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엘리바스의 첫 번째 반론(욥기4장)

호걸영웅 2014. 11. 12. 03:48

엘리바스의 첫 번째 반론(욥기4)

  

[] 4: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 4:2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 4:3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 4:4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 4:5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 4:6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 4: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 4:8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 4:9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 4:10

사자의 우는 소리와 사나운 사자의 목소리가 그치고 젊은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 4:11

늙은 사자는 움킨 것이 없어 죽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

[] 4:12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 4:13

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 하여 서니라 내가 그 밤의 이상으로 하여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 4:14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 4:15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

[] 4:16

그 영이 서는데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 내가 종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으니 이르기를

[] 4:17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 4:18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 4:19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 4:20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 4:21

장막줄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성 경: [4:1]

 3장에서 전개된 욥의 저주와 한탄은 특정한 대상(object)을 두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독백적 한탄(言說)이었습니다. 욥이 마침내 입을 열고 자신의 절망적인 한탄을 쏟아내자 욥의 친구들도 어떠한 형태로든 그것에 대해 응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본문처럼 엘리바스가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그가 그들 가운데 최 연장자였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됩니다(Pope, 박윤선). 한편 엘리바스의 변론은 방법상에 있어서 매우 세련되어 있으며 내용상에 있어서는 보편 타당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그는 5:27에서까지 진행되는 긴 변론 중에서 욥을 정면으로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편 타당한 진리(=징벌, =보응)를 너무 도식적으로 고집한 나머지 욥의 특수한 상황(의인=징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엘리바스의 반론은 5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욥의 변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 경: [4:2]

 한편 본문 2절 전체를 알기 쉽게 번역하면 '누가 자네에게 말을 건네려 한다면 자네는 귀찮게 여기겠지?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일세!'(공동 번역)라고 할수 있습니다.

 , 친구의 불행을 보고 권면, 위로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심경을 솔직히 토로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1)욥이 자신의 말을 불쾌히 여기지 말 것과, (2) 욥에 대한 자신의 우정을 확인하여 이하 전개될 내용을 부드럽게 해줍니다.

 

 성 경: [4:3]

 본문에서 엘리바스는 과거에 욥이 행한 선행과 업적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의 변론의 서두를 시작합니다. 특히 이 인정 속에는 욥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 빠진 사람들을 보살피고 가르친 것에 대한 칭찬이 주조를 이룬다. 이처럼 엘리바스가 욥의 긍정적 측면을 먼저 부각시킨 것은 현재 고난에 빠진 욥을 위로하고자 하는 이유에서이기도 하겠지만 현재 욥에게 닥친 재난이 범죄의 결과임을 은근히 암시하려는 의도에서이기도 합니다.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 성경에서 ''은 종종 '능력'( 4:24), '보호'( 89:13), '도움'( 7:9;8:18)등을 상징한다. 따라서 '손이 늘어진 자'는 용기를 잃고 낙담한 자를 비유한다.

 

 성 경: [4:4]

 *무릎이 약한 자 - '무릎'은 신체 구조상 몸의 전체를 중심잡고 세우며 움직이게 하는 주요 부분입니다.  따라서 '무릎이 약한 자'는 자기 스스로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 자, 즉 신체 허약한 자를 가리키지만 실상은 심신적 허약자, 곧 힘이나 담력을 상실한 자를 스스로 생계를 잘 유지하지 못하는 극빈자와 소외계층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 경: [4:5]

 본 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습니다 (1) 욥의 나약함에 대한 비난: , 욥이 자신의 현재 처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타인들에게는 격려와 용기를 주었으나(4,5)이제 자신에게 재앙이 임하자 자기가 평소 가르친 대로 하지 못하고 낙담과 불신앙에 빠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욥이 타인의 문제는 해결하였으나 자신의 문제에 해결하지 못하는 모순된 처지에 빠졌다고 은근히 비난하는 것이죠?  

 

 성 경: [4:6]

 사람에게는 완전한 행위가 있어야 소망이 있고 하나님을 제대로 경외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엘리바스가 본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의인에게는 축복을 주시되 악인에게는 징벌을 주신다는 것(권선 징악)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 경: [4:7]

 [] 4: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 4:8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 4:9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본문은 이하 전개될 엘리바스의 변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부분으로서 '권선 징악'의 원리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이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성경적이긴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6:7). '죄의 삯은 사망'(6:23),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37:25,26)등 다양한 표현을 통해 그 행위에 상응하는 보응 원리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3:8). 

 

 성 경: [4:8]

 본 절 역시 7절과 동일한 논지(論旨)로 일관하고 있다. ,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 6:7) 자연의 보편 원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성 경: [4:9]

 *입 기운 - 직역하면 ''(NIV, RSV, breath)입니다. KJV '돌풍'(blast)으로 보다 생생히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박윤선).

 

*콧김 - 성경에서 '콧김'도 종종 극심한 진노를 가리킵니다. 

