니다.

본문5절 상반 절을 보면, 다니엘서 5장에 나오는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생각납니다. 그는 큰 잔치를 배설하고,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에서 취한 금 기명을 가져와서 ,귀인들과 왕후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께 영광은 돌리지 않고 각종 우상들을 찬양했었습니다.

다니엘530-31절을 보면, 그날 밤에 벨사살 왕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바벨론도 믿었던 엘람과 메대에 의해 망하고 말 것을 본문2절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5절 하반 절을 같이 봅니다, “너희 방백들아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바를찌어다”.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본문6절 이하에 보면 파숫군을 세우고 자세히 유심히 살필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마병대가 쌍쌍이 오는 것과 나귀떼와 약대떼를 보게 된다는 겁니다.  장차 유다 백성들에게 바벨론이 망했다는 기쁜 소식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계속해서 그것도 신속하게 전달될 것이라는 겁니다.

본문8-9절을 봅니다, “파숫군이 사자같이 부르짖기를 주여 내가 낮에 늘 망대에 섰었고 밤이 맟도록 파수하는 곳에 있었더니 마병대가 쌍쌍이 오나이다 그가 대답하여 가라사대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 신들의 조각한 형상이 다 부숴져 땅에 떨어졌도다 하시도다”

 파숫군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오랫동안 기다린 결과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멸망시켰고 모든 신들도 파괴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은 하루 아침에 될 일은 아닙니다. 오랜 인내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현대인에게, 특히 한국인들에게  부족한 것 한가지가 있다면 바로 인내입니다. 참을성이 없기 때문에 다가올 기쁨을 누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본문10절 상반 절은 곡식을 타작하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쉴 틈 없이 두드립니다. 왜 그럴까요?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입니다. 미안하지만 쭉정이는 하나님의 창고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시험이 뒤따릅니다. 인내로 잘 극복해 나가는 사람만이 알곡이 됩니다.

이사야는11절부터
두마와 아라비아에 대한 경고를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두마는 바벨론의 침입을 피하여 도망 온 사람들이 모여있던 곳인데 파숫군에게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닥친 고난이 빨리 지나가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파숫군의 대답이 아침이 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밤도 곧 온다는 것입니다. 밤과 같은 문제들이 인생에겐 수 없이 찾아옵니다. 한 고비를 넘겼다 싶으면 곧장 다른 문제가 찾아옵니다. 영원한 아침은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올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줍 니다.

아라비아에서 바벨론과의 교역으로 많은 돈을 번 대상들이 망한다는 말씀도 보세요.

바벨론을 등에 엎고 못된 방법으로 장사를 한 사람들은 바벨론이 망할 때 도망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반면에 고난과 핍박을 감수하면서도 바벨론과 손을 잡지 않은 약자들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잠언 23장을 보면 마음으로도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네 장래가 있겠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다 했습니다.

*
요한 계시록 18장을 보면, 바벨론은 교회를 대적한 로마 ,즉 세상을 의미합니다.

언뜻 보기엔 성공과 행복을 줄 것 같지만, 그 실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순간의 기쁨과 만족 때문에 속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가롯 유다/엔돌에서 점쳤던 사울왕)

믿음 안에서 참고 인내하면 ,심판의 날에 반드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을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지만 세상을 믿거나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세상이 망할 때 같이 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힘들어도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찾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가 되어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참고:김정규 목사/편집:안익선 목사 2013.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