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두 번째 고난 (제2장 )
서론) 우리는 지난 2주간에 걸쳐 욥기 서론 부분을 다루었기 때문에 1장의 내용은 이미 대부분 살펴 보았기에 더 다룰 부분이 없어서, 오늘은 2장으로 넘어가도록 합니다. 욥기 2장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욥이 받는 사단의 2차 시험(1-10절)과 욥의 친구들의 방문(11-13) 부분입니다.
본론) 그러면 지금부터는 각 절의 세부적인 특성을 연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 경: [욥2:1-3] 3절-네가 나를 격동하여 –라는 말씀을 보면, 한편 '격동시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수트'(*)는'자극하다'(KJV, moved)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내린 재앙이 하나님의 본 뜻에 의한 것이 아님을 보여 주십니다. 즉, 그것은 사단의 부추김과 충동질에 의해 주도된 것이며 하나님은 다만 그것을 허용하신 것입니다(2-6절).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시험하시고 그에게 고난을 내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주장(참소)의 거짓됨을 폭로하고 그의 오해를 제거하기 위해 또한 욥의 궁극적 신앙 성숙을 위해 시험을 허락하신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성 경: [욥2:4]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라는 부분. 이 표현은 당시 물물 교환을 하던 상인들이 사용하던 것인데 '(짐승의) 가죽으로 또 다른 가죽을 바꾼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공동번역). 즉 고대 사회, 특히 팔레시 지방에서는 짐승의 가죽이 주요한 교역 물품으로 취급되었던바, 이를 시장에 내어 놓고 다른 짐승의 가죽으로 교환하였습니다.
고로 인간이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던지는 것처럼, 외형적 가죽(예를 들면 재산, 자식등)을 버리고 내면적 가죽(생명)을 보전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잇습니다(Hartley).
성 경: [욥2:5]부터는 사단의 2단계 시험이 전개됩니다. 그런데 1장에서의 1단계 시험이 외형적 물질적 측면에 집중된 것이라면, 2단계 시험은 내면적과 영적 측면에 시험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즉, 첫 단계시험이 가축(양,약대,소,나귀, 1:15-17), 자녀(1:19), 종(1:15-17), 재물(집, 1:19)등에 내린 반면, 둘째 단계 시험은 욥 자신의 육체(7,8절), 그로 인한 가정적 파탄(9절)과 욥의 정신적 갈등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고로 사단은 “뼈와 살을 치소서”라고 합니다. – 사단은 욥이 육체적 고통에 빠지면 결국 하나님을 저주하는 불신앙의 상태에 빠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그 생명에 위협을 받으면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그것을 보전하기 위해 몸부림치듯(4절) 육체적 시련을 통해 생명의 위협을 욥이 받는다면 그 역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며 종국에는 신앙마저 내팽개치고 목숨의 부지를 위해 다른 것에 매달리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이죠.
성 경: [욥2:6]에서, 다시 한번 사단은 욥을 시험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습니다. 즉, 그는 욥의 생명을 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욥을 시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성 경: [욥2:7] [악창으로 치는 사단]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다 – 더 이상 고통을 줄려야 줄 수 없는 질병의 최악의 경우를 의미합니다. 전통적인 해석법에 따르면 이 병은 문둥병은 아니고(레 13장) 추측하건대 이는 부스럼(Bagdad boil)종류 또는 온몸 전체에 극한 간지러움과 진물과 고름이 나는 궤양성 피부병인 듯합니다.
성 경: [욥2:8] 재 가운데 앉다- 이것은 '재'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히브리어는 '에페르'(*)와 '데쉰'(*)등 2종이 있는데, 전자는 대부분 회개 내지는 애통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와 연관되어 사용되었다(삼하 13:19; 에 4:1, 3; 시 102:9등). 그리고 후자는 희생 재물 등 어떤 대상이 타고 남은 후에 생기는 문자적인 재를 언급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레 1:16;6:11;왕상 13:3;렘 31:40).
결국 욥은 성읍 밖, 또는 주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재를 버리는 쓰레기 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욥이 앓던 피부병은 문둥병과 유사해 보이기도 해서 고대 사회에서 부정한 병으로 취급 받았으며, 병에 걸려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현 상태를 재의 쓰레기 더미 위에 앉음으로써,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쓰레기 더미와 일체화시켰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 욥은 자기 몸에 난 종기와 부스럼, 그리고 가려움증을 해소하기 위해 이러한 행위를 해야 했습니다.
성 경: [욥2:9]-[저주하는 아내를 꾸짖는 욥] 여기에 나오는 욥의 아내의 권고는 일견(一見) 타당한 것처럼 들립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든 소유와 혈육을 상실하였고, 사랑하는 남편마저도 심한 악창에 걸려 생사(生死)의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녀는 깊은 절망과 좌절의 벽에 부딪혀 이와 같은 탄식조의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욥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신앙을 단순히 현세적 축복과 연관시켜 생각했으며, 하나님을 불공평하고 불의한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지금껏 지극히 섬기던 하나님, 경배하던 하나님을 더 이상 섬길 이유가 이젠 없다는 의미의 말을 합니다. 그런 정성과 경배의 결과가 현재와 같은 비참한 상태가 되었으니 그런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한 무익하고 무능한 하나님-이라면 바로 지금이라도 배반하고 다른 신을 찾든지 의술을 찾든지 하라는 의미의 말을 합니다.