  성 경: [4:10]

 히브리 시가 문학(詩歌文學)에서 사자는 그 위용과 용맹성으로 인해 담대한 의인( 28:1), 권위( 30:29, 30)를 상징하기도 했으나 그 파괴적 성향으로 인해 '악인'( 91:13), '죄인'( 7:2; 17:12;22:13;35:17;58:6) 등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사냥감을 입에 물고 목을 빳빳이 세운 사자의 모습은 회개할 줄 모르는 악인을 상징한다( 17:12). 본 절에 나타나는 사자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성 경: [4:11~12]

 *움킨 것이 없어 - 사자가 그 먹이를 얻지 못한 상태를 가리키며, 본 절에서 엘리바스는 악인이 결국 그 소득(열매)이 없으므로 인해 멸망할 것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성 경: [4:13]

 *깊이 잠들 때 - 여기서 '깊은 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르데마'(*)는 완전한 무의식의 상태( 2:21), 어떤 것에 압도되어 정신()이 빠진 상태( 29:10), 아브라함의 잠( 15:12), 사울 일행의 잠(삼상26:12)과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같은 무의식 상태가 인간의 의도적 능력이나 방편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초월적 간섭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초월적 임재(간섭)에 의해 무의식 상태에 빠짐으로써 계시를 받을 준비가 되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구약 선지자 중 엘리바스와 흡사한 상태에서 계시를 받은 선지자들이 여럿 있으며( 7:1 ), 이러한 실례가 신약에서도 발견된다(사도 바울: 16:9, 사도 요한: 1:17)는 점을 눈 여겨 보아야 하겠지요? 

 

성 경: [4:14]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 '골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쳄'''(bone), '생명', ''을 의미합니다. 이 용어가 잠 3:8에서는 '골수'로 번역되었습니다. 성경, 특히 시가 문학에서 보면 ''는 심령의 처소 또는 그 사람의 인격과 동일시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죄로 인하여 내 뼈로 평안함이 없나이다'( 38:3), '저주가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 109:18),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17:22) 등입니다.

 

그러므로 본 절은 하나님의 초월적 임재에 접한 엘리바스가 그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인해 온몸에 전율을 느꼈음을 가리킵니다( 23:9; 3:16).

 

 성 경: [4:15] 

*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하나님과 관련하여서는 주로 그분의 ''(26:13; 33:4; 11:7,25 에서, 사물을 소생시키거나 진멸하는 그분의 '능력'(4:9; 18:15;33:6; 10:17; 5:9)을 뜻합니다. 한편 본 절에 나타난 ''은 하나님의 사자, 혹은 천사의 ''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Anderson, 삼하 5:24).

 

 성 경: [4:16]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 '형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무나'(*)는 하나님의 얼굴, 영광( 12:8; 17:15)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독특한 용어입니다. 따라서 본절은 엘리바스가 하나님의 얼굴(형상)을 보기는 보았으나 그것을 분변하지는 못했다는 뜻입니다.

 

성 경: 욥기 4:17~20

 

 [] 4:17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 4:18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 4:19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 4:20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성 경: [4:18]

 

*그 종 - 하늘에서 하나님을 수종 드는 (his heavenly attendants)자를 가리킵니다.

*그 사자 - 이것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의 무리를 가리킨다(KJV, NIV, angels 

 

 성 경: [4:19]

 *흙 집에 살며 - 이는 흙으로 만든 집에 사는 인간의 거주 상태(KJV, RSV,dwell(live)in (the) house of clay)를 묘사한 것이라기 보다는 흙처럼 연약하여 부숴지기 쉬운 인간의 육체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인간은 원래 흙으로 지음을 받았으며, 사후(死後)에 그 육체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성경적 사상에 비추어 볼 때( 2:7;3:19; 고전 15:47) 이는 인간의 기원과 그 운명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탁월한 표현이지요?.

 

*티끌로 터를 삼고 - 인간은 흙에서 왔으며( 2:7) 그 흙()에 삶의 기반을 두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 '하루살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쉬'() ''(각다귀)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전자가 쓰였습니다. 원래 좀은 의복을 상하게 하는 벌레인데, 하캄(Hakam) 같은 학자는, 여기서 '이쉬'가 좀 벌레와 유사하게 생긴 벌레로서, 흙 블록의 짚을 갉아 먹어 진흙 집을 무너지게 만드는 곤충이라고 보았습니다(Hartley). 하지만 개역 성경의 번역은  '이쉬' '하루살이'와 동일시했지요? (kjv=which are crushed before the moth?)

 

성 경: [4:20]

19절에서 인간의 연약성을 논증한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논하고 있는데, 특히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라는 표현은 마치 '아침에 태어났다 저녁에 죽는' 것 같은 인간 생명의 덧없음과 짧음을 과장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 경: [4:21]

[] 4:21

장막 줄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장막줄 - 여기서 '장막'은 인간의 육체를 상징하며(고후 5:1,4; 벧후 1:13), 줄은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생명(생명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본 절은 장막을 지탱하고 있는 줄을 뽑을 때,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빗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6:9; 38:12).

 

*지혜가 없느니라 - 17-19절에서 엘리바스는 인간 육체의 유한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한 바 있으며, 여기21절에서는 인간의 지적 도덕적 불완전성에 때문에 죽음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까닭에 미련하다고 여김 받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결론)

1. 타인의 사정을 다 들어보거나 잘 모른 상태에서, 섣불리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판단하는 일은 성도들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 되거나 덕을 세우지 못할 수 있으므로 항상 조심하여야 한다.

2. 영적인 체험도 물론 중요하고 귀한 것이기는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을 두지 아니하면 실수할 수 있음을 주의하자! 우린 체험을 통해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판단하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3. 늘 타인을 존중하고 타인의 잘못을 보았을 때,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믿음이 아름다운 믿음이다.        참조: 빛고을 비둘기님 /편집: 102814익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