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전팔기 하게 될 성도 (잠 24:10-16)
[잠] 24:10 |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
[잠] 24:11 |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치 말라 |
[잠] 24:12 |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
[잠] 24:13 |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 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
[잠] 24:14 |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
[잠] 24:15 |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 |
[잠] 24:16 |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
가)본문 16절을 보면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려니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아무리 의롭게 사는 의인이라 할지라도, 7번씩 넘어지는 것과 같은 반복적인 곤고함이 있다고 하십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이 말씀을 보고 흠칫 놀랐습니다. 과거 학창시절 ‘칠전 팔기’라는 한자숙어를 배운 적이 있는데, 아니! 성경 말씀도 또 같은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이 더 친숙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각설하고!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삶 가운데 어려움이 있을 때, 어려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어려움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불완전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모든 것이 바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만 부족이 있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부족과 죄악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다시 기회를 구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잘못과 어려움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에 있어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과 9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너무 고난이 지나쳐, 내가 살 소망을 잊어버리고, 그리고 내가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자 같이 되었지만, 내가 가만히 그 일을 생각해 보니, 나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만 의뢰하게 함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삶에 모든 소망이 끊겨,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지경에 몰리게 되었을지라도, 그 이유는 나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신 줄 믿고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룸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환난 중에서도 사단은, 우리로 말미암아 혼미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한 두번의 실패와 실수로 인해, 아주 우리를 망치고 포기하게 만들려 합니다.
우리가 그냥 도피해 버리고 방치해 남겨두고 숨겨두고 싶게 만듭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이것이 사단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독쟁하신 아들 예수 라는 비싼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헐값에 우리 자신을 사단에게 넘겨 주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맑은 날 후에 비 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며칠 맑았으면 흐린 날도 있고 비 오는 날도 있는 것입니다. 비가 오면 우산 준비하면 됩니다. 비가 오니 인생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 34편 19절을 보면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피가 그 마음에 흐르는 자는 다 의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다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고로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그야말로 나는 어려움을 당할 때 자학하거나 버림받았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떤 뜻이 계심을 믿고 의심하지 말고 곰곰이 하나님의 은혜의 뜻을 파악해야 합니다.
나)두 번째,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능히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쓴 잔을 드셨습니다. 십자가는 낭만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매우 고통스럽게 죽이는 형틀기구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시대에 사셨었다면, 예수님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는 십자가가 사람들 죽이는 가장 잔인한 형틀기구였 습니다.
예수님은 그 끔찍한 형틀기구를 우리 마음속에 소망의 십자가로 삼게 하셨고, 그 십자가를 보면 가슴이 감격스럽고 그 십자가를 생각만 해도 우리 가슴이 떨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감사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세상에서 더 나쁠 수 없는 최악의 지경을 세상에서 최고의 아름다움과 최상의 것으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은, 현실세계 속에서 어떻게 일이 되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그것입니다.
가장 나쁜 것은 ‘나는 안 돼, 이제 끝났어, 하나님은 나를 상대하지 않으실거야’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신약에서의 돌아온 탕자가, 물론 백 가지를 아버지께 잘못했었어도, 유일하게 잘 한 일이 하나 있다면,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고, 돌아가면 아버지가 받아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그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모든 것이 회복되었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돈 30냥에 욕심이 팔렸기에 팔았다고 만은 생각하 지 않습니다. 그의 깨어진 꿈 때문에도 팔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유대의 왕이 되셔서 모든 권세를 함께 누릴 줄 알았는데(당시 대부분의 제자들이 그리했다), 예수님의 모습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갖은 고초를 참으며 살았던 그의 꿈이 깨어졌기에, 그는 깨어진 꿈을 위한 작은 보상으로 돈을 받고 예수를 팔았던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도 살기 위해서 ,예수님의 면전에서 부인하고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고 절망감과 죄책감 때문에 목을 매어 죽었고, 베드로는 회개하여 주님을 위하여 살다가 장렬하게 순교하여 죽습니다. 두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만,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실패와 실수의 순간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의 결과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어찌 평생 사는 동안 잘 하는 일만 있겠습니까. 어찌 평생 사는데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어찌 평생 살면서 넘어지지 않고 달려가기만 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곤고한 때를 이겨 내가는 믿음의 백성의 의연한 삶입니다.
전도서 7장 14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셔서 우리에게 내일을 알지 못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일을 알지 못하니 우리는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신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지혜롭게 되는 것이지요.
다)세 번째, 어려움이 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감사와 찬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직까지 나를 버리지 않으셨고 어려움을 통해서 나를 깨우치고 새로운 역사를 주시기 위하시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없다는 것은 내가 숨조차 쉴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게 적어도 호흡을 주셨다는 것, 내가 호흡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의 최고의 멋진 모습은, 환란에 빠졌을 때, 낙담의 지경에 있을 때, 넘어졌을 때 툭툭 털고 끝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그가 빌립보 도성에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이뤘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면 당연히 낙심하고 슬퍼해야 될 텐데, 오히려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오히려 감옥 속에 찬미하며 주님께 기도하기를 힘씁니다.
그러자 옥터가 흔들리고 지진이 나며 착고가 풀려 그들은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간수장이 그것을 보고 자기가 잘못해서 그들이 출옥한 것으로 알고 자결하려고 합니다. 바울 일행은 놀라 그것을 말립니다.
감동한 간수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여, 그 간수와 온 집안이 예수를 믿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라)끝으로 네 번째, 의인은 실패했다 해도 다시 일어나 더욱더 겸손해지게 됩니다.
사람이 실수가 없다거나 부족이 없다는 착각에 빠지면 필연적으로 그는 사람도 무시하고 하나님도 부인하는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나폴레옹;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석가모니; 천상천하 유아독존; 교만의 종교?)
사실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착각일 뿐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혜는 우리의 부족을 깨우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 앞에 경거망동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을 무시하라고 주신 지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이 자꾸 보이고 너무 모자란 것 같으면 우리는 내가 어리석음에 빠져있지 않은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자기 삶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도 노력하면 자기가 깨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이와 같은 어리석음에 까지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의인은 부족하지만 절망하지 아니하고 그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힘으로 다시 일어나, 하나님 앞에 유익하게 용이 사용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순간 내 부족이 보이고 내 부족을 인정하는 순간 하나님의 능력이 체험됩니다.
다윗, 엘리야, 엘리사, 모세, 여호수아 모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자신을 겸손히 바라보았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을 행한 사람들입니다.
결론)
믿음의 사람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풀무불에 던져질 수도 있고 사자 굴에 던져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믿음의 백성입니다. 우리에겐 다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끈질긴 운명의 유전자가 심어져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유치원 시절인 듯 합니다만, 오뚝이 장난감을 파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것 참 요상한 물건입니다. 그것을 누군가가 사주셨는지 몇 일을 그것을 가지고 참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오뚝이는 그 누구도 자빠뜨릴 수 없는 물건입니다. 오뚝이가 왜 오뚝이 일 수 밖에 없나요? 그 무게 중심이 맨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무게 중심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고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떤 순간, 어떤 어려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 같은 사람들이 된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밤도 우리는 이런 기이한 역사를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참으로 고맙고 놀라우신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참고:기독 자료실/편집:익선 02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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