요컨대 그녀의 신앙은 종교를 통해서 유익(복)을 얻고자 하는 기초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녀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음으로써 신성 모독죄를 범했을 뿐 아니라 믿음을 상실하는 단계로까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는 사단의 책략에 결정적으로 동조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성 경: [욥2:10]에서 욥은 그 아내에게-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중의 하나의 말 같도다 –라고 나무랍니다. 욥은 아내의 말이 윤리 도덕적 측면에서 죄가 될 뿐 아니라 종교적 측면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신성 모독적 언사임을 지적하였던 것이지요?(시 53:1).
우리가...받지 아니하겠느뇨 - 본서의 핵심 주제이자 욥의 신앙의 진수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 같은 욥의 신앙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1:21)라는 말 속에 이미 명백히 표현되었습니다. 만물의 조성자이며 생사 화복의 주관자이신 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니, 그분은 당신의 깊으신 뜻(섭리)에 따라 복을 주시기도 하시며 그것을 거두어 가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1:21). 그러므로 인간은 이것에 대해 하등 항변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토기장이의 비유'(사 29:16; 렘 18:4)를 통하여 성경 전반에 나타납니다. 욥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본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욥은 자신이 당하는 재앙이 단순히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며,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영적 유익을 위해 시련과 연단을 주신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5:17; 신 8:5; 삼하 7:14; 시 94:12;잠 3:11, 12;고전 11:32;히12:5-11 등).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라는 선언을 통해 사단의 2단계 시험도 헛되이 돌아가고, 욥의 신앙의 진정성(眞正性)이 재확인되었던 것이죠?
그러네 본문에 나타난 '입술로'이라는 “사람의 생각은 말로나 행동으로 표현되기 일반”임으로 욥은 외적 범죄 행위와 동일하게 내적 범죄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죄악 된 것임을 인식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말 한마디에도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생각하며 내어 뱉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제 2단락> [욥2:11-13] [친구들의 방문과 조문]
두 단계에 걸친 사단의 시험과 그에 대한 욥의 반응으로서 본서 도입부는 종결되고 본문에서부터 본론부가 시작됩니다.
*친구 세 사람 - 이들에 대한 자세한 인적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여러 자료를 근거하여 볼 때 다음과 같이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들은 욥을 조문하러 오기 이전부터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욥을 방문하기 전에 서로 약속했다(11b절)는 점에서 분명히 암시되고 있습니다.
둘째, 이들 모두는 당시 상당한 수준의 학식과 재물을 겸비한 자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나름대로의 정확한 논리 전개와 풍부한 지식을 동원하여 욥과 변론을 펼치는 바(4:1;5:27) 이는 그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학식과 지혜를 소유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당시 막대한 재물과 명예를 지닌 자(1:3)였던 욥과 교제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것과 비견될 만한 수준의 재물과 명예를 가졌을 것입니다.
셋째, 이들 모두는 히브리 신앙을 가진 자였습니다. 즉, 그들은 비록 욥의 신앙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할지라도(1:1, 8; 2:3) 하나님의 공의, 성품 등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신앙 지식을 소유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출신 지역은 데만, 수아, 나아마 지역인데, 모두 에돔 지역이거나 근방의 사람들로 볼 수 있습니다.
성 경: [욥2:12] 그 ‘욥’인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 이는 문자 그대로 욥의 형체가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변형되었다는 의미로 봅니다. 그만큼 병이 심해졌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본문은 욥의 질병과 그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외견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소리질러 울며..겉옷을 찢고, 재를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 본문에 나타난 일련의 행동은 비록 그것이 당시의 통례적인 관습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참된 우정의 발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즉, 그들은 주변의 이목이나 자신의 체면에 연연해하지 않고 고통 당하는 욥에 대한 진실한 연민의 정과 비탄의 감정을 표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욥의 친구들은 순수한 동기에서 욥을 방문하였으며, 욥을 위로하기 위해 충심을 다 했습니다.
성 경: [욥2:13] 칠일, 칠야를 같이 앉다- 이 기간은 죽은 자를 위한 애곡 기간과 동일하다(창 50:10; 삼상31:13; ). 따라서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최상의 애통의 표시를 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 이를 어떤 학자는 탈무드의 전승에 비추어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즉, 죽은 자의 집을 방문한 조문객들은 상주가 먼저 말을 열기 전까지는 한마디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Talmud, Moed, Qatan 28b).
그러나 굳이 이러한 관례에 비추어 본문을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비참한 상황에 대해 말을 잃었으며,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네기 보다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도리어 효과적이라고 생각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통 당하는 자와 같이 있어줌으로써 그들은 나름대로 깊은 위로와 우정을 보여주었던 것이지요.
결론) 우리는 욥2장에서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 우리가 종종 고난 받는 이유는, 물론 우리의 욕심이나 우둔함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으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고통이나 어려움이 우리의 믿음의 성숙이나 훈련,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변장된 축복’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고로 우리는 고난 가운데 낙망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바라보는 미래적인 영적인 눈을 뜰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2. 믿음의 사람들은 그 형제자매가 큰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 함께 할 수 있는 사랑과 우정, 형제애를 발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 하는 것보다 큰 사랑은 없습니다.
3. 그리스도의 별명이 ‘임마누엘’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좌의 저주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 함께 하신 아들 하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고통과 죄와 함께 하신 아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사랑하고 감사하는 우리 믿음이 되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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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산울림/101514 익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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